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2화 우리가 후회할 줄 아는 한, 영원히 (4)
[인간들도 어떻게 잘하고 있구나·]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고 당연히 그러겠지·]
[끼웅·]
주작은 툴툴거리는 육귀의 말을 들으며 쿡쿡 웃다가 모험가의 빈자리에 여즉 슬퍼하는 산군 쪽으로 날개를 뻗었다· 부드러운 불꽃의 깃털이 머리 비늘에 닿자 산군이 고개를 살짝 들더니 이내 더욱 치대 왔다· 정말이지 애교 하나는 기똥차게 많은 후손이었다·
[한동안 여기서 머물 거니?]
흑사의 되물림들이나 후손은 하나같이 싸가지가 없기로 유명했는데 어쩌다 이리 착하고 순한 애가 나왔을꼬·
주작은 어리광 부리는 후손을 마구 쓰다듬으며 육귀에게 물었다· 이왕이면 오래 머물러 주길 바라는 마음을 듬뿍 담은 질문이었다·
[몰라· 발랑 까진 꼬맹이는 일찍 돌아와 달라고 했는데··· 그래도 땅이랑 뭐랑 좀 돌보다 가는 게 맞지 않나 싶고·]
[음! 그럼 일주일 정도만 주변을 순회하는 건 어때· 그동안 밀린 이야기도 할 겸 말이야·]
[그럴까····]
망설인다! 육귀가 망설인다!
주작은 망설임이 곧 수락이나 다름없는 육귀의 공식을 떠올리며─어째서인지 육귀 쪽도 성질머리는 대대로 비슷했다· 워낙 오래 사는 녀석이니 더욱 그렇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지만─꼬리깃을 팔락거렸다·
[이잉 좀 더 머무는 깁니까?]
마침 산군도 얼굴을 빼쪽 내밀었다· 날개 속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후이잉후이잉 울더니만 며칠 있다 간단 소리에 남아 있던 눈물이 쏙 들어간 모양이었다·
[오냐아·]
[그럼 용사님이랑 떠들어야지!!]
[말도 안 통하는 놈이 뭐라는 거야·]
[하참 지 이제 글 좀 쓴다 아입니까· 소통 가능입니다·]
[어 그래· 니 꼬리 길다·]
[히히히·]
방금 육귀가 한 말은 결코 칭찬이 아니었겠지만··· 우리 후손 참 해맑기도 하지·
주작은 까르륵 웃는 산군을 다시 한번 쓰다듬은 후 다른 날개로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그렇지 이왕 남는 거 인간들도 좀 도와주자· 어차피 이대로 뒀다간 맘 편히 대화하기도 힘들 테니까·]
[굳이 그래야 하나? 우리도 싸움에 보탠 힘이 얼만데·]
[그렇긴 하지만 우리가 도우면 더 많이 살아남을 것 아니니·]
[인간들이 많이 살아남는 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참고로 육귀는 예부터 세상사에 특히 인간사에 관심이 없던지라 냅다 부정적인 반응부터 보였다· 태곳적 짐승을 신처럼 모시는 인간들이 들거든 분명 충격받을 대화였다·
[귀찮긴 하겠지만 나중에 우리 잡으러 오는 것보단 낫잖아·]
[어휴 정말 손이 많이 가는 것들이라니까·]
그래도 완전히 꽉 막힌 타입은 아니라 잘 설득하면 넘어온다· 애초에 투덜거림이 심한 거지 정이 없는 성격도 아니고·
주작은 그 사실을 목구멍 너머로 삼키며 어서 가자고 독촉이나 했다· 역시나 육귀는 군말을 토해 낼지언정 더 이상 몸을 빼진 않았다·
[너도 갈래?]
[그라믄요· 지도 당근 가야지요·]
여기에 재생에는 가장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산군까지 더해졌다· 이 정도면 죽은 인간들을 되살리진 못해도 죽어 갈 인간들은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주작의 눈이 빙긋 휘어졌다·
[히히 블루베리 만들어야지·]
[감자도 아니고 조그매서 기별도 안 가는 걸 왜?]
[뭐 어때? 프레드릭도 그거 좋아하더라·]
[걘 또 누구야?]
