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
“시작할게요·”
베키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소중히 모은 손바닥 위로 푸른 마나가 휘몰아치더니 연구실 한 켠에 있던 물을 잡아당긴다· 물과 마나가 엉기며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한다·
직육면체 모양의 얼음이었다·
플란의 시선이 물끄러미 향해오자 베키는 알아서 입을 열었다·
“바이올렛 교수님은 조작 계열을 특히 좋아하신다는 것 같거든· 그러니 지금부터 조작을 통해 얼음을 깎을거야·”
여전히 다리를 꼰채로 린느는 말을 덧붙였다·
“평소처럼해 베키· 깜짝 놀래켜줘·”
린느의 얼굴은 자신만만했다· 패배따위는 조금도 염려하지 않는 태도로 입꼬리를 올린채였다·
베키는 차분히 숨을 골랐다· 그간 가장 많이 다뤄왔던 원소가 얼음이니 실수만 하지 않으면 되리라·
눈을 감고서 마력을 조작한다·
예기를 띤 마력이 요란한 제법 살벌한 소리를 내면서 얼음과 맞닿는다· 머릿속에 그린 풍경을 토대로 얼음을 깎고 또 깎더니·
마침내 얼음꽃 한송이가 완성되었다·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꽃· 장미였다·
“어때?”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린느가 물었다· 베키도 어느정도 기대하는 표정으로 플란을 바라보았다·
“음·”
플란은 살아오면서 숱한 조언 요청을 받았다·
어떤 계열을 전공하면 좋을지 등의 진로고민부터 시작해서 이론 논문을 첨삭해달라는 요구까지·
요청받은 것은 다양했지만 플란이 내뱉은 대답의 영향은 컸다·
단순하게 권유한 계열에 평생 몸담기로 결심하는 학생· 고작 몇 줄 추가해줬다고 눈물을 흘리는 학자···
허나 그런 그에게도 어려운게 있다면 바로 미(美)에 관한 질문이다·
이 가치를 바라보는 시선은 각 사람마다 상이하기에 쉽사리 잣대를 들이밀기가 어렵다·
다만 그럼에도·
“···설마 이 아카데미는 이따위 수준으로도 A를 받을 수 있는건가·”
플란은 자신감있게 그의 평가를 내뱉었다·
“······!”
연구실의 모두가 충격에 빠진다·
플란이 베키가 만들어낸 미(美)를 향해서 자신있게 혹평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했다·
애초에 아름다움의 기준을 따지기 이전에 조작 자체가 미숙하다·
“별로···야?”
베키가 묻는다· 플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뭐가···뭐가 그렇게 별로인데?”
“전부·”
“처음···부터?”
베키가 당황스러운지 입을 뻐끔거렸다· 옆에서 듣고있던 린느가 코웃음을 쳤다·
“다시 하는게 낫겠다~ 그따위 말은 이 세상 누가 못해? 야· 그렇게 잘났으면 직접 해봐·”
플란은 비아냥거리는 린느의 태도가 그저 가소롭다·
망설이는 이유는 두려움이 아니라 오로지 귀찮음때문이었다·
첫 번째로는 귀찮고 두 번째로는 이 신체가 보관할 수 있는 마나의 양이 많지 못하다·
완전히 소진된 마나를 전부 채우는 데에는 꼬박 하루가 걸렸었다·
플란도 테스트를 준비해야하는 입장이니 여기서 너무 많은 마나를 사용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플란은 그 귀찮음을 무릅쓰고 베키의 마법을 봐주기로 했다·
검토해주기로 약속하긴 했었고 무엇보다도 불안해하는 베키의 모습이 비맞은 생쥐처럼 초라해서·
플란이 차분하게 걸어서 베키의 앞에 섰다·
“장미면 되겠나·”
“장미? 어···그러니까···”
베키는 말하다말고 린느쪽을 흘끗거렸다· 그러나 린느는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손을 휘적거렸다·
“내 눈치보지말고 편하게 해 베키· 저렇게 자신만만한데 뭐든지 해주겠지· 안 그래?”
