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2화 하지만 복될 것이기에 (11)
‘마기는 어떻게 조달하지?’
[마침 가지고 있는 게 있잖아· 그걸 바쳐야지·]
‘···계명이 오래된 마법과 거래하지 말랬는데·’
[하 걱정 마· 이번 건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감당할 테니까·]
그렇지만 계명은 간접적으로나마 연관되는 것도 위험하다 여기는 눈치였는데··· 나는 그런 고민을 잠시하다가 이마저도 지금은 사치에 속함을 금세 깨달았다·
내 몸이 사탄의 발길질 한 번에 파도치는 대지를 피해 뛰었다·
‘좋아 그럼 제대로 계약을 짜 보자고·’
[···징그러울 정도로 철저하기는! 지금 같은 상황에 꼭 이래야겠어?]
‘내가 여기 오기 직전에 당했던 일이 좀 생생해야지·’
그게 아니었다면 나도 이렇게까지 강박적으로 따지진 않았을 거다· 그러니까 시간 20초 들일 거 17초 정도 들였겠지 아마· 서로에 대한 신뢰가 신뢰인 만큼 스킵한다는 선택지는 절대 없었을 테고·
[생각이 많아 보이는구나!]
까앙!
[그 생각 결코 끝마치지 못할 것이다!]
그보다 정말 귀찮네·
나는 비산하는 대지의 쪼가리들을 보며 내게 돌진해 온 사탄의 검을 막았다· 나와 그 둘 다 불 속성이라서 그런가 사방으로 불길이 같이 번졌다·
사탄의 경우에는 통제를 벗어난 힘이 흘러넘치는 것이고 나의 경우에는 그런 사탄의 힘이 계명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막느라 같이 흘려 낸 느낌이었다·
파아아아아앙!
억지로 내게 장악된 불길이 원형으로 둥그러니 모였다가 나도 계명도 사탄도 없는 방향으로 튕겨 나가듯 분사되었다·
대지가 좁은 부채꼴 모양으로 녹아 둥글게 파였다·
“계명·”
각설하고 계약 부분에 대해선 나보다 계명이 더 잘 알 것이다· 그녀의 명석함을 고려하면 이쪽이 더 짜임새나 속도도 좋겠지·
“기어이 분노를 꺼낼 심산인가?”
“부족한 마기는 제물로 충당할 것이다·”
“···시간을 헤아리거든 일반적인 방식은 아닐 터인데· 정말로 말을 듣지 않는 자로다·”
“그쪽에서 일방적으로 다 감당한다는 조건이다·”
그래서 분노가 어떤 방식으로라도 이쪽을 배신할 수 없게 하려면 어떤 식으로 계약서를 짜야 하는가? 내가 그런 논제를 내놓으니 계명도 깊은 생각에 잠겼다·
상대가 기만으로 워낙 악명 높다 보니 그녀도 어느 정도의 노력은 기울여야 하는 듯했다·
[어딜!]
당연하지만 사탄은 이 대화를 순순히 잇게 해 주지 않았다· 우리에게 시간을 주면 그리하여 이 대담의 결론이 나오면 불리해지는 건 오직 사탄뿐이었으므로·
“방어전밖에 안 되는 건 꽤 불편하군·”
나는 사탄이 주먹에 불을 휘두른 채로 덤비는 걸 보며 똑같이 칼을 버리고 손을 들었다· 칼을 잡지 않은 이유는 혹시라도 이 행동이 위협 행위로 판단되어 제지될까 싶어서다·
마력을 두른 내 손이 아주 약간의 거리만을 둔 채 사탄의 주먹과 맞닿았다·
콰앙!
찰나간 사탄이 몸에 두르고 있던 모든 불꽃이 나의 손바닥과 그의 주먹 사이로 모여들었다· 우리의 신체가 서로에게 닿기 전 그렇지만 내가 그의 장악권을 빼앗아 올 수 있는 딱 그 정도 간극 안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우웅─!
연이어 한 점으로 응축되었던 힘이 누름개에 눌린 호떡 반죽처럼 펼쳐졌다· 나와 사탄 사이를 가로막는··· 그보단 사탄을 좀 더 보호하는 형식이었다·
와드드득!
