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3화 하지만 복될 것이기에 (2)
뜬금없이 나타난 사슬이 내 발목과 손목을 각각 휘감았다· 연고도 없이 공중에서 나타난 걸 보면 최소한 마법적인 무언가인 듯 했는데 이게 무엇 때문에 나타난 건지는 바로 알아내기가 힘들었다·
범인이 누구고 어떻게 사슬을 소환했는지 찾기 어렵다는 소리가 아니라 당최 뜻밖의 일이다 보니 판단도 전에 이성이 고장 나 버린 것에 더 가까웠다·
“···뭐야 이건·”
이 와중에도 나는 착실히 손과 발을 움직여 보았다· 한시가 바쁜 상황이니 당연했다· 나는 당장 균열 너머로 가야 했고 이 사슬은 그런 나를 막아 세우는 장애물에 불과했다·
“모험가?”
차캉!
그러나 내 몸이 균열 방향으로 나아간 순간 사슬이 곧장 팽팽해지며 나를 멈추도록 만들었다· 존재하지 않는 공을 걷어차는 것처럼 앞으로 뻗어지던 발은 허공에 멈춰 파르르 떨리는 중이다·
정말 어이가 없었다·
“무슨 일이야?”
“이 사슬은····”
나는 다른 이들의 부름을 배경음 삼으며 발과 손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그런 격렬한 저항에도 사슬은 박살 나거나 끊기지 않았다·
경직된 채로 공중에 매달린 손과 발에서 사슬의 쇳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말했잖아 못 간다니까?]
“버러지 같은 악마 새끼가····”
그쯤 되어 나는 이 사태가 명확히 인지되었다· 이건 악마:분노의 짓이다· 깔깔 웃으며 못 간다고 지껄이는 말 자체가 명명백백한 증거였다·
나도 모르게 입새로 가벼운 욕설이 튀어나왔다·
[얘 괜찮니?]
아울러 나는 다른 이들에게 대답을 들려주기보다 사슬에 묶이지 않은 쪽 손바닥을 보여 주었다· 대충 잠깐 기다려 달라 시간을 달라 이런 의미였다·
또한 묶인 쪽 손으로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방금 전이 신체적으로 힘만 주는 데 그쳤다면 이젠 진심으로 사슬을 깨 버릴 마음이 만만해서였다·
으드득·
그러나 마력은 그런 내 뜻을 배신했다·
갈아야 할 밭에 바위 하나가 박혀 꼼짝도 않는 것처럼 혹은 누군가가 손아귀로 단단히 붙든 것처럼· 체내의 마력이 옴짝달싹을 안 한 것이다·
“풀어·”
[내가 왜?]
이 새끼가 진짜?
나는 범인일 게 분명한 놈을 두고 눈을 한 차례 치켜떴다· 그러곤 1초도 지나지 않아 판단을 내렸다·
이 새끼는 말로 타이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상황이 급한 건 사실이나 저 자식한텐 약간의 경고가 필요했다· 자칫하면 지금 이후로 번번이 이런 지랄을 떨 가능성이 있기에 더더욱 그랬다·
‘야 내가 장난하는 것 같냐?’
하여 나는 금 같은 1분 1초를 소비하여 나의 안쪽으로 집중을 던졌다· 잠이나 깊은 명상에 들지 않고도 심상 내부를 들여다보기 위한 편법이었다·
[하 난 뭐 장난치는 것 같─?!]
「···내가 수작 부리지 말랬을 텐데!」
[아악!]
그리고 침잠한 시야 위로 심상 내부가 떠올랐을 때 나는 보았다· 나처럼 재 부스러기 언저리가 되어 버린 파우스트가 분노의 옆구리를 향해 헥토파스칼 킥을 날리는 진풍경을·
연달아 펼쳐진 상상도 못 할 상황에 내 말문이 절로 막히고 말았다·
[망할 애새끼가!]
「당장 풀어!」
지금 상황이 조금만 여유 넘쳤어도 ‘아 저 새끼들 또 지랄이네····’ 라고 넘기겠건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는 게 천추의 한이다·
몇 초간의 침묵 끝에 정신을 차린 내 머리가 두 먼지 놈들한테 냉수를 와다다 쏟아부었다·
[하 내가 풀어 줄 것 같아?!]
「풀지 않겠다면 강제로 풀게 해 주지···!」
그러나 평상시와 다르기는 이 새끼들도 매한가지인 것 같다· 평소였다면 찬물에 얻어맞는 즉시 축축해진 상태로 공손하게 날 보았을 파우스트나 말로 하면 될 걸 왜 물까지 뿌리냐고 왈왈 짖었을 분노가 물세례를 그대로 생깠다· 안 맞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맞았는데도 전혀 신경 안 쓰고 둘 만의 싸움을 이어 갔단 소리다·
「뱃가죽을 갈라 내장을 끄집어내면 네놈도 주제를 알겠지····」
[발칙한 발언이구나 애송아· 내가 고작 그런 고통에 패배할 것 같으냐? 그리고 애초에 네가 내 내장에 손댈 수는 있을 것 같아?]
