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2
마법의 충돌· 강렬한 기운이 무수히 범람하는 전장 속에서 어느 쪽이 우위인지는 명확했다·
그림자들이 우위였고 마법사들은 고전했다·
굳이 어렵게 접근할 필요도 없다· 그저 가만히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인지가 되는 것이다·
“잘 보이지? 엘라·”
질투 마녀가 날카로운 손톱 끝으로 수정구를 두어번 두드린다· 그녀는 현재 어느 칠흑 같은 공간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다·
엘라는 옆에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이제는 앞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질투 마녀로부터 받은 ‘그림자 안구’ 덕택이다·
또한 엘라는 이 질투 마녀의 이름이 이스마엘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직접 내 그림자들을 보니 어때?”
그것은 한없이 우아해질 수도 있었고 또 한없이 기괴하기도 했다· 엘라는 자유자재로 뒤바뀌는 그 형태를 묘사할 방법조차 찾지 못했다·
“생생해·”
결국 고작 세 글자를 뱉는 것이 전부였다·
“생생할 수밖에· 영혼이 담겨있으니까·”
“영혼?”
“그래· 형태 없이 보관되었던 영혼 위에 그림자를 덮어씌워서 내 마음대로 조종하는 거야·”
정교한 그림자 군단의 원리는 단순하다·
실제로 한 때 육체를 지니고 존재했던 영혼을 이번에는 그림자에 가두어 조종하는 것이다·
“어때· 보고 나니까 더 기대되지?”
이스마엘의 눈동자가 한 층 더 깊어진다·
“물건이 내 손에 들어오게되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더 대단해질 거야· 그게 얼마나···· 얼마나 멋진 일인 줄 알아?”
“으음·”
엘라는 이스마엘을 따라다니면서 ‘고대 룬어 보물’에 관한 정보를 얼추 짐작하게 되었다·
우선 그건 엄청난 동력원이다·
아카데미에 마탑을 하나 새로 세울 수 있을 정도라는데 엘라는 그게 어느 정도의 힘인지 아직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엘라는 가만히 수정구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림자들의 대단함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해· 하지만·”
천천히 대답하며 새까만 눈을 굴린다· 서서히 움직인 안구가 향하는 대상은 플란·
“아직 플란이 나서지 않았어·”
“흐흥· 플란이 신경 쓰이는구나?”
두 여인은 수정구를 통해 사내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가만히 서 있는 플란의 모습이 나타내는 것은 너무나도 명확했다·
“이스마엘· 너는 신경이 안 쓰여?”
그런데도 엘라는 친절하게 입을 열어 되물었다·
“플란은 오히려 이 상황을 이용하고 있잖아· 나머지 세 마법사를 훈련시키기 위해서·”
처음에는 조금 헷갈렸지만 이리 집중하여 보니 명확하다· 플란은 적당하게 전황을 조절하여 세 대표를 훈련하는 중이었다·
“네 그림자를 가지고 노는 거나 다름없다고·”
힘을 조금 더 사용하거나 일말의 분노라도 느낄 줄 알았건만 이스마엘은 그저 웃을 뿐이다·
인간이 도저히 낼 수 없는 웃음소리 그것을 듣는 순간 엘라의 몸속에는 혹한이 스며든다·
“즐기고 있다면 더 즐기게 놔둬· 성장하고 있다면 더 성장하게 놔두고·”
이스마엘은 그리 읊조리며 수정구를 매만졌다·
“상대방이 강하면 강할수록 우리가 느끼는 즐거움도 훨씬 배가 될 테니까·”
“써버린 영혼과 그림자가 아깝잖아·”
“전혀?”
마녀가 고개를 돌려 엘라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청운에는 미안하지만 애초에 이건 너를 위한 전투야· 쓰러진 영혼과 그림자는 전부 너의 양분으로 쓰일 거거든·”
“····”
흡수의 저주·
자신이 지닌 힘을 떠올리며 엘라는 잠시 감상에 젖는다· 베르켈에 입성한 이래로 흡수했던 수많은 것들을 떠올린다·
흡수만 할 수 있다면 인간과 마수를 가리지 않았다· 엘라는 생애에 있어 가장 큰 힘을 지닌 순간이 바로 지금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를 보면 심경이 복잡하다· 이길 수 있겠노라고 스스로 확답을 내뱉을 수가 없다·
이것이 학습된 공포에서 비롯된 것인지 실제로 그러한 것인지조차 분간할 수가 없다·
“엘라~ 아직도 플란이 두려운 모양이지?”
엘라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는 다시 수정구를 바라보았다·
플란이 지시를 내리며 다른 마법사들을 보조하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전황이 뒤집어졌다·
화르르륵─!
트릭시의 푸른 화염이 부르짖는다· 파도처럼 휘몰아치는 마력은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그림자들을 일제히 뒤덮는다·
카가가각─!
