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1
복도에 남은 것은 정적뿐이다·
“····”
앨버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키안이 청운의 단장으로 설 수 있었던 이유는 명료하다· 이견 없는 강함을 지녔으며 늘 여유를 가지고 전략을 구사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앞에 놓인 것이 현실이었다·
키안의 몸은 반으로 절삭되어 있었고 플란에게 유효타 한 번 입히지 못한 채로 사망했다·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펴보았다·
여전히 몸 안에서는 마인의 시커먼 힘이 흐르는 중이다· 그렇기에 눈으로 직접 보고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다음 계획이 필요한데····”
앨버트가 중얼거렸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훌륭한 전략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 자신의 머리로는 도무지 세울 수가 없다·
바닥에는 여전히 키안의 사체가 놓여있다· 더 이상 동료라고 부를 수 없는 그 몰골은 존재 자체가 하나의 경고이자 위협으로 다가온다·
‘정신 차려야 돼·’
아카데미에 입학한 지 얼마나 지났고 학년이 어떻고 실전 경험은 어떠하며···· 그따위 것들을 따지는 건 이제 그만두기로 했다·
눈앞의 마법사는 강하다·
적을 상대로 물러서지 않으며 마인을 꺼리지도 않는다· 적이 한 때 인간이었다는 이유로 동정심을 품어주는 일 역시 없었다·
앨버트가 이마에 맺힌 땀을 훑어내던 그때·
─애를 먹고 있구나· 추하게·
“···!”
그들과 계약을 맺은 장본인· 마녀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를 비단 앨버트만 들은 것은 아니었는지 다른 기사들도 한 손으로 귀를 붙잡고 그 목소리에 정신을 집중했다·
─도와달라고 싹싹 빌어보렴·
동시에 기사들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그들 중 한 명이 빠르게 되물었다·
“빌라고? 그것도 싹싹?”
─그럼 내가 도와줄지도 모르잖니? 싫으면 관둬 어차피 너희들의 영혼은 내게 있으니까·
“그게 무슨! 처음에는 분명 상호를 존중하는 계약 형식이라고 말했으면서!”
─상황이 달라졌잖아· 인간아·
마녀의 목소리는 그 뒤로 들려오지 않았다· 다시 한번 복도에 내려앉은 정적· 그것을 가장 먼저 깬 것은 앨버트였다·
그가 결단을 내린 표정으로 말했다·
“비는 수밖에 없겠어·”
다른 기사 두 명이 눈을 부릅뜨고 앨버트를 바라보았다· 그중 덩치가 큰 기사가 묻는다·
“싹싹 빌자고? 도와달라면서?”
“기사도나 자존심 같은 건 계약하는 순간 이미 버렸던 거야· 정신 차려· 일단은 살아남는 것만 생각해야 돼·”
기사도· 자존심·
그런 건 계약을 하는 순간 이미 버린 거나 다름없다· 이미 다른 이들의 시선에 그들은 ‘부정행위자’일 뿐이며 이제 와 챙긴다고 해서 챙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키안이라면 분명 이렇게 말했을 거야·”
앨버트가 진중한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일단 살아남는 것만 생각하고 얻는 것만 생각하고 목격자는 전부 없애버리라고· 여유와 미덕 같은 건 나중에 챙겨도 늦지 않다고·”
기사들이 차분하게 시선을 교환했다·
앨버트는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키안이 내뱉었을 거라며 내놓은 추측도 일리가 있다·
한 명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살아남는 것만 생각하자는 거지?”
생각해보면 현재 목숨 이외에 다른 것까지 고려하는 것은 너무나도 배가 부른 행위였다·
키안은 플란에게 검 끝 한 번 대어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이런 적수를 마주친 상황에서는 목숨만 건져도 호황 아니겠는가·
결국 모두가 동의했다·
“빌자·”
“어쩔 수 없어·”
목숨만 어떻게든 건져보자고 모두가 결단을 내린 순간· 해야 할 행동은 정해져 있었다·
“도 도와주세요!”
“제발 도와주십시오!”
