509화 그리하여 복될 것이며 (12)
“···가끔은 그대의 한결같음이 경이롭게 느껴지는군·”
아니 왜· 내가 대체 뭘 했다고·
“쐐기가 되었을 때의 고통은 나도 모른다· 하나 쐐기가 된다는 것은 두 세계의 연결 통로를 자청한다는 것· 결코 적지 않은 힘이 들 것이고 자연히 느껴지는 부담도 과할 수밖에 없으리·”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는 게 최선이겠군·”
“동의하나 쉽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투덜거리려던 걸 참으며 나머지 의문들로 고개를 돌렸다· 가장 궁금했던 것이 해소되었단들 산재한 문제들 전부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으므로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보다 사탄이 도망간다면··· 그땐 지옥에서 상대하게 되는 건가?”
“그래·”
계명이 ‘그걸 지금 물어보냐’ 따위의 눈빛을 했지만 나는 꿋꿋하게 질문을 이어 갔다·
“추가로 고려해야 할 사항은·”
마역도 악마 입장에선 나름 테라포밍 된 장소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고향 행성만큼 친숙하지는 않을 터· 이런 변수에 대해선 미리 상정해 두는 게 맞다·
사탄이 입을 홈 어드밴티지부터 지옥에 입장한 순간 우리가 받게 될 페널티로 뭐가 있을지 모르니 말이다·
“그대나 내가 조심해야 할 것은 없다·”
“···다른 사람들에게 문제가 될 게 있나?”
“마기·”
한데 계명이 너무 당연한 걸 이야기로 꺼내 들었다· 처음 그 단어를 들었을 때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의구심이 들었을 정도였다·
“···아 농도·”
하지만 반 박자 늦게 뇌가 답을 도출했다· 마역은 대지에서 마기가 올라오는 정도지만 지옥은 그렇지 않다· 그곳에선 땅과 하늘 바람과 물 등 모든 만물이 마기라는 독소를 품은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용사라면 활동이 가능할 것이나 다른 인간들은 쉽지 않을 것이다·”
“···인원을 제한하게 되겠군·”
나는 빈틈이 난다는 가정하에 잠깐씩 끼어드는 것 정돈 괜찮지 않나 하던 판단을 철회했다· 최선은 사탄이 도망가기 전에 그를 죽이는 것이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어려울 것 같았던 까닭이다·
그리고 사탄이 도망가게 될 경우 지옥에서 제대로 활동할 수 있는 건··· 계명의 말에 따르면 오직 우리 둘뿐이다· 인퀴지터도 어느 정도 가능하다곤 하나 그녀는 애시당초 쐐기 역할로 빠질 예정이니 제대로 된 전력이라 여길 수 없고 말이다·
“···지금부터 회복에 전념하겠다· 변수가 생기면 전달 부탁하지·”
“그리하겠다·”
나는 결국 싸움에 끼어들 틈 찾기를 포기한 채 꾸물꾸물 자리에 앉았다· 이런 자리에서 앉아도 되나 싶긴 했지만 서서 쉬는 것도 뭔가 그림이 이상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한데 아까 묻고 싶다던 건 뭐지?”
“아··· 내 공격이 닿지 않고 사라지는 게 몇 번 반복되었다· 해당 능력은 어떻게 파훼하지?”
“···기이하군· 사탄에겐 그런 능력이 없을진대·”
그보다 이 능력은 계명도 모르나 보네· 그럼 오만도 이 기술에 대해선 몰랐을 확률이 높다는 건데··· 설마 침공한 후 꾸준히 자기 개발한 건가? 악마 주제에?
“관측하지 못한 지금으로선 무어라 판단이 어렵군·”
“그런가· 알게 되면 공유 부탁하지·”
나는 최종 보스가 왜 자기 개발을 하는 거냐며 속으로 투덜거리다 다시 회복에 집중했다· 긴장이 살짝 풀려서 그런가 뜨끈뜨끈한 차가 먹고 싶었다·
‘···근데 생각해 보니 회복이라는 거 제물 바쳐서 할 수는 없나?’