이어서 공간을 고요하게 만드는 발현· 베키의 얼음이 복도를 얼어붙게 만들고 다음 순간 모조리 부서진다·
얼어붙은 이들을 향해서는 루이스의 빛살이 쇄도한다· 날카롭고 얇은 다발의 직선은 오로지 그림자의 급소만을 꿰뚫는다·
···짧은 사이 이들은 벌써 호흡을 맞추어간다·
“봤어?”
이스마엘이 눈을 빛내면서 물었다· 엘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성장이 빠르네· 무슨 흡수의 저주 같아····”
“바로 그 점이 너무 재미있는 거야· 성장하는 쪽도 성장시키는 쪽도 너무 탐이 나는데····”
이 전부를 오로지 나만을 위한 그림자로 만들고 싶노라고 이스마엘의 마음속에서는 칠흑처럼 검은 욕망이 피어오른다·
“···그 전에 딱 하나만 실험해볼까?”
이스마엘이 수정구에 검은 기운을 불어넣었다·
동시에 몇몇 그림자들의 행동이 멈추었다·
마법 학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상황을 살핀다·
하지만 사실 그림자들은 멈춘 것이 아니다· 배를 꿀렁이며 다음을 준비할 뿐이다·
─이거···· 폭발하려는 것 같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을 때는 늦었다·
그림자 몇 개가 통째로 폭발했다· 그것이 시야를 온통 뒤덮어 전장은 보이지도 않는다·
“이건 겨우 공포탄인데~”
이스마엘이 키득거렸다·
전투는 다시 끈질기게 이어진다·
시야가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림자들이 마법사들을 향해 달려들고 몸을 베고····
그러던 어느 순간·
검은 안개와 폭발의 잔향이 일시에 소멸했다· 과정을 관측하지 못했을 정도이니 소멸했다는 말로 표현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누군가가 앞서 걷기 시작했다·
전장에서 몸을 움직이는 것은 흔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여유를 가지고 걷는다면 그건 결코 흔하지 않다·
기감이 예민한 몇몇 그림자들이 행동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림자가 또 언제 폭발할지 알 수 없다·
폭발의 위력은 인간의 목숨을 너무나도 쉽게 앗아갈 정도라 다른 마법사들은 최대한 거리를 벌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림자를 향해 다가가는 유일한 사내의 모습은 눈에 너무나도 띄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세 마법사의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커다래졌다·
─가까이 가면 안 돼!
누군가가 경악하며 위험하다고 외친다·
플란·
그는 별다른 무장도 없이 허공에 띄워둔 종이에 무언가를 메모하며 천천히 걷는다·
─플란!
뒤에서 크게 외쳐도 걸음이 멈추는 일은 없다· 신전의 복도에서 그 누구보다도 태연하다·
─우리 우리도 뭔가 해야지!
─쫓아가자!
세 명은 뒤늦게 플란에게 따라붙으려 했다· 그러나 플란은 조용히 손을 들어 제지할 뿐이다·
“재미있게 나오네· 그럼 이쪽에서도····”
이스마엘이 수정구에 검은 기운을 불어넣었다· 이번에는 모든 그림자가 크게 꿀렁인다·
그런데 그때·
“···?”
이스마엘이 눈썹을 흠칫 떨었다·
고개를 들어 올린 플란이 수정구 너머에 있는 이스마엘과 시선을 마주한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
그녀는 현재 어떠한 흔적도 없이 전장을 관찰하는 중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몸을 조금 움직여보았다·
플란의 눈동자가 가만히 그녀를 뒤쫓는다·
그는 확실히 이스마엘을 보고있었다·
“···!”
등허리를 타고 소름이 올라온다· 지금껏 누구를 관찰한 적은 있었어도 역으로 관찰당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동시에 플란에게로 많은 양의 마나가 몰려든다·
엘라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흡수···?”
밤의 정령 헤라는 어두운 공간에서 힘을 받아들이고 동시에 그것을 연료로 치환한다·
어둡기 짝이 없는 신전 복도에서 그는 오히려 본인의 총량을 초월하게 되는 것이다·
쿠구구구구·
아직 흡수되지 못한 기운들이 용솟음치고 복도를 아예 통째로 뒤흔든다·
쿵─! 쿠웅─!