말을 더듬는 것은 처음뿐이다· 이내 그들은 진심을 담아 목숨을 구걸하기 시작했다·
─후후후후후····
잠시 후 마녀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복도가 시커멓게 물들기 시작했다·
◈
“차라리 내게 구걸했더라면 나았을 터인데·”
허공을 향해 간절하게 비는 적들의 행태를 보며 내가 첫 번째로 내뱉은 감상이란 이렇다·
딱히 놀랍지도 않다·
이러한 광경을 너무나도 많이 보았다· 노력 없는 힘에 심취하여 모든 걸 내려놓는 이들은 시대와 직업을 불문하고 존재했으니 말이다·
“너희들도 잘 봐두어라·”
나는 뒤에서 숨죽인 채로 나를 지켜보는 세 명을 향해 말했다· 이들도 이러한 광경을 확실하게 보아둘 필요성이 있었다·
세 명은 앞으로도 숱하게 많은 전투를 치르게 될 테고 높이 올라서기 전까지는 멋진 적보다 추한 적을 훨씬 더 마주하게 될 테니 말이다·
“노력 없이 얻는 힘이 얼마나 추한 것인지·”
중요한 것은 하나·
저들을 보면서 반면교사 삼는 것· 유혹에 휘둘리지 않은 채로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걷는 것이다·
─스으으으·
복도에 어둠이 물감처럼 번져나간다·
완전히 암전되었던 시야가 다시 밝아졌을 때 복도에 서 있는 것은 비단 우리만이 아니었다·
하나 둘 셋····
이내 숫자를 세는 것을 그만두었다· 인간의 형태로 빚어진 그림자들이 복도를 빼곡하게 메우고 있었다·
“힘···· 힘이 느껴진다···!”
앨버트가 기쁨에 겨워하며 자신의 힘을 만끽했다· 현재 기사들의 몸은 눈을 제외하고 전부 칠흑 같은 그림자에 뒤덮여있는 상태다·
녀석이 세 배는 길어진 듯한 그림자 검을 내게 겨누며 외쳤다·
“지금이라면 지금이라면 이길 수 있어!”
“누구에게 목숨을 구걸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기도는 닿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차게 일갈했다·
“아니 충분히 닿았다!”
그렇게 중얼거리는 앨버트의 목소리에는 어느샌가 자신감이 섞여 있었다· 나는 천천히 상대방의 강함을 헤아려 나갔다·
‘계약자의 분신?’
대충 만들어냈다기에는 그림자 하나하나의 움직임 사소한 습관까지 제각기 전부 다르다·
그동안 계약을 거쳐 갔던 이들을 그림자의 형태로 빚어냈다는 뜻일 터·
나는 왼 손목의 토벌제 전용 팔찌를 확인했다· 반응이 있는 것을 보아하니 아마 점수도 획득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갑작스러운 힘이 주체가 되질 않았는지 앨버트가 비틀거리면서 중얼거렸다·
“누구···· 누구든 싸우자· 이 힘을 확인하게 해줘···!”
나는 차분하게 마나를 갈무리했다·
키안을 상대로 고유 결계를 사용했던 여파가 이제서야 드러나기 시작했다· 관자놀이에 옅은 통증이 느껴진다·
그 부위를 조용히 손가락으로 짚은 그때·
“옆의 그림자들은 내가 맡을게·”
조그만 무언가가 내 옆에 섰다·
고개를 돌려 내려다보니 베키가 서 있었다·
손에는 벌써부터 얼음 결정들이 붙어있다· 본격적으로 전투를 준비할 셈인듯 했다·
“····”
나는 어이가 없어서 베키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혼자서 전투하는 것이 객관적으로 옳다· 서로의 마법이 뒤섞이기 시작하면 불협화음이 될 위험성이 크므로·
“몸은 좀 괜찮아?”
베키가 검지 손가락을 펴서 제 관자놀이를 두어번 두드렸다· 이내 내 시선을 피한다·
“···아니 신경쓰여서· 몸 안 좋다고 했잖아·”
“베키 혼자서는 조금 힘들 것 같은데?”
