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
“플란?”
루이스라고 불린 남학생은 잠시 기억을 되짚는 듯 했다·
쓸어넘기는 은발의 머리카락은 같은 남자가 보아도 퍽 매력적이다·
“아 그래·”
이내 기억이 났나보다· 그는 사람 좋아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한 손을 내밀었다·
“헤일리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어· 반갑다·”
타인과 접촉하는것을 반기지는 않지만 조용히 악수에 응해주었다·
그의 미소에서는 놀라울정도로 어떠한 악의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악수를 마치고 빠르게 자리를 뜨려는데 도리어 헤일리쪽에서 말을 붙였다·
“늘 들고다니던건 어디갔대?”
그런게 있나· 헤일리가 알아서 말을 잇는다·
“기초 마법서말이야·”
“버렸다만·”
그러자 헤일리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손으로 입을 가리는 행동이 영 좋게 보이진 않았다·
“결국 포기한거니? 그건 플란답지 않네~ 늘 끈기있는 모습 보여줬었는데·”
망설임없이 뒤돌아섰다·
일일이 응답해줄 이유와 여유 둘 다 없었다· 마법사는 마법으로 설명하고 증명하는 존재다·
“아 플란! 역시 여기 있었네!”
그런데 나를 찾는 학생이 하나 더 있었다·
상점 입구에서 내 이름을 크게 소리친 베키가 이쪽으로 도도도 뛰어온다·
“아··· 여기 있을 것 같더라· 다행이야 찾아서·”
지척까지 다가온 베키가 숨을 골랐다· 이마에 맺힌 땀을 겨우겨우 소매로 닦아낸다·
“무슨 일이지·”
“아 그게 아까 네가 이야기했던··· 어? 일행이 있었어? 미안·”
숨을 헐떡거리며 말을 잇던 베키의 눈동자에 당황이 어렸다·
베키는 루이스와 헤일리를 한 번씩 쳐다보더니 곧바로 자신의 옷 소매를 킁킁거렸다·
“아니다· 무슨 일이지·”
“아 그게· 아까 가르쳐줬던 회전률 말이야· 그거랑 관련해서 할 말이 조금 있어서···”
그런데 그 때 헤일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가르쳐줘?”
헤일리는 이해가 어렵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베키를 향해서 묻는다·
“누가 누구를 가르쳐줬다는거니?”
“으 응? 플란이· 나한테·”
“플란이 남에게 마법을 가르쳐줬다구?”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헤일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내 눈을 가늘게 뜨더니 베키를 위아래로 훑는다·
“누구야?”
헤일리가 나를 향해 물었지만 베키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나 베키·”
“나는 헤일리 루미안· 성은?”
“그냥··· 베키야·”
의기소침해진 베키가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았다·
헤일리가 베키를 훑는 시선은 아직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이내 베키의 손에 쥐어진 트리비아를 발견했다·
“어머 그거 플란이랑 똑같은 트리비아네·”
“플란이랑 똑같다고···? 내 트리비아가?”
베키의 시선이 내 손을 향했다·
“어··· 그러네·”
“몰랐니? 이상하네 플란은 왜 굳이 그걸 골랐을까·”
“나야 모르지·”
곤란하다는 듯 베키가 자신의 트리비아를 만지작 거렸다· 헤일리는 그런 베키를 대놓고 비웃었다·
“네가 모르면 안 될걸? 플로리안이 너랑 똑같은 걸로 산 이유가 뭐겠니· 어려운 이야기 아닌데 이거·”
나와 베키를 번갈아가면서 쳐다보던 헤일리는 잠시 후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뭐 끼리끼리 노는거지 둘이 잘 해보렴 어디·”
그 말을 끝으로 헤일리는 루이스와 함께 사라져버렸다·
베키는 당황스러운지 잠시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중요한게 생각났는지 내 쪽으로 휙 고개를 돌린다·
“맞다· 플란! 그 회전률 이야기 말이야···”
“알아서해라·”
“야 잠깐만···!”