그 모든 절차의 끝에서 내 손바닥과 사탄의 주먹이 부딪쳤다· 사탄 쪽에게 반동이 가지 않도록 하다 보니 내 팔이 좀 뒤틀렸지만 그다지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요령이 없어서 이 꼬라지가 난 거지 생긴다면 괜찮을 거란 확신이 들었으니까·
[팔 하나가 날아갔는데 뭐? 큰 문제가 아니야?]
‘시끄러워· 이게 다 누구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아무튼 아까 본의 아니게 시험해 본바 힘의 주도권을 빼앗은 후 방향성을 바꾸어 배출하는 건 가능했다· 해서 이번에도 그것과 엇비슷한 시도를 해 보았는데··· 다행히 이건 먹혔다·
금제 포인트는 ‘저 육신을 해치지 않는다’지 무력화한다가 아니라는 게 확실시되는 시점이었다·
‘그리고 팔 하나쯤은 재생시키면 되잖아· 뭐가 문제야?’
[내 고통은 생각도 안 해 주는 거야?]
‘네 몸 죽일 수 있게 허락해 주면 그땐 헤아려 줄 수 있는데·’
[···살살 해 제발·]
문제는 이 ‘무력화’도 어느 선까지 허락되냐는 것인데·
[하 이 몸에는 아예 상처조차 못 입히는 것인가!]
사탄이 광소를 터트렸다· 내가 앞선 공방으로 금제의 잣대를 시험해 보았듯 그도 해당 공수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가늠해 낸 듯했다·
무기를 완전히 버리고 육탄 공격을 감행하는 사탄의 일격이 꽤나 매서웠다·
타당타다다다당·
이건 뭐 개틀링 건도 아니고· 나는 우다다다 쏟아지는 주먹을 피하기 위해 몸을 비틀거나 흘리거나 맞서며 강제로 반사의 요령을 쌓았다·
처음 몇 번은 아까처럼 팔이 뒤틀려 터지거나 가죽이 찢어졌지만 나중에 가서는 손목을 살짝 삐거나 약간 얼얼한 정도로 그치기 시작했다·
크러셔와 종종 했던 아침 대련이 정말 도움된 순간이었다·
“구술하겠다·”
그리고 내가 시간을 최대한 벌어 낸 그때 뒤편에 물러나서 눈먼 공격만을 쳐 내던 이가 입을 열었다·
“1조 1항· 본 계약은 그레트헨 이하 갑의 전투에 메피스토펠레스 이하 을이 조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기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내가 저 말을 제대로 들을 수나 있을지 걱정은 되었다· 하나 얼마 가지 않아 내 모든 염려를 덜어 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듣고 있어요· 그레첸은 신경 쓰지 마세요·」
괘씸한 꼬맹이 이번에는 속일 여지가 없으니 일단은 봐주기로 했다·
“1조 2항· 이때 갑의 전투는 사탄의 사살을 목적으로 하는 것만 뜻하며 갑은 사탄 사살을 목적하지 않는 전투에 을을 동원할 수 없다·”
[···감히 네까짓 것들이 나의 소멸을 논하는가!]
“2조 1항· 갑은 을을 전투에 동원하는 대가로 을을 개체:파우스트의 육신에 가두는 제약에서 해방시켜 준다·”
[감히!]