「네?」
‘나 가진 거 많잖아·’
이번에 챙긴 오만의 수급도 있고 베헤모스 몸뚱이 반절도 아직 남아 있다· 그거면 회복에 쓸 수 있지 않나?
[싫어·]
‘되긴 되나 보네·’
[이건 계약에 해당되지 않아·]
‘이상하다· 그걸 왜 네가 판단하지?’
[내가 너와 한 약속은 멋대로 몸뚱이를 뺏으려 들지 않는 것에 있지 네 행동 전반에 협조하는 것은 아니야· 이건 오래된 마법도 내 쪽의 손을 들어 줄 거다·]
‘글쎄 확신하긴 좀 이른 것 같은데·’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냉정하게 결론을 내렸다·
이건 분노의 판정승이다· 여기서 몸을 회복시켜 주지 않는다고 그녀가 이 몸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위한 밑밥을 깔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이러면 버프도 못 걸겠네·’
[하 걸어 주겠어?]
‘하여간 자기 목숨줄 늘리는 데는 도가 텄지·’
마찬가지로 내 몸이 빠르게 회복되어 회복이 아닌 버프를 요구하게 된대도 분노는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이 몸이 죽는 것도 분노의 패배지만 사탄이 죽는 것도 그녀의 패배가 되므로·
‘이래서 지능보다 도덕성이 우선이라니까·’
일의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거기서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제대로 빼먹을 줄 알면 뭐 하나· 인성이 밑바닥인데·
‘너는 내가 왜 널 사람 취급도 안 해 주는지 모르지?’
[···어차피 동정 안 할 걸 다 아는데 함부로 혀 굴리지 말지?]
‘다른 악마들은 다 너보고 기만이다 거짓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너는 빵점이야·’
사과할 수 없다면 사과하는 척이라도 할 줄 알든가· 위선도 결국 지능에서 비롯되는 걸 생각하면 쟤는 머리가 마냥 좋은 것도 아니라니까·
나는 그 부분에 대해 혀를 끌끌 차며 라텔 배 속에 있는 것들을 이용할 방법을 강구했다·
“···계명 혹시 오래된 마법을 쓸 줄 아나?”
문득 오래된 마법이란 게 꼭 저 악마새끼를 거칠 필요는 없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어디서 들었 아니 분노가 알려 주었겠군·”
내 물음을 두고 경악하던 계명이 이내 상황을 파악하고 옆머리를 쓸었다· 힘들의 충돌로 그녀의 푸른 머리카락은 폭풍 앞 깃발처럼 거침없이 흔들리고 있다·
“알지만 별로 알려 주고 싶지는 않군·”
“한 번 딱 한 번 쓰기 위함이다·”
“그 한 번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알고 말하는가?”
···지금까지는 별문제 없었는데· 이거 사실 엄청 위험한 거였나?
“분노라면 그래· 그 미쳐 버린 악마라면 생존이라는 대의하에 얼마든지 써먹었겠지만··· 내 충고하건대 그대는 같은 길을 걷지 않음이 좋으리라·”
“그렇게 위험한가?”
“오래된 마법은 세계를 벗어난 무언가이니· 오만조차도 마지막의 마지막에 다다라서야 패로 꺼내 들었음을 보지 못했나? 그것은 신들도 꺼리는 상위 개념이다· 한낱 인간이 써서 좋을 게 없다·”
“···독도 잘 쓰면 약이라던데·”
“내 경고가 경고처럼 들리지 않는가 보군·”
나는 베르세르크의 창이 사탄의 몸에 박히는 걸 보았다·
“고향에 돌아가서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면 절대로 그쪽과 연관되지 마라· 아니면 그대 이 세계를 위해 그대의 영혼마저 바치고 싶나?”
차근차근 조급함 없이 베르세르크와 크러셔 미스틸테인이 돌아 가며 박는 창은 그 길이가 미세하게 줄어들고 있다· 사탄의 몸속에 창이 파고드는 중이라는 증거였다·
“···그렇진 않다·”
“그대가 내 전 직장 동료만큼 멍청해지지 않아서 다행이군·”
한데 저렇게 목숨을 걸어 가며 힘내는 이들이 있는 상황에서 정말 이걸 위험하단 이유로 묵혀 놔도 되나? 아니 그 이전에 이게 정말 끔찍한 일이라면 이미 몇 번 써 본 파우스트는? 그리고 계약을 갱신할 때 같이 있었던 건? 그건 문제없나?