베키를 뒤로하고서 떠났다· 개인 시간이 필요했으니·
◈
시간은 유수처럼 흘렀지만 플란은 여전히 집에 돌아갈 생각이 없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니군·’
플란은 저택에서 머물고있을 여기사 스칼렛을 떠올렸다· 동시에 미간을 좁혔다·
자신을 얽매려드는 공간에 머물 생각은 추호도 없다· 플란은 저택의 푹신한 침대를 버리고 기꺼이 차게 식은 공원 벤치를 택했다·
『 마법의 역사 』 『 마나의 태동 』· 마침 베개도 충분했다·
마법을 활용하여 주변 환경을 가꿀 순 있지만 굳이 그러지 않았다· 테스트 전까지 마력을 아껴둘 필요가 있었으니까·
애초에 그는 굶주림과 추위따위에 익숙하다· 그런 요소 따위에 꺾이지 않아 이전 세계는 그를 천재라 칭했다·
어둠만이 드리운 공원은 처량하지만 그의 주변 일대는 그렇지 못하다·
노숙이 행위 예술처럼 보이는 기이함· 달빛조차 그의 각진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즐겼다·
그가 막 양질의 수면을 취하려던 때·
“!”
갑자기 느껴지는 수상한 기척· 플란은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읏?!”
그러자 웬 가냘픈 비명이 이어졌다· 플란은 고개를 들어 기척의 정체를 살폈다·
엉덩방아를 찧었는지 웬 소녀가 제 엉덩이를 문지르고 있었다·
자신을 그대로 깔고 앉으려고 했다는건가· 플란은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깊은 시각이라도 달빛은 훤하다· 정상적인 사고를 한다면 플란을 못봤을 리 없을 텐데·
“뭐야아아~ 사람이야? 이상하네에~ 기척이 하나도 안 느껴졌는데···”
여인으로부터 훅 끼쳐오는 술냄새 그리고 비틀거리는 모양새· 풀려있는 눈동자·
그것을 느끼자마자 플란은 그녀가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것을 눈치챘다·
“왜 기척이 안 느껴지지이? 고수야? 막 기척을 숨길 수 있는 경지야아?!”
플란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고수는 그를 너무 낮게 평가하는 단어다·
혀를 차면서 잠자리를 옮기려는데 무언가가 졸졸 따라붙는다· 만취한 소녀였다·
벤치를 두 세번정도 더 옮겨도 마찬가지였다· 참다못해 플란이 입을 열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거지· 노숙자한테 무슨 볼 일이 있나·”
그러나 소녀는 검지를 쭉 펴서 플란의 손에 들린 『 마법의 역사 』를 가리켰다·
“···그거 마법의 역사잖아! 그쪽 마법사 아니야아?”
플란은 그제서야 상대방의 모습을 면밀히 살폈다·
어깨 살짝 밑까지 내려오는 하늘색의 머리카락 비스듬하게 정돈된 앞머리 남색 눈동자·
주정뱅이 치고는 유난히 고급지다· 미(美)에 민감한 그조차도 아름다운 외양이라고 느낄 정도였으니·
그녀가 검지를 플란 쪽으로 더 가깝게 들이밀었다·
“맞네에~! 마법사잖아아! 메르헨 아카데미 도서관 도서잖아아아!”
“그게 뭐 어쨌다는거지·”
“아고라 보드으으으으!”
그녀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플란은 오랜만에 사람을 때리고 싶었다·
“아고라 보드! 아고라 보드 말이야! 아고라 보드 알거 아니야아아!”
그녀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다· 흰 치마에 흙먼지가 잔뜩 달라붙었다·
속옷이 보일듯 민망한 각도라 플란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뭐가 문제지·”
“풀었어··· 누가 내 문제를 풀었다고오···”
플란은 내심 감탄했다· 이딴 주정뱅이가 아고라 보드의 출제자였다니·
한편 그녀는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푸는 걸로도 모자라서 완전히 농락을 했단 말이야아! 날 놀렸어!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내가 누군데!”