“2조 2항· 제1항 수행을 위해 을은 해방의 부작용:붕괴를 담당 해결하기 위한 대처를 수행한다·”
담담히 이어지는 말들은 내가 예전에 날림으로 처리한 계약과는 전혀 딴판인 것이라· 나는 계명에게 맡기길 잘했다 여기며 사탄이 계명에게 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러자 사탄이 다시 대지를 흔들고 거대한 유성우를 불러내어 하늘을 뒤덮었다· 메피스토펠레스의 육신이었던 것에서 넘실넘실 흘러나오는 열기는 안 그래도 붉은 대지를 노랗고 하얗게 녹여 낸다·
“···항· 을은 갑으로부터 그리고 갑이 지정한 이들로부터 살해 의도를 담은 공격을 받지 않는 한 절대로 갑과 갑이 지정한 이들에게 위해를 끼칠 수 없다· 이때 을이 행해선 안 되는 위해의 종류는 직접적인 것 외 수단을 통한 간접적 공격도 전부 포함하며 수단에는 다른 사람과 사물 등을 동반한 행위도 포괄된다·”
그러나 사고를 분담하는 것으로 집중을 분산할 필요 없는 내게 저 공격들은 막지 못할 무언가가 아니다· 나로부터 꽃처럼 피어난 불씨들이 성벽을 이루었다·
불꽃이 하늘에 닿을 것처럼 기세를 부풀리는 모습은 마치 화산이 폭발하는 날의 순간과 썩 비슷하다·
“12조 1항· 갑이 전투 종료를 알린 후 을은 갑이 원하는 시기에 갑을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만일 갑이 다른 수단으로 돌아가게 될 경우 을은 그 과정에 있어 어떠한 방해나 해를 입히는 행위를 끼쳐선 안 된다·”
맞불의 원리가 그러하듯 내가 먼저 녹이고 불태운 대지가 사탄의 모든 불길을 멈춰 세웠다· 하다못해 쏟아지는 유성우마저도 전부·
“13조 1항· 을이 사유 없이 거래 속 모든 업무를 지연시키거나 의도적으로 망치려 들 경우 또한 계약의 허점을 이용하여 갑에게 피해를 끼치려 들 경우 을은 갑에 대한 보상으로 을의 영원한 소멸을 지불한다·”
[···말도 안 되는·]
“이렇게 열세 개의 조항이면 될 것 같군· 만족하나?”
그리고 그 모든 불은 다시 내 통제하에 들어와 한데로 뭉쳤다· 처음부터 한 점으로 모으는 건 나로서도 꽤 힘겨운 일이었기에 우선적으로 취하는 형태는 불기둥에 좀 더 가깝다·
사방에서 모여든 에너지가 나를 둘러싸고 나선으로 타오르다 점차 그 높이를 낮추기 시작했다·
[어째서·]
“나로선 매우· 분노는 어떨지 모르겠군· 동의하나?”
또한 그 불꽃이 어느 정도 통제권에 들어왔을 때 나는 그것을 그대로 던졌다· 뭉치는 거야 어떻게든 성공했지만 세세한 조절만큼은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아 택한 행위였다·
[어째서 그런 힘을 가지고도····]
[하 동의하냐고?]
우릉·
그렇다고 딱히 아쉽거나 하진 않았다· 저 거대한 힘이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인다 해도 어차피 지금 상황에선 사탄을 때리지도 못하는 까닭이다·
쿠우우우우·
나는 사탄을 지나쳐 지평선 너머로 날아간 불꽃의 구를 응시했다· 던진 나도 어디까지 날아갔는지 모르는 와중에 내 통제로부터 풀려난 구가 폭발을 일으켰다·
내 앞에서 태양이 새로 만들어지는 듯한 착각과 함께 구 형태로 부풀어 오른 화마가 지평선을 집어삼켰다· 지옥에 처음으로 여명이 찾아오는 순간이었다·
[왜 왜···!]
[그래! 동의한다! 그러니까 당장 이 빌어먹을 족쇄를 풀어!]
또한 나는 계약서 작성과 동시에 이행을 위해 라텔과 연결된 다른 공간을 열었다· 라텔의 본체는 아직 계명에게 들려 있었지만 라텔은 분열이 가능하고 분열체로도 구멍은 얼마든지 열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왜 그런 힘을 가지고도 번견으로서만 살아간단 말인가!!]
[저놈만큼은 반드시 찢어 죽인다!!]
그리고 시야가 뒤집혔다·
지금부턴 메피스토펠레스의 차례였다·
* * *
메피스토펠레스는 지옥의 공기를 삼키며 찰나간 ‘오랜만이네’라는 감상에 잠겼다· 그다지 긍정적인 표현은 아니었다·
[직접 얼굴 보기가 얼마 만이지 씹새야?]
