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0화 우리가 후회할 줄 아는 한, 영원히 (2)
“정말 정말로····”
이제 그레트헨은 없어· 마지막 그 모습이 환상인지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족들도 더는 볼 수 없어·
그 사실을 깨달은 파우스트는 태양을 두고 눈물을 훌쩍였다· 주변인들이 당황할 것은 알았으나 이성이 이기기엔 너무도 강렬한 슬픔이었다· 지금껏 억눌러 왔던 모든 감정이 둑과 함께 소년의 눈물샘을 터트렸다·
“···이런 많이 놀란 듯하군·”
그러자 아크메이지가 대마법사님께서 푸근히 웃었다· 마역 특유의 황폐한 배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다정한 미소였다·
“자아· 괜찮네 괜찮아·”
심지어 그분은 소년을 조심스럽게 안아 등을 두드려 주었다· 감히 기대선 안 되는 품이었으나 너무 따뜻하고 안온해서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파우스트는 그녀의 앞섶을 눈물로 가득 적셨다· 눈과 코 위치에 맞춰 짙은 얼룩이 로브 자락 위에 새겨졌다·
“죄 죄송 해요·”
“사과하지 말게·”
“그치 딸꾹 만·”
“아이고 이러다 숨 넘어가겠군· 자네는 사과하기 이전에 진정부터 해야겠어· 사과 자체를 받고 싶은 건 절대 아니지만·”
그것이 불쾌할 법한데도 대마법사는 소년을 한번 밀어내는 법이 없었다· 싸움에 지치고 힘들었을 텐데 어서 도시로 돌아가 쉬고 싶을 텐데· 엉엉 울며 귀환을 늦추기만 하는 소년을 들들 볶는 사람도 없었다·
그것이 파우스트는 더욱 슬펐다· 차라리 그를 탓하고 힐난하면 마음이라도 편했을 텐데 다들 과분할 정도로 선하기만 해서·
“자아 진정했나?”
그래도 한참을 쏟아 내니 어느 정도 말이 나왔다· 파우스트는 거대한 샤기족의 품 안에서 고개를 꿈틀거렸다·
“그럼 소개하겠네· 내 이름은 브리사일세· 할머니라고 불러도 되고 브리사라고 불러도 되네·”
“···아크메이지님·”
“음 그쪽도 나쁘진 않지·”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주는 손길이 언젠가 어머니께서 해 주신 것과 꼭 닮아 있다· 파우스트의 눈물이 조금 더 짙어지려다가 이번에야말로 이성 줄에 겨우겨우 잡혔다·
“아무튼 간에··· 자네 이름이 뭔지 물어도 되겠나?”
그보다 이름인가·
사실 아크메이지가 자신을 소개하지 않아도 그녀가 누군지는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봐 온 것도 있었고 아까 자기소개 시간 때도 심상 속에서 전부 듣고는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인사를 하자니 살아 있다는 감각이 너무도 선명하게 다가온다· 파우스트의 몸이 흠칫 떨렸다·
“···파 우스트·”
하지만 그레트헨이 살라고 했으니까· 아버지와 형 누나가 행복하라고 했으니까·
“파우스트라고 부르시면 돼요·”
여전히 행복해질 방법 따윈 모르겠다· 그가 행복해져도 되는지 역시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들이 부탁을 거절하기엔 그의 마지막 염치가 살아 있어서·
“그게 제 이름이에요·”
소년은 노력해 보기로 했다· 소년을 둘러싸고 있던 어른들이 각자만의 미소로 소년의 첫 시작을 반겨 주었다·
* * *
“···뭐라고 해야 할까· 직접 마주치면 한 마디만큼은 해 주고 싶었던 것 같은데 정작 이 순간이 되니 아무 생각도 안 듭니다요·”
데스브링거는 도시에 돌아와서도 소심하게 구는 소년을 보며 괜스레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딱히 간지러운 건 아니었지만 손이 근질거려서 참을 수 없었다·
“그렇습니까?”
“예·”
참고로 신수들 덕에 진정한 소년을 데리고 도시까지 돌아오는 건 얼마 걸리지 않았다· 보라뱀과 다니엘 막시모야크를 픽업하느라 중간에 멈춰 섰었음에도 마찬가지였다·
“굳이 드는 생각이 있다면··· 아 저게 나리가 구하려 노력했던 생명이구나· 저 아이를 살리기 위해 나리가 그 모든 고생을 감수했던 거구나· 그 정도?”
“···예상보다 훨씬 작지요?”