“······”
“가만히 안 둘거야· 절대로 가만히 안 둘거라고오! 흐아앙···”
펑펑 울기 시작한 소녀를 뒤로하고 플란은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 공원에서 자긴 글렀다·
◈
이윽고 테스트 시간이 찾아왔다·
결국 다른 공원을 찾아 쪽잠을 잔 플란은 늦지 않게 부채꼴 모양의 넓은 강의실에 착석했다·
졸리지만 하품은 참았다·
아무리 피곤해도 그렇지· 입을 벌리고 하품을 하는 것은 너무 격이 떨어진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졸음이 유일한 관심사인 그와는 다르게 강의실의 다른 모든 학생들은 공통된 주제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너 아고라 보드 봤어?”
“당연히 봤지!”
아고라 보드 아고라 보드 아고라 보드···
“트릭시가 낸 문제였다며 듣고 바로 납득했어· 그러고보면 왜 아무도 트릭시가 냈을거라고 생각을 못했지?”
“아고라보드에 지금 뭐라고 적혀있는지 봤어? 대박이야·”
여기서도 아고라보드 저기서도 아고라보드· 플란이 막 권태를 느끼려는 그때·
“야! 플란!”
누군가가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고개를 돌려보니 붉은 눈을 휘둥그레 뜬 베키가 있었다·
“회전율은 스스로 구해라·”
“아니! 회전율 이야기가 아니라! 이것좀 봐봐!”
베키가 옆에 척 붙어앉더니 트리비아를 펼친다·
여러가지 게시판이 있었지만 베키는 화제 게시판의 페이지를 찾았다·
그리고 말 그대로 불꽃처럼 타오르는 최상단의 게시글을 검지로 가리킨다·
[ 도발은 이름 밝히고 하지 그래· 지는 쪽은 엎드려서 사과하는 걸로 어때· 트릭시 폰 프리츠· ]
게시글 내용은 그게 전부였다· 플란은 별 생각도 없었다·
“이게 뭐지·”
베키가 플란과의 거리를 더더욱 좁힌다· 그의 귀에 입을 대고서 아주 작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현재 아고라 보드에 적혀있는 내용이야· 야 우리 익명으로 푼게 천만다행이야! 출제자가 트릭시였다고!”
“그게 누구지·”
“아니 너··· 트릭시를 몰라?”
베키는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이내 찾았다는 듯 플란의 팔을 바쁘게 두드렸다·
“야 야 플란· 저쪽 봐봐· 저쪽·”
플란이 베키의 시선을 쫓아 고개를 돌리자 굉장히 익숙한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바다를 담은 듯 푸른 머리카락 비스듬하게 정돈된 앞머리 진한 남색 눈동자·
플란은 그 소녀에게서 얼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숙이지 않을 듯 빳빳하게 쳐든 고개 자기확신이 가득한 태도·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어젯밤 공원의 그녀였다· 만취해서 주정부리던 그 여자·
“무슨 일이 있어도 트릭시한테는 밉보이면 안 돼···! 우리 아고라보드 문제 푼 건 무덤까지 안고 가자! 응?”
“대단한 녀석인가·”
플란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왜 밉보이면 안 되는거지· 아 주사를 부리니까?
“야 그걸 지금 말이라고해! 가문이 프리츠인데!”
베키가 한창 열을 올리기 시작했을때·
“다들 주목·”
갑자기 들려온 바이올렛 교수의 목소리와 함께 주변 풍경이 변모하기 시작했다·
부채꼴 형태의 강의실은 어느샌가 온데간데 없이 자취를 감춘다·
격류처럼 치밀어오르는 마나의 흐름· 새내기들의 시야가 일시에 하얘졌다·
“!”
