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6
잔불의 기사는 베르켈의 중심을 걸었다·
보랏빛 안개가 품은 독기는 여전했으나 여기사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디뎠다· 일대의 분위기를 오로지 자신만의 것으로 휘어잡는 그녀는 틀림없이 살아있는 불꽃이었다·
“····”
그렇게 걷고 또 걸어서·
스칼렛은 어둠을 발견했다· 검은 산이었다·
“어이·”
그녀는 소리 내 무언가를 불렀다· 언뜻 보면 이상하기 짝이 없는 행위였다· 산을 앞에 두고 혼잣말하는 듯했으니·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스칼렛은 그것의 이름을 불렀다·
“사룡(死龍)·”
고대부터 이견 없이 강자로 여겨졌던 종족· 누구에게는 신으로 추앙받고 누구에겐 악마처럼 여겨졌던 초월체·
죽은 용· 사룡·
검은 산의 정체는 그의 거대한 몸체였다· 검은 뼈대만 남아있을 뿐이라 할지라도 그 뼈마디 하나하나의 크기가 무지막지했다·
마수 중 토벌제에서 가장 큰 점수를 지닌 것·
사룡이 입을 열었다·
“···또 1년이 지났느냐·”
턱관절은 달그락거리며 보랏빛 숨결을 내뱉고 독 안개는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몸 전체가 녹아내렸을 극독이었다·
그러나 스칼렛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존재· 사룡은 1년을 주기로 부활하고 토벌제가 열릴 때마다 이 마수의 숨통을 끊어놓는 것이 바로 잔불의 기사였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녀의 말에 사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주변의 마력이 크게 울었다·
두개골의 텅 비어있는 안구가 천천히 스칼렛을 들여다보았다· 본다고 칭하기에는 어폐가 있는 행위일지도 모르나 사룡은 분명 스칼렛의 무언가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부활했음에도 여전히 무료하구나····”
사룡의 목소리가 경건하고 엄숙하게 울려 퍼졌다· 주변의 암석들이 진동하며 흔들린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곧 다시 죽여줄 테니·”
스칼렛이 바위 하나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사룡은 숨이 붙어있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인 독 안개를 내뿜기에 베르켈 주민들의 안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처치해두어야 하는 마수였다·
사룡의 턱이 달그락거렸다· 아마 웃는 듯 했다·
“잔불의 기사· 이번에도 네가 내 말동무인가·”
“그래· 어차피 올해도 아무도 오지 않을 거다·”
‘오지 못한다’는 표현이 조금 더 정확할 것이다·
스칼렛의 견갑 그리고 사룡· 토벌제에서 가장 큰 점수를 획득할 수 있는 두 가지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도전하지 않는다·
단순한 이유다· 불가능에 가까우니까·
발을 딛고 서 있기도 힘든 위험지역의 중심부까지 도달하는 것도 도착한 이후 전투하는 것도 상식적으로는 통용되지 않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때·
“인간· 스칼렛 유디트여·”
사룡이 스칼렛에게 건넨 말은·
“이번에는 너 혼자가 아니로구나·”
상당히 의외의 것이었다·
스칼렛은 잠시 그 말의 의미를 되짚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
위험 지역에서 타인의 기운을 느꼈다·
◈
플란이 대표들을 데리고 위험 지역으로 가버린 뒤 하루가 지났다· 이 사건은 숱한 관심을 불러 모았고 현재 아주 많은 논쟁을 낳는 중이었다·
토벌제를 주관하는 아카데미 내부에서는 이 전례 없는 일을 어떻게 취급해야 할지 회의가 하루에도 수십번 씩 열렸다·
덕분에 아카데미의 업무는 잠시 마비·
상점 도서관 마탑 기사 학부···· 모두의 관심사가 토벌제에 있었기에 당연한 수순이었다·
“당장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위험 지역에 끌려간 대표가 당연히 존재할 것 아닙니까?”
“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각오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지요· 애초에 토벌제를 시작하기 이전에 각서를 작성하지 않았습니까? 또한 플란이 반칙을 사용한 것도 아닙니다·”
마법 학부와 기사 학부가 공용으로 사용하는 27개의 회의장· 그 모든 공간의 주제는 현재 하나로 일치했다·
위험 지역으로 함께 이동한 플란에 관한 논란·
“아주 높은 수준의 마법이었습니다· 거리가 짧은 건 놔두더라도 많은 인원을 옮겼다는 것부터가 엄청나니까요·”
플란이 무모한 짓을 벌였다고 생각하는 자들조차도 마법진의 수준 하나만큼은 인정했다·
“하지만 활용한 방식이 악독하지요· 다 같이 죽자는 의미 아닙니까?”
그러나 논란을 낳은 것은 활용 방식이었다·
토벌제의 어떤 기록을 살펴보더라도 다수를 한 번에 순간 이동시키며 또 도착지를 위험 지역으로 설정했던 대표 학생은 전무했기 때문이다·
“대표들이 위험 지역에 들어간 것 가지고 주절주절···· 그렇게 생각하는 당신 생각이 훨씬 악독하네요· 대표들을 무슨 어린애로 보세요?”
위험 지역에서는 기자들이 현황을 중계하지 못하는 탓에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바쁘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입을 움직이는 중이다·
그로 인해 메르헨 아카데미는 아주 북적거리게 되었다· 무언가라도 주워듣기 위해 유동 인구가 불어난 탓이다·
“뭐 좀 들은 거 있어?”
“흐음 두 개 정도?”