[모험가가 키우던 말·]
[헛!]
더불어 그는 젠틀하면서도 까칠한 말 한 마리를 떠올렸다· 그의 등에 타도 주눅 한번 들지 않았던 피는 많이 희석되었지만 그래도 친우라 부르던 이의 후손을·
[아 그래· 보니까 그 아이 유니콘이 낳고 간 애의 자손이더라· 마음이 비단결처럼 고우면서 어느 정도 무력을 행사할 줄 아는 놈 아니면 사람 취급도 안 한다는 점이 아주 제 조상을 빼닮았어·]
[유니콘? 걔네 세계수인지 뭔지 만든다고 싹 다 저세상 가지 않았나?]
[남은 애도 있긴 했다나 봐· 지금은 죽은 모양이지만·]
[허· 신기하네·]
아무튼 모험가한테 블루베리 얻어먹는 솜씨가 아주 예술이었지 그 애·
주작은 그새 추억이 되어 버린 과거를 되새김질하며 후손을 톡톡 다독였다· 그들의 대화가 오가는 동안 다른 생각에 잠긴 듯 후손의 눈은 잠시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말이 잠시 엇나갔는데··· 아무튼 너는 하고 싶은 거 하렴· 베리류가 배는 덜 차도 추위에 쉽게 안 어니까 오히려 더 좋을지도 몰라·]
[히히 알겠십니다· 근디 그 프레드릭이란 말은····]
그러다 말을 다시 걸었을 때 눈에 빛이 돌아왔다· 말끝을 흐리는 듯하던 산군이 이내 소심한 어투로 자신의 바람을 덧붙였다·
[나중에 어데 있는지만 알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정말 귀여운 부탁이었다· 주작의 날개가 산군의 머리를 무자비하게 쓰다듬었다· 애당초 불꽃이라서 아프지도 않겠지만·
[그럼 당연하지·]
[진짭니까!]
[어휴· 쟤는 들짐승도 친구로 삼으려 하고· 어휴어휴·]
[왜? 친구 없는 것보단 훨씬 낫지· 그리고 인간들 보기엔 우리도 짐승이야·]
[저런 것들이랑 우리랑 같아? 하여간 일찍 죽는 것들이 뭐가 좋다고····]
[하하·]
누가 보면 선민주의에 빠진 것처럼 보일 저 말도 실상은 친구가 자신보다 일찍 죽는 것에 슬퍼할 산군을 걱정해서 하는 말임을 안다· 주작은 달라져도 여전한 친우를 두고 기분 좋게 날개를 펼쳤다·
[얼른 일이나 하자· 나 하고픈 이야기가 많으니까·]
펄럭·
기지개 한 번에 남은 악마들의 잔흔이 날아가고 파탄이 난 도시 위로는 새순이 돋기 시작했다· 마역에 침식되진 않았으되 삭막했던 눈의 대지에 풍요가 깃드는 순간이었다·
* * *
“저 저기·”
한편 파우스트는 쭈뼛거리며 기사들에게로 다가갔다· 그들에게 가도 되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있었으나 그를 응원한 아크메이지 때문이라도 발길을 돌릴 수는 없었다· 소년이 한 발짝을 뗄 때마다 두 기사의 눈에 담긴 감정이 짙어졌다·
“···뮌문트의 청옥· 클라우스입니다·”
“뮌문트의 기사 자르딘입니다·”
그리고 소년이 그들의 앞에 다다랐을 때 두 기사는 대뜸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건 모시는 주군이 아닌 그러나 진심으로 존경하고 숭상하는 자에게 기사가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예우였다·
파우스트의 뺨이 움찔 떨렸다·
“그···!”