어차피 곧 벗어 던질 몸이다· 그는 육신을 제게 맞게 개편하는 대신 라텔 속에 보관했던 물건들을 꺼내 들었다· 더러운 돼지 새끼 반 토막 교만한 자의 이름과 미처 도망치지 못한 영혼·
[자 인사해· 마지막이 될 테니까·]
[메피스토펠레스···!]
이것들을 바치는 건 일도 아니다· 동료애는커녕 호시탐탐 서로만을 죽이고 싶어 하던 관계였으니까·
[내게 비롯된 존재 주제에···!]
[뭐라는 거야 간나 새끼가·]
갑자기 몸에 주입될 마기에 온갖 부작용이 따를 해당 육신도 별로 알 바 아니다· 계약상 그가 해결해야 하는 몫도 아니고 그레트헨과 계명도 이 부분을 알면서 일부러 말 꺼내지 않은 것일 테니·
[됐고 오래된 마법이여·]
그러니 그녀는 각오만 하면 된다· 마지막으로 가능하면 마지막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 옛것과 마주칠 준비를·
[내버려 두지 않겠다!!!]
[지극한 법칙이여·]
방금 전 쏟아부은 것으로 마기가 꽤 소모되었을 것임에도 사탄이 발악하듯 공격을 재차 시도했다·
그렇지만 육탄전이야말로 메피스토펠레스의 장기이며 그의 육신을 해하면 안 된다는 금제도 장본인이 나선 지금은 의미가 없다· ‘메피스토펠레스를 돌려보내 주겠다’라고 약속한 주체는 ‘그레트헨’이지 메피스토펠레스가 아니니까·
[우주의 천칭이여·]
하므로 메피스토펠레스는 자신의 육신을 차지한 자를 마음껏 공격했다· 제 육신의 팔다리가 잘리는 건 아무래도 좋았다· 심장과 뇌만 멀쩡히 붙어 있으면 돌아갔을 때 얼마든지 재생이 가능했으니까·
[마땅한 대가를·]
그렇기에 그는 가혹할 정도로 자신의 몸을 몰아붙였고 그 끝에서 모든 주문을 외웠다·
제물이 한순간에 압축되듯 찌그러지며 외공간 저편으로 넘어갔다·
[빌어먹을 천한 것이─!]
[하하 본심이 드디어 튀어나왔나?! 어?!]
팅· 보이지 않는 천칭이 기울어졌다·
[내가 언제 말했지!! 네놈은 반드시 내가 죽인다고!!!]
또한 사슬이 부서졌다· 그를 소년의 육신에 가두었던 그가 방심하여 스스로 걸었던 족쇄가 박살 났다·
[잠깐 안 돼 안 된다!]
심상 세계의 밑에 갇혀 있던 불꽃의 거인이 마음을 벗어나 붉은 눈동자를 뚫고 사탄이자 ‘메피스토펠레스’인 것의 안와를 파고들었다·
[이 육신은 이제 내 것이다! 네놈에게 돌려주지는─!]
[닥쳐 이건 내 거야!]
그는 또한 두개골 안쪽 심상과 이어지는 길에서 사탄의 영혼과 맞닥뜨렸다·
육신의 지배력을 행사 중인 사탄은 그를 안으로 들여보내 주지 않으려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이 육신은 그의 것이고 그는 이 몸의 정당한 주인이었다·
새까맣게 불타 버린 나무를 배경으로 하되 바닥이 없는 세계에서 사탄과 메피스토펠레스의 영혼이 한없이 아래로 추락했다·
[감히 감히!!!]
[네까짓 것은 먹지도 않아· 갈가리 찢어서 개밥으로 만들어 주지!]
메피스토펠레스는 그레트헨이 그에게 그러했듯 사탄의 목줄기를 움켜쥔 채 주먹을 들었다·
사탄도 그녀에게 반항을 해 보였지만 상관없었다· 육신의 주도권 싸움이라면 그는 이미 파우스트란 애송이한테 질릴 대로 질릴 만큼 당해 보았다·
사탄에게마저 당해 줄 의향은 없었다·
[메피스토펠레스!!]
[호오· 나는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사탄에게는 당해 주지 않을 거였다·
추락하는 그들을 받아 준 어릿광대가 비릿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