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0화 하지만 복될 것이기에 (9)
처음 그 불길은 나를 맹렬하게 거부했다· 배격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것은 나를 역으로 삼키려 했고 그 가공할 힘과 열기는 상당히 버티기 힘들었다·
‘그래도 할 만하네·’
[미친놈····]
그렇지만 화란 것이 본래 그렇다· 그것은 눈이 없고 귀가 없어 피아를 가릴 줄 모르고 타오른다· 남의 것이어도 내 것이어도 공평하게 다스리기가 힘든 것이다·
하므로 중요한 건 평정이다· 화마가 코앞까지 다가와도 흔들리지 않을 고요 눈앞에서 춤추는 화염을 두고 물러서지 않을 용기 이 화재에 데지 않을 것을 확신하는 믿음·
그 모든 것을 기반 삼아야만 사람은 화火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불火을 불꽃으로 피워 낼 수 있다·
겹쳐진 태양의 고리가 나의 바람에 따라 내 손에 모여들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뜨겁다· 너무 격렬하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내가 바로 녹아 버릴 것처럼 참으로 덥다·
“그대는·”
동시에 강력하다· 무한하다· 이 끝없는 열기라면 무엇도 바꿀 수 있을 것만 같다· 결국 분노의 양면에는 투쟁심이라는 열정이 있었다·
“분노가 본질이었던 주제에 분노의 진정한 힘도 모르는군·”
약간만 삐끗해도 이 분노는 표적 없이 사방으로 분출되는 용암이 되겠지· 그렇지만 통제되는 분함은 결코 노여움으로 그치지 않고 사람이 어딘가로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법이라·
나는 그 원동력을 움켜쥔 채 검을 빚었다· 그저 전방으로 쏟아 내는 섬격이 아니라 그 너머를 위한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 망치를 두드렸다·
[···홍염·]
처음으로 내 불꽃이 검정색의 껍질을 벗었다· 사랑처럼 붉고 전쟁과 폭력처럼 무거우며 열정처럼 짙고 복수와 혁명처럼 타오르는 홍색이었다·
“아무튼 공짜 마력 감사하지· 안 그래도 부족했는데 정말 잘됐어·”
나는 라텔을 잠시 떨어트린 채 그 불꽃검에 온 집중을 기울였다· 쿵· 가볍게 휘둘러진 검이 허공에 붉은 궤적을 남겼다가 그대로 내가 디뎠던 지반에 박혔다·
쿵 쿵 쿵!
세밀한 조절을 위해 일부러 분산하여 내뿜은 불길이 사탄의 신체로 이뤄진 대지를 태웠다· 첫 번째 방출 때는 반경 5m를 두 번째 방출 때는 반경 10m를 세 번째 방출 때는 반경 20m를·
방출에 맞춰 대지 위로 올라오는 열기가 2차 발화하듯 대지를 터트리며 새빨간 불티를 비산시켰다· 마치 잉걸불을 부수어 사방으로 흩뿌리면 저러지 않을까 싶은 풍경이었다·
[···아직 아직이다·]
글쎄다· 내가 알기로 아직이다를 염불처럼 외우기 시작하는 놈들은 더 이상 꺼낼 게 없다는 말을 돌려 말하는 거던데·
나는 최종 보스에 대한 배려로 뒷말은 꾹 삼켰다· 대신 슬슬 감이 잡히는 화염검을 회수하며 라텔을 다른 한 손에 쥐었다· 두 검은 어느새 내 의지에 따라 조금 짧은 환도 모양으로 변한 채다·
[이 끔찍한 거짓나무의 잔재들이···!!]