다시 밝아진 시야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푸른 초원이었다·
바닥을 가득 메우는 푸른 잔디 푸른 하늘 이것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저 광활하다·
새내기들이 연달아 감탄사를 터뜨리는 와중에도 플란은 조용히 마법을 식별해낸다·
‘대형 환혹마법인가·’
여러명에게 거는 환혹은 쉽지 않지· 마음에 들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한 편 초원의 한복판에는 기다란 직사각형 책상을 두고서 바이올렛이 앉아있었다·
책상 옆에는 솥이 하나 놓여있었는데 아직은 용도를 알 수가 없었다·
바이올렛은 피로했는지 다크서클이 그새 조금 더 깊어져있었는데 눈을 길게 감았다 뜬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다들 모였겠죠·”
새내기들이 일제히 소리높여 대답했다·
“지금부터 테스트와 관련 없는 이야기를 하면 칼같이 감점할테니까 그렇게 아세요·”
다시 한 번 새내기들이 소리높여 대답했지만 바이올렛은 손을 휘적휘적 젓는다·
“소리내서 대답하지 마세요· 귀아프니까· 그냥 이해만 해·”
새내기들이 입을 헙 다물었다· 원래부터 대답을 안 하고 있었던 플란에게 있어서는 잘 된 일이었다·
바이올렛은 일어서더니 말을 잇는다·
“테스트· 오늘 테스트 봐야죠·”
그 말에 충격받는 새내기들은 별로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트리비아 덕분에 다들 나름의 준비를 마친 뒤였으니까·
하지만 아직 바이올렛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원래라면 가장 자신있는 마법을 시연해보라고 했을 텐데· 내가 너무 괘씸한걸 봐버려서 말이야·”
바이올렛이 종이 한 장을 염동으로 띄웠다·
“좀 기분 나쁜 제보를 받아서 말이죠· 바이올렛의 첫 테스트는 늘 같다는 이야기가 있다며·”
새내기들이 전부 헛숨을 삼켰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제보자의 멱살을 붙잡고싶었다·
“오늘 테스트는 다르게 진행할게요· 제가 마법 하나를 선보이면 여러분이 똑같이 따라해보는 식으로·”
학생들의 입이 떠억 벌어졌다· 사실상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진 셈이었다·
“선보인 마법을 따라하는 식이라고···?”
“얼마나 할 짓이 없으면 이딴걸 찔러?”
“···오늘부터 선배들을 향한 존경은 없다·”
한 명이 토로한 불만은 순식간에 엄청난 웅성거림으로 번져나갔다·
탁탁 소리가 나게 바이올렛이 손바닥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뭘 들은거에요· 쓸데없는 소리하면 감점이라니까·”
그녀가 턱을 괴고서 말을 잇는다·
“총 세 명의 교수가 지켜볼거에요· 내 기분대로 평가하는 일은 없으니까 안심하라고·”
바이올렛이 그렇게 말하자마자 오드리 옆에 의자가 두 개 더 생겨났다·
교수 두 명이 추가로 나타나더니 자연스레 착석한다·
한 명은 세련된 정장을 차려입은 오드리였고 다른 한 명은 표정에 심술이 가득한 남자 교수였다·
“순번은 제비뽑기로 정할게요· 나이가 몇 갠데··· 테스트 도중 잡담하는 녀석은 없겠지·”
바이올렛이 손가락을 튕기자 솥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이내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개구리 한 마리를 뱉는다·
손바닥에 떨어진 개구리를 바이올렛이 꽉 쥐자 녀석이 명함 한 장을 뱉는다·
다른 손으로는 명함을 쥔 바이올렛의 표정이 미묘하다·
지켜보던 학생들도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테스트 자체도 중요하지만 으레 이런 자리에서는 첫 순서가 누구인지도 중요한 법이다·
“첫 번째는 헤일리 루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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