“잉걸불의 이름을 잇는 영웅에게 거룩하고 영원한 찬미를·”
“찬미를·”
두 기사의 돌발 행동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소년이 당혹스러운 마음을 다잡기도 전 몸을 일으킨 두 사람이 이번엔 각을 잡고 서서 이마에 손을 올렸다·
“아울러 전설과 영광을 써 내리셨던 앰버 경과 휘하 기사로 복무하며 뮌문트를 수호했던 아탸 경 앨랴 경의 순직에 뒤늦게나마 삼가 명복을 빕니다· 그분들의 죽음은 길이 기억될 것이며 그 어떠한 모욕도 허용되지 않을 것입니다·”
결코 늦지 않은 단지 유족에게 전달되는 것이 지체되었을 뿐인 경례· 그 거수례에서 소년은 순간적으로 올라온 감정을 참지 못했다· 파르르 떨리는 뺨 위로 강 한 줄기가 흘렀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표정마저 무너지게 만들진 않았다·
아무렴 기사는 결코 부러져선 안 될 검이요 꺾여서도 안 되는 방패였다· 또한 도시의 검이자 방패로서 기사는 언제나 강철처럼 꿋꿋하고 단단해야 한다· 적어도 그의 아버지가 남긴 가르침은 그랬다·
“세 분도 기뻐하실 겁니다·”
그러므로 슬픔에 무릎 꿇지 않는다· 눈물을 흘릴지언정 표정을 망가트리지도 않는다· 지금껏 지키지 못했던 배움이라는 것이 앞으로도 지킬 필요 없다는 핑계가 되는 것은 아니기에·
척·
소년의 손이 이마에 닿아 거수 경례를 했다· 기사처럼 혹은 기사답게 어쩌면 기사 그 자체로서· 검처럼 곧고 방패처럼 우직한 모습으로·
깨어난 이래 여리고 유약해 보이던 인상이 한순간 악마를 베어 내던 기사의 그것으로 변했다· 소년의 아버지를 꼭 닮았으되 그보다 더한 위업을 탄생시킨 자의 얼굴이었다·
“···뮌문트는 언제고 파우스트 경의 방문을 환경할 것이다· 뮌문트의 성주님께서 남기신 전언입니다·”
그것이 조금 그립다면 그리웠을까· 클라우스는 과거 같이 일했던 남자를 떠올리며 성주가 그에게 남긴 말을 전달했다· 벼려 낸 칼날처럼 꼿꼿해졌던 소년의 눈매가 잠깐 꿈틀거렸다·
“제가··· 그래도 되겠습니까?”
한참이라고 하기엔 조금 부족한 시간 끝에 소년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경례를 거둔 후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 채 열중쉬어 자세를 하고 있는 상태라 그렇게 약한 물음으로는 들리지 않았다·
“하달된 말은 이것이 다입니다만··· 제 개인적인 판단을 물으시는 거라면 예· 파우스트 경께서 뮌문트에 들러선 안 될 이유는 없습니다·”
모험가가 쌓은 업적만 고려해도 그가 남기고 간 아이를 어화둥둥 모셔야 할 판이다· 한데 그 아이가 뮌문트의 전설이자 자랑인 호박기사의 핏줄이자 그 스스로도 악마를 막는 데 공을 세우기까지 했다?
그런 존재의 귀환을 막을 수 있는 막아야 하는 이유 따윈 없다· 이건 클라우스가 아닌 누굴 데려와도 동일할 의견이었다·
“···자르딘 경도 같은 판단이십니까?”
“···부족한 사람이나 제 의견도 전혀 다름이 없습니다·”
“제가 지옥에 남는 배신자의 행위를 묵인했다 해도?”
“···!”
다만 이 부분은 제법 뼈가 아팠다· 역린이나 다름없는 곳을 건드려진 두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찔거렸다·
“···저는 현장에서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그래도 결국 나오는 답은 이렇다· 상관보다 한발 빠르게 입을 연 자르딘의 눈꺼풀이 우악스럽게 닫혔다·
“그러니 그것은 제가 감히 판단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며 고로 어떠한 입장도 표명하지 않겠습니다·”
그 사람은 어떤 심정으로 지옥에 남는 걸 선택했을까· 그런 주제에 반지에 대해서 물어본 이유는 뭘까·
“다만····”
확실하게 죽일 수 있었으면서 구태여 살아남을 가능성을 남긴 건 대체 왜였나·
“당신께서 설령 단순한 변덕으로 그 행동을 묵인하였다 해도 저는 그것이 파우스트 경의 걸음을 막을 사유는 되지 못한다 여깁니다·”
이에 대한 답은 이제 영원히 듣지 못하겠지· 목에 걸고 있는 반지는 평생토록 제 주인을 찾지 못할 테고·
“모험가 경과 파우스트 경 두 분 모두가 그 행위를 용인한 것에는 저희가 감히 끼어들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일 테니까요·”
하지만 이것도 결국은 일종의 결말이다· 다소 흐리고 의문스러운 구석이 있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세상 모두가 선명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니까·
“그런 이유가 없다면····”
“아니요· 두 분이 결정을 내린 것 자체가 저희에겐 마땅히 인내해야 할 이유입니다·”
숭고한 희생과 헌신을 앞에 두고 딴지를 거는 것은 기사로서 보여야 할 태도가 아니다· 그 이전에 성주님이 잡아 죽이려 들 것 같기도 하고·
“···사파이어 경도 같은 판단이십니까?”