사건이 발생한 직후 이제야 막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아카데미에는 아주 큰 변화가 생겨났다·
“어디서 구한 정보인데· 검증됐어?”
“사기일 확률이 높지···· 근데 일단 사버렸어·”
위험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을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점수가 아닌 대표들의 자세한 근황을 알고 있는지· 회의는 어떤 결과로 마무리되었는지·
그 정보력 자체가 유행이자 권력처럼 자리했고 아예 소설을 쓰듯 현황을 예측하는 모임이 생기는가 하면 가짜 정보를 파는 이들까지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한편·
마법 학부의 인기 높은 찻집 ‘로인’·
“하루가 또 지났는데도 마법 학부의 점수는 오르지 않았어· 이미 죽었을 수도 있다는 거지·”
셋째 황녀 유시아는 음료를 야광 빨대로 휘적거리고 있지만 사실 진정한 관심사는 마실 것이 아닌 주변의 이야기에 있었다·
“이미 정규 기사 몇 명을 파견했다잖아· 그리고 다른 누구도 아니고 플란인데 계획이 있겠지·”
어느 곳을 향해 귀를 열어도 순간 이동 마법진 위험지역 그리고 플란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건 너무 태평한 거 아니냐· 점수 현황 보니까 천축 점수는 지금도 미친 듯이 올라가던데·”
“내 말은 우리가 여기서 아무리 이야기해도 뭐가 안 달라진다는 거야· 그냥 좀 기다리자고·”
“말로는 쉽지· 다음 종목은 황실에서 주관하는 건데···· 플란이 없으면 나갈 사람도 없어·”
황실· 하늘에 닿아있는 권위·
토벌제 이후부터는 그 고고한 핏줄들이 본격적으로 아카데미의 대표들에게 관심을 갖는다·
“황실···· 아 근데 그거 정말이야?”
“둘째 황녀가 플란한테 관심 보였다는 거?”
“그래· 그거·”
“그것까진 모르겠다· 뜬소문이 워낙 많아서·”
···셋째 황녀도 관심 있습니다·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자리를 뜨려다가 유시아는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서 멈추어 섰다·
웬 남학생이었다·
“아 유시아· 잠깐 밖에 나가서 이야기할래?”
“예· 가능합니다·”
건물을 벗어나자마자 남학생이 표정을 바꾸더니 아주 정중한 어투로 낮게 말했다·
“위험 지역에 잠입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평범한 남학생처럼 위장해있지만 사실 이 남자 또한 ‘광야’의 조직원이었다·
그는 차근차근 보고를 이어간다·
“현재 광야의 조직원들 몇 명이 배치되어있고 황녀님께서는 토벌제의 현황을 충분히 지켜보실 수 있습니다·”
“아아 잘 되었군요!”
해맑게 웃으면서 반응하다가도 유시아는 문득 플란이 염려되었다·
“플란 경···· 지금쯤 괜찮으실지····”
“지금 바로 장소를 옮기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예· 그럼 안내하겠습니다·”
앞장서던 조직원은 문득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갑자기 유시아를 향해 정중히 돌아섰다·
“참 셋째 황녀님·”
그가 나름 진지한 표정을 짓고서 묻는다·
“이번에도 혹시 예측에 참여하셨습니까?”
“예?”
“1만 96배의 성과를 거두셨잖습니까· 그게 흥미로우셨던 것인지 이번에는 둘째 황녀님께서도 예측에 참여하셨습니다·”
둘째 황녀· 오로라·
그 언급에 유시아의 표정 위로 아주 잠깐 곤란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표현 그대로 찰나에 불과한 것이었다·
“음···· 아니요· 저는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우선 가시지요·”
“죄송합니다· 제가 괜히 말이 길었습니다·”
다시 걷기 시작한 둘·
황녀의 주머니에서 형광 색지 하나가 빛났다·
◈
저주받은 지역이었다·
음험하기 짝이 없는 보랏빛 안개와 기형적으로 뒤틀려있는 풀과 나무들 어딘가에서는 마수들의 울음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는 이곳·
나는 베르켈의 위험 지역에 있다·
마나의 흐름에도 고유한 박자라는 것이 존재한다· 나는 그것을 세어 시간을 계산했다·
위험 지역에서도 벌써 하루가 지났다·
“흐음·”
워낙 많은 인원을 담은 마법진이었기에 전송이 곱지만은 않았다· 순간 이동 마법에 휩쓸린 모두가 뿔뿔이 흩어졌을 터다·
하지만 대표 세 명만큼은 내가 마지막까지 신경 써서 같은 장소로 묶어 전송했다· 그러니 우리 조는 나 혼자만 조금 떨어지게 된 형세다·
염려는 전혀 없다·
신호 생존 침착함· 세 가지 요소를 전부 가르쳤으니 세 명과는 지금부터 합류해도 충분하다·
다만 내가 하루 동안 움직이지 않았던 이유는 두 장의 지도에 온통 골몰해 있었기 때문이다·
“····”
환상 지도 고대 룬어 지도·
나는 두 장을 겹쳐놓은 다음 조용히 관찰했다·
각각의 지도는 전혀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였으나 막상 합쳐보니 또 하나의 새로운 지도가 되었다·
이것이 가리키는 위치 또한 베르켈의 위험 지역·
고대 룬어와 관련된 엄청난 무언가가 분명 이곳 베르켈의 위험 지역에 잠들어있는 것이다·
“과연 무엇일지·”
마침내 나는 발걸음을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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