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0
청운의 기사· 앨버트가 눈을 감았다 떴다·
‘여긴···?’
그는 달라진 주변의 풍경을 천천히 살폈다·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신전의 복도가 아니다· 끝도 없이 펼쳐진 얕은 수면의 모습·
수면과 하늘·
오로지 그 둘 뿐일 터인데 문제는 그 넓이가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아득하다는 점이었다· 끝을 가늠할 수 없는 광활함에 앨버트는 자꾸만 눈을 깜빡였다·
‘고유 결계라 하더라도···· 고작 환혹 아닌가?’
그렇다 하더라도 괜히 식은땀이 흐른다·
그는 환혹에 홀리지 않도록 매 순간 자신을 단련했다· 심지어 지금은 마인과 계약하여 힘도 얻은 상태다·
따라서 고유 결계 내부에 들어와 있다는 전제 자체가 이상하다·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자신은 더더욱 이상했다·
그러나·
‘이상하다·’
그의 검조차도 주인인 앨버트에게 주의할 것을 당부하고 있었다·
때로는 백 마디의 설명보다도 검으로부터 느껴지는 감각이 정확하다· 손잡이를 저도 모르게 꽉 쥐게 되고 이내 고유 능력을 끌어올린다·
‘플란 마법 학부의 1학년·’
시기상으로 접근했을 때· 플란이 아카데미에 입학한 지는 아직 1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
토벌제의 경험이 처음인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위험 지역에 발을 딛는 것 목숨을 건 실전을 치르는 것 전부가 처음일 것이다·
‘그런데 왜····’
앨버트의 고유 능력· 약자도태·
서로 간의 기량 차이가 심할수록 앨버트는 더더욱 큰 힘을 얻는다· 이 단순한 고유 능력이 현재 플란을 상대로는 발동되지 않는다·
“···약자 도태가 안 통해·”
앨버트가 기사들에게만 들리게끔 조용히 중얼거렸다· 진지하게 꺼낸 이야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반응은 단순했다·
키안이 짐짓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상에 있던 일입니다· 플란을 상대로 방심해서는 안 돼요·”
“약자 도태가 발동이 안 된다고? 넌 마인이랑 계약이라도 해서 다행이다 임마·”
다른 기사도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앨버트의 어깨를 툭 쳐서 안심시켜주었다·
앨버트는 자꾸만 말라가는 입술을 핥았다·
사실 그가 동료들에게 진정으로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자신이 플란보다 약하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플란보다 약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다들 대열만 지켜주세요· 처음부터 제가 나서서 상대할 테니까요·”
키안이 생긋 웃더니 앞으로 나아간다·
앨버트는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몸으로 느끼는 감각을 정확히 말로 표현할 수 없었으니까·
발을 내디뎌도 얕은 수면에서는 어떠한 소리도 나지 않는다·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이 기이한 결계 속에서 먼저 침묵을 깬 건 키안이었다·
“콜할지 다이를 할지 고르라고 했죠?”
플란은 아무런 대답 없이 다가올 뿐이다·
키안은 여유롭게 다음 말을 이었다·
“굳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면 저는 레이즈·”
플란은 아직도 아무 말이 없다· 키안의 말을 듣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레이즈할게요· 자신이 있다면 판을 키우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러는 사이 둘의 거리는 무척이나 가까워졌다· 플란이 그제야 멈추어 서서 입을 열었다·
“패 공개는 아직인가·”
“으음?”
“말만 많은 걸 보니 잡패를 쥔 모양이군·”
그 말에 지금껏 빙글거리던 키안의 얼굴이 한층 진지해졌다· 기사는 조용히 검을 고쳐 쥔다·
“···뭘 그렇게 서두르시나·”
여유로운 체 했지만 키안은 기분이 나빴다·
그는 도박의 세계가 냉정하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중간에 참여자들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 따위는 크게 중요하지 못하다· 자신의 패가 상대보다 강해서 이기면 그만이고 여유로운 자는 자연스레 말을 아끼게 되는 법이다·
문득 도박장에서의 자신을 떠올린다·
키안은 숱하게 많은 허세와 속임수를 마주했었고 그럴 때마다 자신의 강한 패를 보며 속으로 코웃음 쳤었다·
그러나 방금 본인이 괜히 말을 던지지 않았나·
잡패를 쥐어 허세에 의존해야 하는 사람처럼·
“····”
키안이 검을 고쳐쥐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한 점은 하나 더 있었다·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잖아·’
원래라면 기사가 마법사를 쫓아야 옳다· 지금처럼 마법사가 가까이 다가오는 상황이라면 오히려 여유를 가지고 비웃어야 맞지 않나·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는 자신이 쉽게 이해되질 않고 한심하다· 마치 도박장에 처음 방문했던 그날의 자신처럼 말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
키안은 조용히 고유능력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플란이 사정거리 내부에 진입한 순간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양날 검이 육안으로 쫓기 힘든 속도로 플란의 목을 가로로 베어내려 시도한다·
팅!