“···악마와 이 몸의 원주인을 통해 간접적으로 몇 번 써 본 적 있다·”
“무지가 빚어낸 어리석은 용기로군· 당사자가 아닌 것을 감사히 여기도록·”
“···이 몸의 원주인도 영향을 받았겠나?”
“되묻건대 그 존재의 인간성은 멀쩡하던가?”
나는 계명의 질문을 두고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나와 대화하거나 악마와 싸울 때가 아니면 심상 속에 우두커니 선 채로 멍을 때리는 소년을 알기 때문이다·
“···많이 무미건조한 편이긴 하다·”
“아직 눈물을 흘릴 줄 아나?”
“···그래·”
“최악은 면했군·”
나는 계명의 담담한 외침 속에서 침음을 삼켰다·
기이하리만치 낮던 소년의 자존감도 혹시 이것에 영향을 받았던 걸까· 더불어 소년이 지금까지 잃어 온 인간성의 크기는 과연 얼마나 될까· 내 골 안쪽에선 그런 고민이 성난 파도처럼 휘몰아치는 중이다·
“조언하건대 인간성을 모조리 상실하여 숨조차 쉬지 않는 인형이 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여기서 멈추는 것이 그 존재에겐 좋을 것이다·”
“···그런가·”
“그래·”
나는 무언가 목에 걸리는 느낌을 받았으나 끝내 고개를 주억이는 것으로 끝냈다· 소년도 이 대화를 듣고 있었을 것이니 내가 추가로 말할 건 더 이상 없었다·
“···그렇지· 인간성을 잃은 것치고 분노는 상당히 팔팔하던데·”
“인간성이라 함은 꼭 감정을 느끼는 것만을 뜻하지 아니함이니· 분노 또한 그 자신의 대가를 치르고 있을 것이다· 우리의 눈에 제대로 보이지 않을지라도 반드시 확실하게·”
아울러 분노에 대한 것도 내가 신경 써 줄 건 더 없다·
나와 계명 사이에 침묵이 앉았다·
* * *
와지끈!
“쯧·”
벌써 네 번째· 사탄의 살갗을 헤집으려던 무기가 박살 났다·
“이거 첨부터 내 창 써뿟으면 큰일 났었겠구마잉·”
미스틸테인이 어깨를 으쓱이는 동안 베르세르크는 혀를 한 번 찬 후 새 무기를 꺼내 들었다· 중요한 건 살갗을 파내고 속살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특정한 형태를 고집하거나 하진 않았다·
다섯 번째 소모품으로 간택된 트루투헨더가 덜 세워진 날로 탁한 광채를 뿜었다·
“이거 좋네!”
베르세르크가 움푹 파인 자리에 투헨더를 박자 새로운 못을 기다리던 크러셔가 눈을 빛냈다· 투헨더 정도의 두께감이면 롱소드보다는 늦게 깨질 것이고 가드 부분이 있으니 창보다 더 걷어차기 쉬우리란 판단 때문이었다·
“거 힘도 좋지·”
미스틸테인은 그런 크러셔의 태도가 좀 질린 기색이었으나 그렇다고 물러서지도 않았다· 그의 손이 투헨더를 고정하듯 붙잡았다·
쿠웅!
크러셔는 베르세르크를 발판 삼아 뛰어올랐다· 그러고는 공중에서 몸을 휘익 비틀어 사방에서 불어닥치는 강풍에 대응했다·
가벼운 몸과 시시각각 뒤틀리는 사탄의 몸이 엮이며 착지해야 할 지점이 계속 바뀌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녀의 손에는 베르세르크와 그녀를 연결해 주는 밧줄이 있었다·
“당겨!”
크러셔의 신호가 떨어지는 순간 베르세르크는 망설임 없이 밧줄을 당겼다· 크러셔의 몸이 그녀가 도착해야 할 자리로 훅하고 끌어당겨졌다·
콰직!