“예·”
그러니 이 이야기는 이걸로 끝이다· 클라우스와 자르딘의 입이 침묵을 미덕 삼는 사람처럼 굳게 다물렸다·
“당장은 내려갈 수 없습니다·”
그 적막함 속에서 소년은 떨리는 입술로 자신의 입장을 서서히 밝히기 시작했다·
“악마의 왕이 잡혔다곤 하지만 기존에 퍼져 있던 악마들까지 전부 죽은 것은 아닐 것이며 이번 전투로 도시가 완파된 이상 이곳의 사람들에게 어떠한 도움이 필요할지 모르니까요·”
이것은 정말 그 자신의 판단일까 아니면 뮌문트로 향할 시기를 최대한 늦추고자 하는 무의식의 발악일까·
“무엇보다 저는··· 모험가님의 유지를 받들어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구하고 싶습니다·”
아무래도 좋다· 어느 것이 이유든 어떤 것을 하든 모험가님은 반대하기보다 그렇게 나아가라며 칭찬을 해 줄 테니까·
“···그래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렇게 파우스트는 모험가가 떠난 후 처음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결정했다· 아직까진 자세한 기획도 구체적인 그림도 없는 생각에 불과했으나 그것만으로도 주변인들은 충분하다며 박수를 쳤다· 하다못해 저녁쯤 마법으로 연락을 시도해 온 뮌문트의 성주 귄터까지 같은 의견이었다·
─하고 싶은 걸 해· 나는 널 응원하니까·
“···제가 세계를 떠돌고 싶다고 해도?”
─그럼 경비가 필요하겠네· 혼자로는 위험한 게 너무 많으니 같이 다닐 사람도 있으면 좋을 테고··· 음 그래· 사파이어 경이랑 자르딘 경을 호위로 데리고 다니는 건 어때? 돈은 다른 편으로 부쳐 줄게·
“예? 두 분을요?”
─마음에 안 들어? 아니면 혹시 두 사람이 너한테 잘 못하디?
“아니 그건 아닌데··· 그 기사 인력이 둘이나 밖을 나도는 건 좀····”
─괜찮아·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으니까·
졸지에 기사 두 명의 외근이 무기한 연장되었지만 파우스트는 차마 완강한 거절을 표할 수 없었다· 건강히 안전하게 세상을 유람하다 돌아오라는 귄터의 말에서 무한한 걱정과 사랑이 느껴졌던 까닭이다·
“···고마워요 형·”
해서 파우스트는 수줍게 과거의 애칭을 꺼내 보았다· 마법 도구 너머로 보이는 귄터의 얼굴이 일순 해사하게 변했다· 파우스트 자신의 말이 이뤄 낸 것이라곤 믿기 힘들 정도로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별말씀을·
아 내가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인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건 정말이었구나· 파우스트는 멀게만 느껴졌던 그레트헨의 말을 다시금 되새기며 손끝을 꼬물거렸다·
“나중에····”
─응?
“나중에 돌아가게 되면··· 그땐 여행하면서 있었던 일을 전부 이야기해 줄게요·”
세상의 신비나 비경 밝혀지지 않은 미지 그 모든 것들을 하나도 빼 먹지 않고 전부 말해 줄 것이다· 소년의 다짐에 귄터가 깜짝 놀란 눈을 했다가 곧장 눈을 유하게 휘었다·
─부탁할게·
사과나무에 열매가 맺히기 시작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