대답을 들은 베키가 우물쭈물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콜럼바인· 원래는 콜럼바인 꽃을 만드려고 했었어·”
“콜럼바인이라·”
플란은 그 꽃의 생김새를 잠시 떠올렸다·
꽃위에 또다른 꽃이 피어있는 신기한 형태 매발톱꽃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우는 그 꽃이 아마 맞을 것이다·
“얼음을 생성해봐·”
“콜럼바인 꽃을 만드려고? 아 근데 그건 생김새가 너무 복잡해서 나도 포기···”
“꽃의 생김새는 문제되지 않는다· 얼음·”
“아 응·”
베키는 앞으로 양손을 쭈욱 뻗었다·
다시 한 번 마나의 기운이 휘몰아치고 연구실의 물이 모여 직육면체의 얼음을 만들어냈다·
“이번에는 콜럼바인을 목표로 조작해보도록·”
플란이 처음부터 끝까지 나서서 해봐야 베키에게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건 앞에서 묘기를 보여주는 행위에 가까울 뿐·
따라서 그는 베키를 보조하는 식으로 검토해줄 생각이었다· 이 편이 마나 소모도 훨씬 덜하다·
“···알았어· 시작할게·”
베키는 깊게 호흡한 뒤 마나의 흐름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카가가각 하는 소리와 함께 얼음이 깎여나가기 시작했다· 플란은 조용히 뒤에서 그 모습을 관찰한다·
자신있게 얼음을 휙휙 깎아나가는 베키의 움직임·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망설임이 가득해진다·
베키가 얼음에 시선을 붙인채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니까··· 콜럼바인은 항상 여기부터 막히거든· 꽃잎 부분 묘사가 너무 어려워서·”
플란은 고개를 저었다· 현재 문제가 되는 것은 묘사가 아니다·
현재 베키의 조작은 급하다· 마나의 회전률이 1초에 23번정도·
물론 1초에 23번씩이나 회전하는 마나의 절삭력이 훌륭하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23번의 회전률은 감당할 수 있을 때나 사용하는거다·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마나의 사용은 통제할 수 없는 말의 등에 겨우겨우 달라붙어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조작에서 가장 중요시 되는 것은 완성도· 속도는 그 다음의 문제다·
한편 베키는 뒤통수쪽으로부터 어떤 대답도 돌아오지 않자 자연스레 불안해졌다·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며 묻는다·
“플란? 왜 아무말도 없··· 으 으응?”
아니 뒤를 돌아보며 물으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갑자기 훅 하고 플란의 향이 베키의 코 끝을 찔렀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녀의 손등 위에는 플란의 손이 얹어져 있었다·
베키는 화들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마치 뒤에서 끌어안는듯한 자세이지 않은가·
“야 야! 뭐 뭐 뭐하는거야!”
“어쩔 수 없다· 나도 썩 내키지는 않아·”
플란의 말에는 한치의 거짓도 없었다·
실제로 마나 소모를 최소한으로 하면서 남의 마법을 보조하기에는 이 자세가 최적이었을 뿐이다·
“보조하지· 이 감각을 기억해라·”
“뭐 뭐? 무슨 감각? 뭘 기억하라고?”
대답 대신 플란은 차분하게 그녀의 회전률을 낮추었다· 1초에 14번 정도면 충분하다·
“중요한건 회전률이다·”
이런 감각은 말로 설명하는 의미가 없다·
마법으로 설명하고 마법으로 체득해야만 비로소 그 의미를 갖는다·
애초에 플란이 이 행위를 ‘검토’라고 칭한 이유도 그때문이다·
그는 베키의 마법을 따져 판단내려줄 뿐이다·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해나가느냐는 오롯이 베키의 몫이다·
“야! 프 플란···! 어···?”