나는 혜성처럼 쏟아지는 불꽃들을 보며 와다다다 달렸다· 원한다면 방금처럼 흡수할 수도 있겠으나 굳이 그러진 않았다· 저렇게 자잘한 공격은 흡수한 것보다 무시하는 것이 더 효율 좋았다·
“한때 너도 그 잔재 중 하나였으면서 뭘 욕하는 거지?”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것도 아니고 내로남불 레전드시네요·
나는 그리 말하며 사탄이 날리는 참격도 추가로 피했다· 혜성은 여전히 내 걸음에 꼬리처럼 달라붙는 상태였지만 가볍게 공중제비 몇 번 돌아 주면 참격도 그럭저럭 피해 낼 수 있었다·
서걱서걱!
그리고 사탄의 참격이 끝났을 때 나는 테니스공 받아치듯 똑같이 참격을 날려 주었다· 라텔에서는 평상시와 같은 예리하고 좁은 참격이 불꽃검에서는 이글거리고 광범위한 참격이 사출되었다·
두 참격의 차이가 얼마나 심한지 일반 쪽은 지나친 경로의 땅이 좀 갈라지고 끝났는데 후자는 불꽃이 붙어 주변을 지글지글 눌어붙게 만들었다·
‘캬· 역시 속성 공격이 짱이야·’
[지금 홍염을 다뤄 놓고 하는 말이····]
내 감탄을 두고 메피스토펠레스가 어이없다는 소리를 뱉었으나 아무래도 좋았다· 홍염이 얼마나 대단한 기술인지 뭔지는 딱히 내 알 바가 아니었으니까·
[닥쳐라! 나는 그 패배자들과 다르다!]
그보다 이 불꽃 어째 사탄의 재생 능력을 낮추는 효과도 있는 것 같다· 나는 여전히 타다타닥 소리를 내며 타오르고 있는 부위를 보며 또다시 땅에 칼을 박았다·
방출에 대한 요령은 아까 깨우쳤으니 이번에 행하는 방식은 원형이 아니라 일직선이다·
대지로부터 한 겹 아래 뱀처럼 나아간 불길이 사탄의 본체가 있던 자리를 날려 버렸다· 사탄이 황급히 본체를 이동시키긴 했지만 회피에 애먹었다는 건 확실했다·
쾅 쾅 쾅!
이러면 정말 끝을 보는 게 어렵지 않겠는데· 나는 사탄이 거대한 촉수를 뽑아내 내려치는 걸 피해 검을 휘둘렀다· 바닥을 한번 내려치고 다시 대지 내로 흡수되려던 촉수가 순간적으로 잘려 불꽃에 휘감겼다·
“고리 태양이나 다시 만들어 주지 그러나· 마력 좀 더 모아서 한 방에 날려 버리게·”
[···!!]
이건 뻥이다· 지금도 이 압도적인 에너지를 불꽃검의 형체로 빚어 붙드느라 힘든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마력이 더 추가된다? 그땐 나라도 통제 못 한다· 애당초 지금 섬격 같은 걸 못 날리고 있는 것도 그 정도로 공격 규모가 커지면 위력 조절이 안 될 것 같아서가 아니었나· 여기서 힘을 더 흡수하는 건 진짜 과유불급 그 자체였다·
[헌신의 대가를 바라는 게 무엇이 나쁘지?! 내가 내 희생의 대가를 받아 내는 게 뭐가 문제냔 말이냐!!]
“그 말이야말로 궤변이군· 대가를 바라는 헌신이 어째서 헌신이지?”
대가를 바랐으면 처음부터 직장에 입사하든가 거래나 협상을 먼저 깔고 갔어야지·
나무랑 열매가 어디 자본주의 기업이야? 세계 살리기 위해 대가 없이 사후 갈아 버릴 사람 모집하는 곳이지?