“예· 진짜요·”
되레 오래 걸린다 싶은 것은 전투가 남기고 간 여파의 정리인데··· 이건 항상 오래 걸렸던 것이니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다· 나름 공헌자랍시고 그에게 일도 안 시키는 상황이라 더 그랬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작을 수 있나··· 싶고 그러네요·”
해서 데스브링거는 주어진 시간 동안 열심히 소년을 관찰했다· 딱히 소년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데스브링거의 무의식이 또 한 번 소년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이쯤 되니 아예 다른 사람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요· 아니 애초에 다른 사람인 건 맞긴 한데·”
“꼭 모험가님의 동생을 보는 것 같지요· 이목구비가 원체 닮아서·”
“딱 그겁니다요· 그 말이 하고 싶었어요·”
자식이라기엔 너무 크고 동생이라고 하기엔 너무 어리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굳이 따지자면 동생 쪽이 어울릴 것 같다· 정작 나리는 그 소리를 들으면 질색하거나 미묘한 기색을 하겠지만·
“···이제 정말 나리는 없는 거네요·”
하나 그가 정말 그런 얼굴을 할는지 혹은 그 외의 반응을 보여 줄는지 확인시켜 줄 사람은 더 이상 없다· 다정한 눈으로 그를 보고 별처럼 그를 비춰 줄 사람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그분의 마지막은··· 편안해 보였습니까?”
모험가는 떠나갔다·
데스브링거는 그제야 자신이 소년에게서 찾아 헤매던 무언가를 자각했다·
“예·”
각오했다고 생각했는지만 역시 그는 보내 줄 준비가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생판 남에 가까운 소년에게서 모험가 편린이나마 찾으려 할 정도로·
“우리가 그분을 추억하듯 그분도 우릴 추억하실 겁니다요·”
그렇지만 그건 옳지 않은 일이다· 타인에게서 다른 누군가를 비춰 보는 건 상대에게도 그 사람에게도 상처만 남을 일이니까·
“그렇군요·”
데스브링거는 자신의 말에 기쁜 듯 슬프게 웃는 다니엘을 뒤로한 채 인퀴지터와 대화하는 소년에게로 다가갔다· 이름이 파우스트랬던가· 회색 머리카락의 소년은 여전히 현실감 없는 눈으로 사위를 살피고 있었다·
“뭘 그렇게 봅니까요?”
“···!”
“워 워·”
데스브링거는 소년이 반사적으로 공격 자세를 취하는 걸 보며 빠르게 두 걸음 물러났다· 아무 생각 없이 뒤에서 접근했다 서로에게 상처만 줄 뻔했다· 미처 고려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반사 신경 좋네요·”
“그 죄 죄송····”
“칭찬이니까 눈치 보며 떨 필요 없습니다요· 굳이 잘잘못을 따지거든 더 잘못한 쪽도 이쪽이고·”
솔직히 말하자면 이 부분은 정말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모험가와 완전 별도의 존재인 만큼 감각이 이렇게 열려 있을 거란 것도 그 감각만치 접근에 예민할 거라는 사실도 말이다·
“망종 말이 맞습니다· 이건 섣부르게 접근한 망종 잘못입니다·”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건지 그만하라고 해야 하는 건지·”
그의 편을 들어 준 거라면 들어 준 거긴 한데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쁘지? 데스브링거는 인퀴지터의 힘찬 발언에 오묘한 눈빛을 띠며 소년에게 주머니를 툭 건넸다·
“이건····”
“사탕이라는 건데 혹시 압니까요?”
“아 알아요·”
부끄러움이 많은 건지 아니면 삶이란 것이 너무 생경해서 낯섦을 타는 건지· 조그맣게 긍정한 소년이 주머니를 빤히 보며 손가락을 옴찔거렸다·
“그런데 그걸 왜···?”
“받으십쇼·”
“어···?”
“단 거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잖습니까요·”
모험가가 사 준 사탕이지만 그것마저도 몇 개 남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는 어른이니까 이것이 더 필요한 아이에게 양보해 주는 것이 맞을 것이다· 데스브링거는 그렇게 결론 내리며 소년의 손바닥에 강제로 주머니를 올렸다·
“가끔은 말입니다요··· 흘러가는 시간에 마냥 몸 맡기는 것도 꽤 괜찮습니다요· 살아도 되는지 의심이 들 때 특히 그래요·”
“···!”
“바라지도 않았는데 대뜸 사탕이 가슴팍 위에 올려져 있을 수도 있고 예상치도 못한 일이 벌어지면서 살고 싶은 의지를 갑자기 가져다줄 수도 있거든요·”
“···꼭 그레트헨처럼 말하시네요·”
“그레트헨···? 아 나리?”
나리처럼 말했다라··· 데스브링거는 파우스트의 말에 기분이 조금 이상해졌다· 공연히 입술이 씰룩거리고 가슴이 울렁거리는 절대 부정적이지 않은 느낌이었다·
“제가 봐 온 가장 멋진 사람이라서 그런가 봅니다요·”
“···맞아요· 그레트헨은 정말 멋있는 분이에요·”
“그쵸?”