지하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돌아다니기라도 하는 것처럼 지면은 격하게 덜컥거렸다·
플란은 기운을 온전히 갈무리했다· 그의 등 뒤로는 거대한 마법진이 생겨난다·
플란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스마엘은 조용히 그 입모양을 읽었다·
─네가 어디에 있건 중요하지 않다·
마침내 푸른 빛이 주변을 환하게 밝힌다·
여전히 이스마엘을 응시하며 그는 읊조렸다·
─···지금부터는 네 미래를 보아라·
복도를 뒤흔들던 울림이 멎고·
다음 순간·
마법진으로부터 푸른 광선이 수없이 쏘아졌다·
소리가 나지 않는다· 속력을 가늠할 수도 없다·
공간과 시간 모든 것이 고정된 듯 그림자들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몸을 꿰뚫렸다·
자폭조차 허용하지 않는 일격·
그 광선은 눈을 녹이듯 그림자들을 녹이고 심지어 그것을 지켜보던 이스마엘의 수정구마저도····
카각─!
금이 가게 만들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스마엘은 황급히 수정구를 차단했다· 생각을 거치지 않은 거의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그녀가 이해할 수 없다는 일이 있다는 것도 처음으로 관측한 플란의 모습도 의문투성이었지만 일단은 그렇게 해야만 했다·
파칭─!
그러나 결국 수정구는 부서져내렸다·
“····”
마녀의 이마에서 땀방울 하나가 흘러내렸다·
이스마엘과 엘라에게 남은 것·
그건 정적과 어둠뿐이었다·
◈
베르켈의 중심부·
잔불의 기사 스칼렛은 사룡의 거대한 몸체에 기대어 서 있다· 그저 생각에 잠겨서 무료함을 달래는 중이다·
닿는 것을 전부 극독으로 녹여버리는 사룡에게 접근한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지만 ‘검성’의 후계자로 손꼽히는 스칼렛에게 이 정도는 너무나도 쉽고 당연하다·
그러나 신경 쓰이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 샌가부터 위험지역에서 플란의 기운이 자꾸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건방지게 이리저리 날뛰고 다니는군·”
스칼렛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녀석은 강하고 또 치밀하다· 건방지다고 표현할 것까지는 없어보이는구나·”
사룡이 스칼렛의 혼잣말을 이어받자 그녀 신경질적으로 사룡의 두개골을 노려보았다·
“입 다물어라· 으깨버리기 전에·”
스칼렛의 경고에도 사룡은 말을 멈추지 않는다·
“잔불의 기사여 그를 어째서 증오하느냐·”
“네가 우선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유디트 가문에는 자랑과 수치가 각각 하나씩 있다·”
“자랑은 너일 테지· 허면 수치는 누구인가·”
“저놈이지· 뭐 물을 것도 없잖냐·”
짧은 대답을 하면서도 스칼렛은 표정을 구겼다· 결코 엮이고 싶지 않은 녀석이 기어코 위험지역까지 기어 왔다·
기사는 그날 플란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마법사 가문이 되어있을지도 모르지·
“사룡· 네가 보기엔 어떠냐·”
말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스칼렛은 자기 생각을 읊었다· 원래 불확실한 일일수록 더욱 떠들고 싶어지는 법이었으니·
“저놈이 너를 쓰러트릴 정도도 되는가·”
“나를?”
“그래·”
그러자 사룡이 작게 턱을 달그락거렸다· 웃은 것이다·
“···그것이 내심 궁금했단 말이더냐·”
그러나 스칼렛에게는 대답을 들을 틈이 없었다·
“····”
무거운 적막 속에서 대답을 기다리던 스칼렛은 어느 순간 검을 들어올려 저 멀리를 겨누었다·
가볍게 한 차례 휘두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콰아아아아─!
천지를 뒤흔드는 충격·
검 안에서 공명하는 ‘잔불’의 고유 능력· 그 순간 붉게 물드는 세상· 반월형의 화염이 정면으로 뻗어 몸에 닿는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화아아아아····
위험지역 전역을 통째로 길게 가로지르는 스칼렛의 화염·
고요해진 세상은 무언가 불타는 소리 뿐이다·
“···빗나갔나·”
스칼렛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사룡 역시 그 화염의 끝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었는지를 알아차렸다·
“상급 마인의 기운인가·”
“그래· 그림자를 다루는 마녀인 것 같은데·”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결국 공격은 빗나갔다· 대상은 이미 빠르게 자리를 피해버린 듯 했다·
그렇다고해서 괄시하고 방치할 수는 없다· 마인이라는 족속은 가만히 놔두면 인간의 약한 마음에 파고들어 회유를 하려 들기에·
“잠시 다녀와야겠다·”
스칼렛은 그 말을 끝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일직선으로 쭉 뻗은 대지는 온통 그을려있다·
무언가가 빼곡했던 지형을 붉은 검기가 싸그리 밀어버린 일직선의 궤적· 스칼렛은 가만히 그 위를 걷는다·
“기사여····”
홀로 남은 사룡은 턱을 달그락거리며 웃었다·
그는 스칼렛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으나 이번만큼은 동의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감은 이번에 틀리지 않았으리라·
“이곳에 너와 같은 핏줄은 누구도 없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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