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1
“····”
어느 순간 나의 눈이 뜨였다· 아직 선명하지 않은 시야 속에서 새하얀 천장이 보인다·
오늘도 연구할 것이 산더미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일으켰다· 창가에서 들어오는 빛살은 따사롭고 마법을 탐구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하루가 될 듯 하다·
“음·”
침대에서 막 벗어난 그때·
─카플란 아직이야?
문 밖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나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 그건 더이상 들을 수 없는 이의 목소리였기 때문에·
벌컥─
다음 순간 허락도 없이 문이 열리고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동시에 마녀 특유의 공방 냄새가 끼쳐온다·
“너····”
“또 연구하느라 밥 걸렀지? 내가 챙겨왔어·”
바구니를 들어보이는 그녀의 얼굴이 희미하다· 눈처럼 새하얀 백발이 빛날 뿐 다른 부위가 제대로 보이질 않았다·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요 스승님! 저도 왔어요!”
멍하니 서 있는데 그녀 뒤에서 제자가 손을 번쩍 들면서 나타났다· 씨익 웃어 보이는 녀석의 얼굴에는 미소가 만연하다·
“···뭐지·”
“뭐긴요 스승님 제자죠!”
넉살 좋게 웃어 보이며 녀석은 바구니에서 음식을 꺼내 늘어놓는 걸 돕기 시작했다· 비어있던 식탁은 여자 두 명의 손길로 인해 금세 음식으로 채워진다·
“····”
믿기질 않아서 나는 그녀의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왜 그렇게 쳐다보고 그래? 쑥스럽게·”
찬물로 세수라도 좀 해야 할 것 같아서 세면대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뭔가 이상하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거울을 보았다·
거울에 비추어진 나는 아마 슬퍼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슬픔을 느낀다니 이해할 수 없다·
또한 용납되지도 않는 일일 터인데·
그때 밖에서 다시 씩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승님! 저 먼저 먹어도 되죠!”
나는 세안을 마치고 다시 식탁으로 향했다·
먹음직스러운 샌드위치 청경채 잘 썰어진 과일 등이 벌써 식탁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는 두 명의 식사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카플란·”
그때 갑자기 그녀가 진지한 목소리로 나의 목소리를 불렀다· 나도 모르게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는 영 이해되지 않는 말을 건넸다·
“이렇게 보니까 좋다· 그래도 이제 가봐야지·”
어디로 가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불청객은 내가 아니라 너일 터인데·
“엥?”
제자가 의문사를 토해냈다·
“우리 스승님 보고 싶다고 그렇게 노래를 부르셨으면서···· 벌써요? 차라도 한잔하시지·”
녀석은 그렇게 말하면서 샌드위치를 아구아구 씹었다· 너무나도 익숙하여 아직도 잊지 못한 내가 참 여러 번 지적했던 습관이었다·
“스승님~ 스승님도 가끔 대마녀님 생각도 해주시고 그래요· 마법이랑 약혼한 줄 알겠어요·”
평소라면 그 입을 다물라고 했을 텐데 왜인지·
“여유가 되면···· 그리하지·”
이렇게 말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때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이제 어서 가봐· 약속 꼭 지키고·”
“마탑에는 갈 일이 없다고 했을 텐데·”
“아니· 마탑 말고·”
그녀가 단호하게 내 말을 잘라냈다·
허공에서 우리의 눈동자가 마주친 순간·
잠시 말을 잃었다·
“우리가 했던 약속 있었잖아·”
그녀는 너무나도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혼자 외롭게 지내지 않기로 우리 약속했었지?”
“···!”