피부가 바싹 구워진 파우스트가 사슬과 롱소드를 우악스럽게 쥐고 분노에게 덤벼들었다· 분노 역시 순순히 당해 주진 않았는데 부채와도 같은 것이 그녀의 손에 생성되며 파라락 펼쳐졌다·
펼쳐지면 방패가 되고 접히면 칼날이 되는 신묘한 무기였다·
[하하! 안 그래도 굼벵이와 다름없던 몸 이젠 더욱 둔해졌구나· 아니면 그래· 그레트헨이 널 대신해 주던 1년이 그렇게나 달디달았더냐? 그랬던 거야?]
「닥쳐!」
[아 그러고 보니 네게 익숙한 고통은 몸이 통째로 증발하고 수복되는 쪽이 아니라 썰리고 베이는 쪽만이던가?]
그런데 지금 뭐라고?
[뭐 그게 아니더라도 그레트헨이 가져오는 고통은 하나같이 감당하기 힘든 것들 뿐이지만·]
「···너!」
[그래도 애송아 그레트헨을 돕겠다는 마음하에 고통을 대신 감당하기로 한 건 바로 네 선택이지 않니· 그런 주제에 그 통증 하나 견디지 못해서 반응이 굼떠지면 어떡해? 그래서야 이것 외에 유효한 도움은 줄 수 있겠어?]
「그 입 다물어!」
[글쎄 별로 그러고 싶지 않은데·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나는 아주 드물게 싸우지만 한번 싸우면 머리채가 뜯기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우는 두 명의 다툼을 잠깐 지켜보았다·
본래라면 당장 끼어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나 저들의 대화에는 묘한 구석이 있어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나는 차분히 저들의 대화를 곱씹고 그 속에 내포된 함의를 찾았다·
반 박자 늦게 뒷골이 찌르르 당기는 기분이 되었다·
“이 사슬이 문제인 건가·”
“뭐야 이거? 마법?”
[어 내가 보기엔 마기 같은데····]
“거참· 신기하구로· 얼음처럼 너머를 비추는 데 손에는 만져진다는 게····”
[조금 이상한 게 있어· 이거··· 아무리 봐도 얘가 가진 마기로 구성된 건데?]
“예?”
상상도 못한 배신에 내 손이 절로 뒷목을 붙잡는 동안 나머지 사람들이 수군수군 대화를 나누었다· 적막 속에서 무엇을 알아냈는지는 몰라도 각자만의 해석을 내놓기 시작한 것이다·
“일단 비켜 봐라·”
그리고 난무하는 분석 속에서 베르세르크가 가장 먼저 움직였다·
사각!
그녀의 할버드가 사슬 위로 힘껏 내려쳐졌다·
“잘렸네·”
“잘렸구마잉·”
한데 의외로 사슬은 금방 잘려 나갔다· 베르세르크가 기세 좋게 할버드를 휘두른 것과 별도로 참 허무한 결말이었다·
[어··· 잘렸는데 복구됐다·]
그렇지만 쉽게 잘린 것에도 다 이유가 있다는 듯 반으로 갈라진 사슬이 도로 재생되었다· 어찌나 말끔한 복원인지 방금 잘렸다는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을 정도였다·
“이거····”
“야 나와 봐· 내가 해 볼게·”
그 기이함에 베르세르크가 눈썹을 치켜들고 미스틸테인이 흥미로움을 느꼈을 때 크러셔가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위쪽 사슬을 붙잡았다· 꼭 사슬을 힘으로 부숴 보려는 사람 같았다·
콰직!
“와 이걸 부사뿟네· 저거 인간이가·”
“설마 넌 못 하나?”
“아무렴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는··· 아 그것도 꼭 그렇지만은 않나? 강도가 우째 되는지를 모르니·”
[이것도 복구되네· 흠· 잠깐 비켜 봐라· 내가 해 보게·]
하지만 크러셔의 맨손을 이용한 박살 내기도 주작의 불꽃을 이용한 정화도 사슬의 질기디질긴 복원력에는 패배했다·
결국 그들의 시선이 여지껏 고요를 바른 채 지우지 않는 이의 입술로 향했다·
‘야·’
한편 나는 다른 이들이 내게 집중하는지도 모른 채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이런 순간에조차 내게 골 때림을 선사하는 이들은 박 터지게 싸우는 중이라는 것이 제일 짜증났다·
‘야·’
그들을 향한 내 두 번째 부름이 훨씬 짙은 강세를 품었다·
[하 정말이지 엉망진창이 따로 없군· 이래서야 내 뱃가죽은커녕 옷깃이라도 잘라 내겠─?]
아 진짜 심상 안까지 들어가긴 싫었는데·
“야· 나 무시하냐?”