이건 뭐 봉사 활동 해 놓고 ‘나 할 거 다 했으니까 급여 주셈’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나무랑 열매 시스템을 어떻게 보는지와 별개로 내가 그쪽 입장이었어도 이건 어이없는 일이네요·
“말 섞기도 싫군· 이만 가라·”
나는 그런 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사탄과 다시 손을 섞었다· 불꽃검이라는 든든한 마력원이 생겨서 그런가 이번엔 내가 좀 더 사탄을 몰아붙이는 게 가능했다·
더불어 불꽃검은 내포된 에너지가 줄면 줄수록 다루기가 더 쉬워져서 갈수록 유리해지는 건 나였다·
내 검이 사탄의 배를 가르고 대지를 불태웠다· 그때마다 사탄이 뿌리처럼 뻗은 거대 촉수들로 땅을 파먹었지만 그것이 이 상황을 뒤바꿔 주진 않았다·
사탄은 아까 주도권을 빼앗긴 것 때문인지 커다란 공격을 쉽사리 하려 들지 않았고 그 덕에 나는 아주 편안─상대적으로 편안하다는 거지 정말 편한 건 아니다─하게 대적하면 됐던 탓이다·
[나는 나는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
사탄의 뿌리 촉수가 대지 아래서 꿈틀거리는가 하더니 그대로 일반 대지를 들어 올렸다· 그러곤 갈라지고 조각난 대지들을 하나하나 감싸 내게로 던졌다·
마기로 이뤄진 공격을 던지면 내가 흡수하고 신체 일부로 공격하면 내가 태워 버리니 택한 차선책 같았다·
─!
하지만 나는 그 차선책마저 송두리째 도려내는 것으로 그의 미래를 비춰 주었다· 붉은 하늘보다도 더욱 빛나고 선명한 홍염이 불티만을 남긴 채 날아오던 모든 것을 지웠다·
섬격· 슬슬 화염검의 에너지 총량이 안정권에 들어와 가능해진 기술이었다·
“아니 넌 이곳에서 멈춘다·”
나는 내가 만들어 낸 거대한 협곡을 보며 그리고 뒤편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성역의 존재감을 인지하며 마지막으로 그 모든 것에 가려진 한 사람을 떠올리며 단언했다·
“내가 있고 인퀴지터가 있으며 그녀가 있으니까·”
신이 없는 세계여서 그런지 아닌지는 몰라도 저쪽과 달리 이쪽의 성역화는 속도가 꽤나 빠르다· 이대로 하루가 지난다면 대략 300평가량이 성역으로 변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심지어 인퀴지터는 성역을 한 덩이로 이루지 않았다· 즉 한 점을 중심으로 점점 키워 나가는 게 아니라 조그만 원들을 약간의 거리만 두고 콕콕 찍어 갔단 이야기다·
이 세계를 성역화하는 이유가 테라포밍을 위한 것이 아닌 사탄의 섭식─과 그를 통한 회복─을 망치기 위한 것임을 떠올리면 그건 참으로 탁월한 꼼수였다· 더 이상 먹을 게 없어진 사탄이 성역화되지 않은 곳만 골라 먹으려 해도 어거지로 성역화 된 곳까지 먹게 될 꼬락서니였으니까·
“너의 악행은 여기서 끝이다·”
하므로 얼마의 시간이 걸리든 이기는 건 우리가 될 것이다·
내 후련한 미소가 사탄에게 겨누어졌다·
[이···!]
“한 가지를 잊었구나·”
아울러 내가 힌트를 줬음에도 사탄이 받아 처먹지 못한 공격이 그의 가슴을 뚫었다·
“또한 그대· 계획을 눈치챘으면서도 나를 들먹였는가· 고약한 심보로다·”
“미안하군· 하지만 우리 중 가장 날카로운 검을 잊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갔을 뿐이다·”
세검이 사탄의 복부를 동그랗게 뚫고 빠르게 이어진 손이 그 내부를 파고들어 무언가를 뽑아냈다· 어둠으로 이뤄진 액체가 뚝뚝 흐르며 드러나는 것은 내 홍염만큼이나 붉고 기이하게 밤처럼 눅눅한 탁함이 느껴지며 한가운데에는 꿰뚫린 자국이 있기까지 한 보석이다·
[편린 주제에!]