얼굴이 새빨개져서 뭐라고 소리치려던 베키의 입이 조용히 벌어졌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녀의 손바닥 앞에 생성된 얼음은 어느샌가 완벽에 가깝도록 콜럼바인 꽃의 모습을 갖추어가고 있었으니까·
린느와 티르도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서 그 상황을 지켜본다·
“한 번 이해했다면 그 다음은 쉽다· 이런 식으로···”
그러나 플란의 설명은 매듭지어지지 못했다· 똑 하는 소리와 함께 꽃이 부러져버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부러지는 선에서 끝나지 않았다· 펑 하는 소리를 내더니 사방으로 흩어져버린다·
“······”
플란이 베키로부터 몸을 떼어내고 잠시 정적이 내려앉는다·
“풉·”
정적을 가장 먼저 깬 것은 린느의 웃음소리였다·
“푸 푸흡 푸하하···!”
린느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얼음은 산산조각나서 사방으로 흩어져버렸다· 이건 어떻게 보더라도 대실패였다·
눈가에 눈물까지 글썽거리면서 린느가 말을 이었다·
“참나 그럼 그렇지· 멀쩡한 얼음 부숴먹는게 네가 말하는 보조야?”
자신의 아카데미 제복에 튄 얼음 파편을 린느가 슬그머니 손가락으로 훑는다·
“야 이런걸 보고 별로라고 하는거야· 알았어? 뭘 허세를 부리고 있어 별 것도 아닌게··· 내일이 테스트면 네거나 신경써·”
그러거나말거나 플란은 그들을 뒤로했다·
베키와의 약속을 지켰으니 이 공간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이제 답을 찾고말고는 베키의 역량 문제다·
플란은 베키가 짚어준 상점 위치가 어디쪽이었는지를 되짚었다· 그리고 망설임없이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꺼져· 다시는 오지마!”
플란이 떠난 후 연구실 문에다대고 린느가 소리쳤다·
화가 풀릴때까지 소리를 친 후 린느는 베키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베키 저런 애들은 그냥 무시해· 얼굴 믿고 허세부리는거야· 남자는 거의 저렇다니까· 내일 테스트 끝나면 무슨 등급 받는지 확인해보자·”
“······”
“왜 대답이 없어· 베키?”
“아·”
그제서야 베키는 고개를 들었다· 린느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왜 정신을 못차려· 너도 쟤한테 관심 있었어?”
“저 절대 아니에요· 그럴리가요·”
베키의 얼굴은 여전히 붉다· 그녀의 시선이 다시 제 손바닥을 향했다·
“중요한건 회전률···”
플란의 말을 조용히 되뇌었다·
알듯말듯한 그 느낌· 린느가 그 뒤로도 바쁘게 중얼거렸지만 베키의 귀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플란은 하나도 실수하지 않았어·’
애초에 얼음을 부순 것은 베키의 실수였다·
◈
마법 학부의 상점은 적어도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거대하고 컸다·
안은 배회하는 수많은 학생들로 이미 가득해있었다· 하지만 시선은 오로지 물건들을 향한다·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있는 여러 상품들· 척 보기에 생소한 것도 있었고 반가운 것도 있었다·
“어서오세요~”
갑자기 귀 바로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짜증이 확 치밀었다· 물론 겉으로 전혀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무언가가 머리 주변을 날고있었다·
조그만 여성의 몸체와 네 개의 날개· 요정이었다·
“아 반갑다·”
“반갑다~? 는 반말인데~”
눈 앞의 요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을 정정했다·
“반갑습니다·”
“그래요 그래요~”
다만 고대 마법을 연구하며 자료에서나 몇 번 봤던 것이 요정이니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다·
“그래서 학생은 무슨 일로 여길 찾았나요~? 처음 보는 얼굴인데~”
초록빛 요정은 활발하게 말을 이어간다·
“마법 스크롤들이 필요해요? 아니면 영약? 아~ 완드나 스태프도 물론 취급하고 있어요·”
아무런 방비도 없이 자유롭게 활공하는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몸 주변을 원형의 배리어가 감싸고 있었다·
억누를 수 없을 정도로 호기심이 솟아오른다·
만약 저 배리어 자체를 고정하면 어떻게 될까? 요정도 고정되는걸까?