그러나 키안의 팔은 제자리였다· 플란이 그렇게 되도록 튕겨낸 것이다·
키안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좋아요· 우선 원 페어·”
아직은 여유가 있다· 아니 오히려 벌써 당해주면 아쉽고 섭섭하게 느껴질 정도다·
키안의 고유능력은 연격(連擊)·
전투에서 검을 여러 번 휘두를수록 그 위력이 무지막지하게 더해지는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능력이다·
동시에 키안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능력이기도 했다· 포커에서 점점 좋은 카드를 뽑아 상위의 족보로 향하는 듯하였으니 말이다·
그러니 재미를 보는 것은 지금부터다· 상대가 누구든간에 장기전에서 키안을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키안이 ‘연격’의 힘을 받아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강직한 내려치기·
‘투 페어·’
휘잉!
하지만 이번에는 아예 빗나갔다· 손에 심심한 감각이 되돌아오자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얕은 수면에 발을 디뎌도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찰박이는 감각도 없다· 하늘과 지면의 경계와 색이 모호하다·
···마치 꿈에서 허우적대며 전투하는 것 같다·
“으음·”
키안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상대방의 의도한 공간에 잡아먹히다니 결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지금부터는 본격적으로 해볼까요!”
키안이 크게 외치며 달려들었다·
그의 검이 화려하게 허공을 수놓았다· 포커 카드의 문양들을 검 끝으로 정교하게 그려내며 오로지 상대방의 숨통을 끊기 위해 검을 휘두른다·
쾅! 콰앙!
그러나 모조리 튕겨 나간다·
트리플 스트레이트 백스트레이트···· 이어지는 연격 전부가 플란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허공에서 눈을 마주쳤을 때·
플란은 너의 패는 잡패라고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키안이 이를 악물었다·
“여유를 부리다니···!”
키안은 부지런히 검을 휘둘러 연격의 상승세를 받아냈다·
어차피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강해지는 것은 자신이다· 바꾸어 말해 키안은 승부가 1분 1초씩 길어지는 지금도 유리해지고 있다·
하지만·
‘왜?’
유리해진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흐읍─!”
연격과 마인의 조화· 검이 새까만 기운을 잔뜩 머금고서 공간을 가른다· 연격의 단계를 몇 단계나 건너뛴 최강의 일격이었다·
기운에 뒤덮인 검은 평소보다 몇 배는 길어보였다· 그것이 플란을 통째로 뭉개버릴 것 같았던 그 때·
플란의 말이 한 박자 빠르게 귓전을 때렸다·
“오늘 청운이 해체되는 이유는·”
우뚝·
다음 순간 키안의 팔이 정지했다·
서서히 감속하는 전조조차 없이 그냥 어느 순간 그의 팔은 그저 과정에 머물러 있었다·
“마인과 계약해서가 아니다·”
키안은 아직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팔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 순간 불안한 기운이 머릿속을 엄습했다·
플란은 자신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뱉는다· 전투보다도 이러한 사실을 들려주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듯 말이다·
“마법사의 가능성을 무시했기 때문이야·”
그 말을 똑똑히 들은 순간·
“으···?”
갑자기 시야가 두 개로 나누어진다·
안구가 측면에 붙어있는 조류처럼 갑자기 시야각이 넓어진 듯했다· 좌측과 우측에서 키안에게 전혀 다른 시야를 전달해온다·
그것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얕은 수면을 향해 가라앉는다·
‘환혹? 아니····’
잠시 후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세로로 정확히 반이 갈라져 있는 인간의 육체였다·
반으로 갈라진 키안의 몸이 쓰러진 채로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도대체 어느 틈에·’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플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수면을 밟은 순간 이미 늦었다·”
생애 마지막 호기심을 해결한 키안의 의식이 마침내 소멸하였다·
반으로 갈라진 키안의 몸으로부터 검은 피가 흘러나온다· 동시에 고유 결계가 해제되면서 익숙한 신전 복도의 모습이 다시 드러난다·
플란이 시선을 남은 세 기사에게 던졌다·
“오래 기다리게 했다·”
고작 한마디를 하면서·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