허공에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빠르게 이동한 이가 그대로 트루투헨더에 꽂히듯 내려앉았다· 칼자루에 상체가 찔리지 않도록 교묘하게 방향을 튼 채로 다만 두꺼운 두 다리는 양쪽으로 나 있는 가드를 짓밟으며·
엄청난 힘을 품은 채 내리찍는 착지였다·
“휘유! 역시 화끈하구만·”
그런 투헨더가 옆으로 무너지며 힘이 분산되지 않도록 하는 건 미스틸테인이었다· 그는 창을 던질 때처럼 팽팽하게 부푼 팔의 근육을 이용해 못을 고정하는 손가락이 되었다·
“간다·”
연이어 크러셔가 공중제비를 돌며 투헨더의 칼자루에서 나온 순간 베르세르크가 미리 꺼내 둔 망치를 들어 투헨더의 폼멜을 내려쳤다·
까앙!
칼자루를 감싸고 있던 나무가 산산조각 나고 폼멜이 으스러졌다· 동시에 칼자루가 박살 나며 드러난 칼날의 연장선이 망치와 부딪치며 사탄의 살 안쪽을 파고들었다·
“크으!”
그 과정에서 일어난 진동에 미스틸테인이 반사적으로 탄성을 흘렸다· 손목이 시큰거리는지 한 손을 떼어 손목을 털레털레 턴 건 덤이었다·
“아찔하구만·”
“교체를 원하나?”
“에이 그럴 리가·”
물론 그는 그렇게 말할지언정 뒤로 물러나진 않았다· 저 두 사람처럼 움직일 자신이 별로 없기도 없거니와 창을 주로 써서 그런가 무언가를 붙들고 버티는 것엔 좀 더 자신이 있던 까닭이다·
“안 부러졌지? 다시 간다!”
다만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크러셔는 다시 한번 뜀박질할 준비를 했다· 주작이 사탄의 머리채를 잡고 눈알에 부리를 박던 시점이었다·
“간다!”
흰자위가 발광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흥분한 크러셔가 또다시 뛰어올랐다· 조율 없는 일방적 통보였지만 베르세르크는 묵묵히 맞춰 주었다·
콰직!
칼자루가 부서져도 남아 있던 가드부분이 재차 크러셔의 발에 짓밟혔다· 우드득· 지금까지와는 무언가 다른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검 안쪽이 뒤틀려 깨질 것 같은 금속음도 아니요 가드 부분이 칼자루에서 떨어져나가는 소리도 아닌 무언가 북 터지며 뚫리는 소리였다·
“호·”
“···손맛 좋은데!!”
이건 확실하게 살가죽이 관통된 소리다·
크러셔가 뒤로 물러서는 사이 베르세르크가 몸을 뱅글뱅글 돌리며 들고 있던 망치에 모든 힘을 담았다·
“비켜라!”
“우왓!”
바람에 창이 넘어가지 않도록 마지막까지 버티던 이가 최후의 순간 뒤로 크게 굴렀다·
아드득!
망치가 투헨더의 손잡이 쪽과 부딪치며 철을 구부러트렸다· 아울러 간신히 붙어 있던 가드가 완전히 떨어져 나가고 뒤틀리기 시작한 칼날이 사탄의 피부 안쪽을 파고들었다·
“안쪽까지 단단하믄 어카나 싶었는디 그건 또 아닌 듯해서 다행이오·”
“동의하는 바다·”
“아 옆으로 좀 찢으면 안 되나? 안쪽에 있는 살 들어내게·”
순식간에 절반 넘는 길이가 안쪽으로 사라지고 핏방울이 송글송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될지는 모르겠군· 워낙 질겨서·”
“뭐 이것저것 해 보면 되지 않겄소· 일단 가 보자고·”
“근육과 살점이 전부 헤집어지면 어떤 꼬락서니일지 궁금하다니까·”
덩달아 세 사람은 피처럼 진하고 선명한 미소를 입가에 맺었다· 앞으로에 있을 일을 예견하는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