그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호흡이 답답하고 목이 멨다· 손바닥으로 짚은 이마는 이미 땀으로 잔뜩 젖어있었다·
“····”
꿈이다·
잠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만 방금의 두 명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는 점을 인지했다·
또한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느낀다· 소박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특별했던 일상이 꿈의 형태로 눈앞에서 펼쳐지게 될 줄이야·
“하아·”
많이 피로했던 모양이다· 아무튼 토벌제의 아침이 밝았다·
나는 조용히 그녀와의 약속을 떠올렸다· 다음 순간 베키 루이스 트릭시를 순서대로 떠올린다·
“약속이라·”
그리고 입가엔 엷은 미소가 지어졌다·
“···나름 지키고 있다고 해야 할지·”
◈
숙소를 나서기 직전 나는 몇 가지를 점검했다·
베르켈까지의 여정은 사실 내게도 유의미한 도움을 꽤 여럿 주었다·
이 세계에서 아직 나의 마나는 무한하지 않다· 따라서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최적의 방법을 계산해야 했고 보유량은 늘 한계까지 쥐어 짜내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대단한 훈련이 되어주었다· 헤라와의 친밀도 역시 큰 폭으로 상승했다·
밤의 정령 헤라가 들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 정령화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정령화라·”
마나의 용량 증가·
사실 그동안 내가 헤라로부터 보조받은 기능은 그것 한 가지 뿐이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계산 능력을 상승시켜준다 어두운 곳에서는 마법의 위력이 상승한다···· 다른 기능들은 딱히 유의미한 도움을 주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정령화’는 다르다·
형태가 장갑으로 고정되어있던 헤라를 지금부터는 내가 원하는 ‘무언가’로 바꿀 수 있게 되니 필시 유용할 수밖에 없을 터·
“형태를 내가 정할 수 있는 것으로 아는데·”
[네 맞아요! 하지만 정교한 조형을 위해서는 저희가 앞으로도 더 더 더 친해져야 해요·]
“우선 한 번 해보지·”
[그 전에 우선 감응부터요!]
“감응을 말한 것이다·”
나는 헤라의 마나를 있는 힘껏 받아들였다·
“···!”
동시에 놀라울 정도의 통증이 치밀었다·
전신의 뼈가 갈리는 듯 근육이 꼬이면서 찢어지는 듯 하잘것없는 육신이 탈태하며 느껴지는 격통·
콰드드득─!
몸에서 나서는 안 될 소리가 선명하게 귓전을 때린다· 시간이 지날수록 잠잠해지않고 고통은 오히려 점점 커져만 간다·
그러나·
눈을 감고 집중하여 그 전부를 버텼다· 흐르는 땀까지는 어쩔 수 없겠지만 결코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다·
어쩌면 귀족의 것보다도 고풍스러워야 할 그것·
‘마법사로서의 기품’
그에 충실할 따름이었다·
받아들인 마나가 이내 서서히 통제되기 시작했다· 몸 안에서 고르게 분배하고 그 흐름을 이해하여 온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었다·
“쿨럭···!”
맑지 못한 핏덩어리가 입 밖으로 토해진다· 어느때보다도 고통스럽지만 결국 고차원적인 감응의 결과는 성공이었다·
나는 천천히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몸이 새로 받아들인 힘으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번에는 정령화를 해보겠다·”
[사 살살 부탁드려요···?]
정령화는 기본적으로 소환 계열에 속하지만 조작 계열과의 궁합이 훌륭한 마법이다·
헤라의 형태에 집중한다· 마나를 흘려 넣자 검은 장갑에 불과했던 그녀가 흐물거리기 시작했다·
이어지는 실험의 결과는 단순했다·
오르골처럼 여러 부품을 요하는 형태는 실패였다· 다만 바늘처럼 단순한 모습은 무리 없이 성공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앗 좀만 더 놀아주시지····]
그렇게 막 확인을 마친 순간·
─벌컥!
돌연 누군가가 문을 열어젖혔다·
“플란! 점수를 오히려 크게 벌어버렸는데···!”
문을 연 주인공은 베키였다·
“···!”
베키는 말을 매듭짓지 못했다· 내 몰골을 확인하더니 미간을 파르르 떨 뿐이다·
“용건은 무엇이지·”
피가 묻은 입가와 책상을 마법으로 치워내고 셔츠를 즉석에서 갈아입으며 나는 조용히 물었다·
“아···· 그게····”
웅얼거리는 베키의 시선이 나를 한차례 훑었다· 말을 한참이나 잇지 못하더니 그녀가 아주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
“플란 너···· 아 아파? 몸 어디가 아픈 거야?”