나리를 가장 가까이서 봐 왔을 소년이 이렇게 말해 주다니 뭔가 발언의 신빙성이 더 크게 느껴진다· 다른 말로 기분이 좀 더 좋다· 데스브링거의 입꼬리가 묘하게 올라갔다·
“그 그·”
“···?”
“저 저는····”
반면 인퀴지터는 똥 마려운 개처럼 끙끙거리며 소년의 눈치를 계속해서 살폈다· 그녀가 어떤 말을 바라는지는 멀리 갈 것도 없었다·
“저는 안 닮았····”
“푸핫· 샌님· 지금 질투하는 겁니까요?”
“다 닥쳐라! 나는 단지···!”
데스브링거는 인퀴지터가 빨개진 얼굴로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건 말건 깔깔대며 놀렸다· 방금 발언이 놀림받을 만한 발언임은 본인도 자각하고 있는지 인퀴지터의 얼굴이 점점 더 붉어졌다· 이러다 본인 머리 색을 완전히 따라갈 기색이었다·
“용사님도····”
그때 우물쭈물 말을 아끼던 소년이 사탕 주머니를 든 채 어색하게 웃었다·
“용사님도 정말 닮으셨어요·”
“···!”
“세상을 구원하고 사람을 살리시는 모습이 특히··· 더 닮았어요·”
그 모습에 인퀴지터의 얼굴이 다른 의미로 새빨개졌다·
“···굉장히 과분하고 영광된 평가군요· 그리 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동시에 그녀는 말갛게 웃었다· 자기가 말해 놓고 자신의 말에 움츠러들었던 소년의 고개 살짝 펴졌다·
“···저 제가 밉지는 않으세요?”
“그게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 제가 아니었다면····”
소년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중도에 흐렸다· 뭐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대략적으로 유추가 되었기에 데스브링거는 제 뒷머리만 괜히 벅벅 긁었다·
“미리 말하지만 말입니다요 우리는 적어도 나는 너한테 화 안 낼 겁니다요·”
“···어째서·”
“애초에 댁이 나한테 뭘 잘못하길 했습니까 욕먹을 짓을 하길 했습니까?”
“하지만 전····”
“댁이 사과할 대상은 나리고 나리는 당신을 구하는 것으로 우리에게 답을 보여 줬습니다요· 그러니까 나는 당신을 탓하거나 책망하거나 비방하지 않을 겁니다요·”
“····”
“대신 댁이 잘 사는지 혹시라도 오늘처럼 땅 파고 있는 건 아닌지 감시할 겁니다요· 나리가 기껏 준 삶 낭비하고 있으면 그건 좀 화가 날 것 같거든요·”
소년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소년은 나리로 인해 삶을 되찾았고 신의 축복 속에서 미래를 선물받았다·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죄라든가 잘못이라든가 용서라든가· 이미 대가를 물어야 할 사람들은 각자만의 답을 가지고 떠나 갔으니까·
“그러니 사십쇼· 행복하게 기운차게· 누가 뭐라건 그 자신이 바라는 길을 걸어가며 말입니다요·”
저도 그렇게 살 거니까요·
데스브링거는 그것을 다시 한번 환기시켜 주며 발길을 살짝 돌렸다·
“가는 거냐 뺀질이?”
“예· 이젠 더 이상 남아 있을 이유가 없잖습니까요·”
“그래도 연회 정도는····”
“높으신 분들이 그득그득할 자리는 역시 좀· 우리끼리 가지는 자리를 따로 마련한다면 그건 가겠습니다요·”
온갖 권력자와 부호 기타 고위계층─신전이나 마탑 같은─들이 참여하여 앞날을 축복하고 어쩌고 하는 자리는 부담스럽다· 그런 걸 참여할 바에야 차라리 어디 허름한 주점에서 스카일라나 바람손 재수 없는 지부장 놈과 못다 한 회포를 푸는 게 더 낫다 싶을 정도로·
“보상은 보상도 안 받고 갈 거냐?”
“그것도 별로··· 꼭 챙겨 주고 싶다면 제 것까지 샌님이 많이 챙겨서 남들 도우는 데나 써 주십쇼·”
재물이니 뭐니··· 그것도 이젠 별로 탐나지 않는다· 아니 예전부터 그런 것들은 그의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그저 살 만큼 있다면 그것으로 족할 뿐·
“그럼 이만 바람손 나리가 머무는 주점에 가 있겠습니다요·”
과연 그곳에 멀쩡히 영업을 할는지는 의문이지만 아무튼 그는 손을 설렁설렁 저으며 그 자리를 떠났다·
“꼬맹아!”
“···스카일라!”
생각보다 오랫동안 이어졌던 여정 위에 서럽도록 홀가분하고 후련한 끝을 고하되 인생이라는 남은 여행이라는 새 시작점을 찍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