몸이 아래로 끌려 내려가는 느낌과 함께 발등에 묵직한 무게가 와닿았다· 퍼억! 분뇨 같은 분노 새끼의 무게였다·
[···하! 여기까지 행차하셨군·]
내 발길질에 얻어맞은 분노의 몸이 공중으로 부웅 떴다가 그대로 미끄러지듯 착지했다· 기껏 내가 깔아 둔 녹색 잔디는 그녀가 든 부채검에 긁혀 진한 고동색 흙을 내보이고 있다·
「그레첸···!」
“파우스트 너는··· 이따 나 좀 보고·”
「그···!」
“그 전까진 입 다물고 있어· 빡치니까·”
「····」
진짜 이 답 없는 꼬맹이를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수명이 안 든다는 말에 냉큼 넘어갔던 과거의 자신과 정말 중요한 얘기는 쏙 빼놓는 것으로 나를 속인 빌어먹을 꼬마를 등졌다· 지금 저 얼굴까지 보면 속이 부글부글 끓을 것 같아서 선택지가 없었다·
“야·”
아니 사실 속은 한참 전부터 용암밭이었다· 애써 다독이고 덮어 두었던 온갖 감정 애송이가 깜찍한 짓을 벌여 준 덕에 다시 폭발해 버렸으니까·
“나 너랑 어울려 줄 기분 아니야·”
[친애하는 그대· 그렇게 말하면 꼭 언제는 나와 어울려 줄 마음이 있던 것처럼 들리잖아·]
어째 심상 속에서도 혈압 오르는 감각은 그대로냐· 나는 조금 붕 뜬 감각으로 뒷목을 주무르며 분노를 노려보았다·
[실제론 이런 순간이 아니면 나를 봐 주지도 않을 거면서·]
정말이지 저 목을 이렇게까지 조르고 싶던 적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내 눈이 동공의 흔들림 한 번 없이 메피스토펠레스를 응시했다·
“풀어·”
[이미 말했지만 싫어·]
“진짜 뱃가죽 갈리고 싶나 보지?”
[하하하! 친애하는 그대 내 기억을 봤다면 알 텐데? 내가 그런 거에 굴할 리 없다는 걸!]
아 진짜·
[또한 그대··· 진실에서 눈 돌리는 것도 그만하도록 하지 그래?]
나는 다시 손 하나를 이마 쪽에 올렸다· 엄지와 중지가 양쪽에 있는 관자놀이를 꾹꾹 문지르자 두통이 조금은 가려졌다·
[그대는 지금 나를 협박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달래고 타이르고 그렇게 회유해야 하는 사람이지!]
아니다· 조금도 가려지지 않았다·
내 손이 툭 떨어지듯 아래로 추락했다· 내 무의식이 반영된 바람이 저 멀리서부터 우리를 향해 불어오기 시작했다·
「···계약이 있는데 그분이 왜·」
[뭐야 애송이· 그렇게나 존경하고 공경하는 그레첸 지시는 어디다 팔아먹었어? 내 귀엔 아직 네 입이 열려도 된다는 허락이 안 지나갔는데?]
「····」
뒤에서 주먹을 움찔움찔 하는 소리가 들렸다· 분노가 하는 말에 제대로 긁힌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소리 내도 된다는 허락을 내주진 않겠지만 아무튼·
[무엇보다 꼬마야· 아직 깨닫지 못했나 본데· 이 상황에서 우리의 계약은 의미가 없어· 네가 그리도 숭상하는 그레첸이 계약의 ㄱ자도 입 밖에 내지 않는 걸 보면 모르겠어?]
내가 파우스트에게 박한 것같이 보여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지금 솟구치는 감정들을 억누르기도 급급한 상태였고··· 현재 진행형으로 쌓이는 온갖 화조차도 서둘러 정리해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표정을 보니 조금도 이해 못 한 것 같군· 좋아· 관대한 내가 어리석은 애송이를 위해 설명해 주지·]
하지만 하지만 어떻게 참을 수 있지?
[우리의 계약은 세부 사항을 무시한 채 큰 가지만 따지면 두 가지뿐이지· 첫 번째는 ‘내가 멋대로 몸을 빼앗으려 들지 않는 것’ 두 번째는 ‘이 몸의 안위가 흔들리는 일이 발생할 경우에 한해 내게 대처 가능한 재량권이 아주 약간 부여될 것’· 이렇게 말이야·]
이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참아야만 하지?
[그렇다면 꼬마야· 지금은 과연 어느 쪽에 부합하지?]
나는 이미 지옥에 다다랐을─다다랐을지도 모를─인퀴지터와 계명을 떠올리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미처 깎지 못한 손톱이 손바닥을 뚫었다·
「그건····」
[정답은 ‘후자’다· 이 몸의 안위는 지금 명백하게 흔들리고 있고 지옥으로 간다는 건 그 흔들림을 더욱 키우는 일이지· 그래 이 내가 약간의 재량권을 사용해 개입해도 이상하지 않은 사태란 거다!]
흘러내리는 핏방울 위로 비치는 내 눈동자가 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