나도모르게 손이 먼저 움직였다·
“필요한게 있으면 뭐든 말만··· 으갹?!”
마치 곤충이 박제되듯 그녀가 허공에 팟 소리를 내며 붙박인다·
“뭐 뭐야?! 갑자기 왜이래?”
요정이 낑낑거리며 안간힘을 썼다·
나는 그제서야 상황을 파악하고 황급히 박제를 풀었다· 손을 뒤로 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배리어를 고정하면 요정도 고정되는군·’
이걸로 호기심 해결· 이제 정말로 물건만 사면 된다·
이런저런 물건이 많았으나 가장 높은 우선 순위를 지닌 것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우이씨 방금 도대체 뭐였지···”
“나는 트리비아를 찾고 있다만·”
제 주먹을 쥐었다폈다하던 요정이 고개를 확 짓쳐들더니 내쪽으로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러니까아~ 그건~ 반말이래도~”
나는 그제서야 내가 또 반말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른 누군가를 존대하는 것은 영 익숙해지기가 힘들었다·
흠흠 헛기침을 하고나서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트리비아를 찾고 있습니다·”
“그래요 그래요~ 세상에 트리비아가 없어? 이쪽으로 오세요!”
요정은 열심히 날갯짓을 하면서 나를 상점 안쪽으로 이끌었다·
“커버는 어떤 재질로 생각해뒀어요~? 요새 제일 잘나가는건 마호가니 커버인데 남학생들은 좀 깔끔한걸 좋아하죠· 역시 가죽?”
“혹시 가격대가·”
물건을 구매하면서 값을 따져본게 도대체 얼마만이지? 묻고나서 스스로에게 놀랐다·
“아~ 귀족 자제분이시면 크게 부담되지는 않을거에요· 등급에 따라 할인도 들어가고요~”
“귀족이 아니고 등급은 F입니다·”
“음?”
포르르 날아가던 요정이 갑자기 비행을 멈춘다· 곤란하다는 듯한 얼굴로 콧잔등을 긁는다·
“등급이··· F라고요? 전혀 그렇게 안 생겼는데···”
이내 친절한 태도가 완전히 사라지더니 요정은 밋밋한 표정으로 검은색의 종이 표지를 가진 트리비아를 가져왔다·
어딘가 익숙하다 싶었는데 베키것과 똑같았다·
“15네클이에요·”
“예·”
스칼렛이 준 용돈이 20네클인데 사실상 수중에 있는 돈을 전부 털었다·
볼일은 끝났다· 망설임 없이 상점을 벗어나려는데·
“!”
불현듯 누군가와 부딪히는 바람에 트리비아를 놓쳐버렸다·
누군가와 부딪힌다는 감각이 생소하다· 이전 세계에서는 늘 배리어를 치고 다녔으니·
“앞을 잘 보고 다녀야지· 괜찮아?”
부딪힌 남학생은 굉장한 미남이었다· 엄청나게 큰 키 말도 안 되게 넓은 어깨·
이쪽의 신체가 시작에 불과하다면 저쪽은 벌써 완성형에 가깝다· 기사를 해도 꿇리지 않을 신체다·
“고맙다·”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노트를 받아드려는데·
“어머 플란 아니야?”
웬 여자애가 끼어들었다· 금발의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가 꽤나 눈에 익었다·
그녀가 내 손에 들려있는 트리비아를 보더니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기초 마법에 이어서··· 이번에는 트리비아야? 제일 싼 걸로 샀네· 맞지?”
그녀의 명찰에 적혀있는 헤일리 세 글자를 보자 기억이 확실해졌다·
헤일리는 옆 남학생의 팔을 툭툭치며 말을 붙였다·
“대답이 없네· 루이스 얘가 플란이야· 내가 저번에 이야기했던·”
헤일리 그녀는 내가 이 세계에 떨어지고 처음으로 마주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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