사탄이 다급하게 손을 휘두르고 온 마기를 동원해 계명이 있던 자리를 타격했다· 그러나 계명이 어디 그런 미래를 예비하지 않고 무작정 덤벼들 사람이던가·
기척 없이 사탄의 뒤를 점했던 순간처럼 그녀의 몸이 안개처럼 사르륵 사라져 내 근처로 다가왔다· 루비처럼 보이는 보석은 여전히 그녀의 손에 들려 있다·
[그레첸! 저걸 당장 받─!]
[감히 감히!]
와작·
계명이 붉은 원석을 그대로 깨물었다· 심장처럼 맥동하던 보석이 섬칫 굳은 건 그다음 일이었다· 메피스토펠레스가 말을 와다다다 잇기도 전에 계명이 루비를 죄다 입에 털어 넣었다· 평상시의 우아함조차 내버린 우악스럽고 다급한 움직임이었다·
어둠이 핏방울처럼 그녀의 입가 사이로 떨어져 내렸다·
“그대 분명 악마와 계약할 때 이런 조건을 내걸었을 테지·”
“···?”
“조력을 대가로 전투가 끝난 후에는 풀어 주겠다· 더불어 사탄의 심장은 양보하겠다··· 맞나?”
“눈치챌 건 알았지만 후자는 무엇을 근거로 추측한 거지?”
심상에서 ‘아아아악!! 저 개잡놈이!!’ 하며 히스테릭한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나는 계명과의 대화에 먼저 집중했다· 어쩐지 이 대화가 나에게 굉장히 기분 좋은 무언가를 줄 거란 직감이 있던 까닭이다·
“분노가 저 세계로 돌아가서 살 수는 없는 노릇 하면 버려질 이 세계만이 그의 유일한 터전이 될지언데··· 사탄만큼의 마기도 없이 어찌 이 세계에서 버티겠는가?”
“아하··· 가늠은 하고 있었지만 역시 그런 거였나· 그래서 이 이야길 미소 지으며 하는 이유는?”
“특정 물질을 걸고 하는 계약의 특징은 구해야 할 대상이 오롯이 타의에 의해서 소멸했을 때 무효화될 수 있다는 허점이 있지·”
그리고 그 직감은 조금도 틀리질 않아서· 나는 심상 속에서 분노가 지랄 발광을 하든 심장을 빼앗긴 사탄이 괴악한 소리를 지르며 우리에게 추가 공격을 시작하든 아무래도 다 좋아졌다·
“이런 선물을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군·”
나는 마기를 소화하느라 움직임이 둔해진 계명을 챙긴 채 사탄의 공격을 피했다· 마기의 원천··· 까지는 아니지만 나름 핵이라 할 수 있는 심장을 잃어서인가· 사탄의 공격은 아까보다 절박해진 감이 있다·
“글쎄· 그대가 지금껏 내게 보인 호의의 대가라 해 두겠다·”
[당장 당장 저새끼 심장 꺼내! 그레첸!!!]
“별개로 분노 씨가 그대의 심장을 애타게 요구하는데 어찌 답변하면 좋을 것 같나?”
“무시하도록· 애당초 그녀가 건 것은 ‘사탄의 심장’이지 ‘나의 심장’이 아닐 텐데?”
[시발 새끼가아아!!!!!!]
“명답이군·”
그렇지만 심장마저 빼앗긴 네놈이 뭘 할 수 있는데· 안 그래도 나한테 밀리던 네놈이 뭘 할 수 있냐고·
나는 정말로 보이기 시작한 마지막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이젠 이젠 정말로 집에─
[···좋다· 인간· 진정한 끝을 보자·]
문득 대지 한편이 우르르르 무너졌다·
드러난 지하 공동에 존재하는 건 반투명한 호박색 원석과 그 안에 갇힌 여성이다·
[···내 몸·]
[어디 분노여· 그대는 과연 누구의 편을 들 텐가?]
점점 신체가 깨지기 시작한 사탄이 호박 원석을 부수고 여성의 신체를 한입에 삼켜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