이 목소리의 주인은 루이스였다· 동시에 내구도를 지닌 빛의 장막이 우리의 몸을 휘감는다·
그는 내 오른편에 섰다·
“나도 거들게·”
“정말? 그럼 남은 건····”
베키와 루이스의 시선이 트릭시에게로 향했다· 당사자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중얼거린다·
“괜히 너 때문에 참여하기 싫어지잖아·”
“에휴· 그래그래·”
베키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옅게 웃었다·
나는 세 명을 한 번씩 쳐다보고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손가락을 튕겨 그들을 뒤로 밀어냈다·
그러나·
“읏·”
“으아!”
허공에서 무형의 폭발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뒤로 밀려나는 이가 없었다· 다들 자신들의 원소를 활용해서 버텨낸 탓이다·
베키는 아예 발을 얼려 붙여가면서까지 지면에서 버티고 있었다·
나는 미간을 좁히고서 입을 열었다·
“나대지 마라·”
“나대는 거 아니야!”
베키가 말대꾸했다·
“애초에 저 녀석들은 우리 목숨도 노리는 거잖아· 그러니까 이건 나대는 거 아니야· 자기 목숨을 자기가 챙기는 거지·”
“맞아 플란· 우리 적당히만 나댈게·”
옆에서는 루이스가 베키의 말을 거들었고 나는 조용히 그들의 눈동자를 살폈다·
말에 자꾸만 토를 다는 그 하찮고 우스운 짓이 어쩐지 싫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적들은 강하다·’
전투를 허용하면 나름대로 성장하기야 하겠지만 세 명 역시 부상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나의 과소평가인가·’
결국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대신 목숨을 스스로 챙긴다는 말은 지키도록·”
“응···?”
두 박자 늦게 베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허락을 받아낸 직후 세 명의 표정이 밝아졌다· 스스로 험지에 들어가기를 자처하면서 기뻐하는 꼴이 어쩐지 이상하다·
전투적인 상황만 놓고 보면 오히려 불리해진 상황이다· 그런데도 내 기분이 어떠한지 스스로조차 확답할 수 없었다·
루이스가 빙긋 웃었다·
“오히려 우리 쪽에서 먼저 가볼까?”
나머지 두 명은 망설임 없이 대답을 내뱉는다·
“좋네 그거!”
“굳이 말 안 해도 그럴 생각이었어·”
그들의 마나가 마법으로 피어나는 순간·
그림자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녀석들이 동시에 부채처럼 펼쳐지더니 사방에서 일제히 우리를 덮쳤다·
이윽고 복도 안에서 다양한 마법들이 휘몰아친다· 전투의 강렬한 여파에 복도의 이곳저곳이 순식간에 무너진다·
기세는 예상대로 적이 더 강하다· 자신감 있게 나선 것 치고 세 명은 눈에 띄게 열세였다·
그러나·
그런데도·
그 모습이 한심하게 느껴지지만은 않는다·
그때 불현듯 들려오는 제자의 목소리·
“어후 패가 너무 좋으시다· 저는 다이!”
고개를 돌려보니 웬 환상이 보였다· 제자 녀석이 작은 테이블에 앉아서 홀로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중이다·
녀석이 나를 쳐다보더니 활짝 웃는다·
“스승님~ 저 그런데 궁금한 게 있거든요·”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녀는 테이블 위로 네 장을 착 소리가 나게 내려둔다·
“스승님꺼 패 말이에요· 족보 이름이 뭐에요?”
네 명의 카드에는 각각 나 베키 트릭시 루이스의 얼굴이 그려져있는 채다·
“····”
한 차례 눈을 감았다 뜨니 그녀의 모습도 목소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고작 환상에 불과한 무언가였으니까·
이렇듯 나는 가끔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방금 들었던 질문에 대답을 해야만한다면 그것 역시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니다·
“메르헨·”
짧은 대답을 끝으로 나는 마나를 끌어올렸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안녕하세요 zakuti님·
최근 속도감이 늘어져서 오늘 연참으로써 매듭지었습니다·
내일부터는 속도감이 훨씬 빠른 한 편들로 찾아뵙겠습니다·
늘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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