“이상 없다· 나는 용건을 물었을 텐데·”
베키는 그제야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 그거· 음···· 점수를 따버렸어· 포커에서 이겨버렸거든 너한테 주려고 기념품도 몇 개 샀는데····”
“나중에 확인하지·”
“아 어· 미안해· 이만 나가볼게· 내가 너무 갑자기 들어왔다····”
베키가 아주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물러났다· 문틈이 완전히 닫히는 그 순간까지도 그녀는 힐끔거리면서 내 눈치를 보았다·
방에 혼자 남은 후 나는 몇 가지를 더 살폈다·
“그러고 보니····”
마법 학부의 총장 코네트로부터 받은 백지 명함이 불현듯 떠올랐다·
오랜만에 살펴보니 유의미한 변화가 있었다· 글자가 거의 다 떠올랐고 이것이 무엇인지도 어렴풋이 예상되었다·
아마 마력을 제공하는 형태의 아티팩트로 추측된다· 한도 내에서 원하는 만큼 뽑아낼 수 있을 듯 한데·
“이런 식의 백지수표였을 줄이야·”
금화가 아니라 마력을 뿌릴 생각을 한다니 지극히 총장다운 방식이라 고개를 절로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어느순간·
‘···?’
이전 세계의 경우 자신의 마력을 담은 물건을 건네주는 것은 마법사들 사이에서 아주 농도 짙은 유혹 행위로 통했다· 혹시 이 세계에서도····
“뭐 됐다·”
당장은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그것보다는 이 명함의 사용 용도가 중요할 터이니·
그것을 안주머니에 집어넣은 후 이번에는 트리비아를 꺼내 들었다·
누가 입소문을 낸건지 최근 가르침 경매에는 제법 많은 수의 의뢰가 들어오고 있는 채였다·
“마법에 관한 것만 받는다고 했을 터인데····”
실망스럽게도 다소 잡다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일례로 마이에브로 추정되는 녀석이 ‘흔적이 남지 않으며 푸른 마나를 사용하는 암살 마법’을 알려달라는 의뢰를 했다· 당연히 알려줄 생각은 없다·
[*트릭시]
[▶아 아까 연락 잠깐 못드렸던 건]
[▶제가 트리비아를 깜빡 두고 가버렸어용]
[▶혹시 심기가 불편해지셨나용···· 8ㅅ8]
트릭시에게는 답장만 대충 보냈다·
별 쓸데없는 내용들을 넘기며 의뢰를 걸러내던 나는 마침내 흥미가 돋는 내용을 발견했다·
[*광야반짝]
[▶안녕하십니까· 정중하게 문의드립니다·]
[▶마법과 관련되어 있다면 그 무엇이라도 대답할 수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만약 사실이라면 한 명의 마법을 집중 탐구해주셨으면 합니다· 보수는 원하시는 대로 충분히 챙겨드리겠습니다·]
[▶대상은 아카데미 1학년 플란 유디트입니다·]
플란 유디트·
익명의 의뢰자는 분명 그리 적었다· 내가 유디트 가문의 태생을 지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한데 그것보다도 더 신경이 쓰이는 것이 바로 아래 줄에 적혀있었다·
[▶또한 잔불의 기사로 유명한 스칼렛 유디트의 고유 능력을 탐구해주셨으면 합니다·]
[▶두 명의 기운을 비교 분석해주십시오·]
─대표분들은 광장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안내합니다·
─대표분들은 광장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때마침 숙소 내부에 안내 방송이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곧바로 방을 나섰다·
복도를 걸으며 의뢰자에게 되물었다·
[▷어려운 의뢰는 아니다·]
[▷그러나 의도를 내가 알아야겠군·]
답장은 조금의 간격도 없이 되돌아왔다·
[▶친남매 여부를 확인하고자 합니다·]
그것도 다소 놀라운 내용을 담고서·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