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3
다음 날 아침·
“아주 난리입니다·”
유시아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말 그대로 난장판이었다·
무슨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 유시아의 집무 책상 위는 온통 종이 문서들로 뒤덮여있었다·
“제 예상이 맞았을 줄이야····”
황금빛 눈동자를 유시아가 두어번 깜빡거린다· 그녀의 흰 머리칼은 현재 아무렇게나 풀어 헤쳐져 있었다·
[ 스칼렛은 유디트의 인물이 아니다· ]
잔불의 기사 스칼렛 유디트·
그녀는 유디트의 이름을 붙이고 있지만 몸 안에 유디트의 피가 흐르지는 않는다·
그 간단한 사실에 유시아는 새벽 내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해했는데 이해하지 못했다· 뭔가 계속 그러한 기분이다·
“어찌 보면 다행인 걸까요····”
유시아는 플란을 똑 닮은 야광 인형을 양손으로 쥐었다· 그것을 조심스레 위로 들어 올린다·
그녀는 과거를 되짚는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던 그때가 아직 생생하다· 눈조차 뜰 수 없던 절명의 위기에서 세상을 뒤덮은 것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화륵!
그때 붉은 화염이 유시아를 구해냈다· 그녀 스스로조차 살기를 포기했지만 화염은 그녀가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화륵!
그녀를 위협하는 온갖 마수를 도륙 내고 마침내 유시아가 눈을 뜰 수 있을 때까지·
─화륵!
아무리 어둡더라도 한 줄기의 빛만 있다면 다시 살아갈 수 있겠노라고 깨달을 때까지·
그는 유시아를 구해냈으니까·
···그것을 결코 잊을 수가 없으니까·
유시아는 조용히 야광 인형을 끌어안았다·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한다는 것·
유시아는 지금도 그것이 너무나도 좋다·
“···역시 그건 그대의 불꽃이었습니다·”
소녀는 눈을 감고서 속삭이듯 말했다·
오직 단 한 명의 사내를 떠올리며·
◈
메르헨 아카데미의 공동 회의실·
이곳은 현재 각 학부의 높은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잔뜩 자리하고 있어 발을 디딜 틈조차 없다·
또한 소란스럽다는 것은 굳이 두 번 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었다·
웅성웅성─
“아니 너희들이 잘못─”
“그쪽에서!”
“애초에 실력만 있으면 상관없잖아!”
결국 기사 한 명이 탕 소리가 나게 책상을 연거푸 두드렸다· 회의실은 비로소 고요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 정보가 사실임에 틀림없는가?”
상위 기사 마법 학부의 직함으로 치면 수석 교수쯤 되는 인물· 콘라드가 의문스레 중얼거렸다· 마법 학부의 총장 코네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되묻는다·
“오늘 언급된 정보가 워낙 많아서 말입니다· 그 중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지요·”
“이 기사들이 정말로 사망했냐고 묻는 것이네·”
그가 토벌제의 명단을 두드리며 말했다·
잘 다듬어진 턱수염이 인상적인 콘라드는 이름 높은 클라우드 가문을 이끄는 거물이다·
실제로 그의 아들 키안 역시 현재 ‘청운’이라는 이름의 생도 기사단을 운영하는 수재다·
“예· 그렇게 사료됩니다·”
“····”
콘라드는 여전히 미덥지 않은 눈치였다· 곁에 앉아있던 다른 정규 기사가 신경질적으로 끼어든다·
“그렇게 쉽게 대답하실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대표가 사망했는데····”
“끼어들지 말아주게· 이보게 코네트· 나는 이 부분도 상당히 마음에 걸리는군·”
콘라드가 보고서 중 하나를 가리켰다·
[···플란의 순간 이동 마법진에서는 다양한 엘프어로 구성된 술식 역시 발견이 되었다·]
“고작 학생이 엘프어까지 활용하다니 마법 학부는 중요한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 아닌가?”
코네트가 피식 웃었다·
“그가 여러 언어에 능통하다는 건 제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습니다· 아주 똑똑히·”
플란은 코네트 앞에서 엘프어를 직접 읊었었다·
그녀는 그 순간을 기억한다· 플란이라는 존재를 본격적으로 눈여겨보게 된 순간이었으니까·
“그러니 그 정도 역량은 충분히 있는 마법사입니다· 그가 대단하다는 건 이미 이전의 경기들로도 충분히 증명이 된 부분 아닌지요·”
코네트는 굳이 학생이 아니라 ‘마법사’라는 말을 사용하여 플란을 설명했다· 콘라드는 여전히 가늘게 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상황이 워낙 이상하니 굳이 언급하는 걸세·”
“예· 확실히 이상하긴 합니다·”
코네트가 차분하게 콘라드의 말을 받았다·
“토벌제에서 위험 지역에 들어서는 것은 자랑처럼 여겨졌고 사망자는 매년 발생했는데 왜 유독 올해만 문제를 삼는 것인지····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실컷 떠들게· 머지않아 전부 밝혀지겠지·”
“점수는 지금도 밝혀져 있는데 말이지요·”
어제를 기점으로 미동조차 없었던 마법 학부의 점수는 천축과 견줄 수 있을 정도로 치솟았다·
표현 그대로 어마어마한 상승 폭이었다· 몇몇 조가 그동안 틈틈이 쌓아둔 점수가 조금 의미 없어 보일 만큼·
‘···이런 광경을 직접 보게 될 줄이야·’
빼곡하게 모여든 기사들을 둘러보며 코네트는 소리 없이 감상을 되뇌었다·
패배 의심 걱정···· 그러한 것들을 고려조차 하지 않고 지냈던 기사들의 얼굴 위에는 어느덧 많은 요소가 전부 뒤섞여 있었다·
그간 너무나도 당연하게 무시당했던 세월을 기억하고 있기에 그녀는 현재 이 소란이 그렇게 싫지만도 않다·
“그래서 위험 지역으로의 파견은 아직인가?”
콘라드가 다시 한번 입을 연 그때·
회의실 문이 활짝 열렸다·
“뭘 그런 것들로 다투고 그러느냐·”
공간을 울리는 근엄한 음색·
한 여인이 열린 문 사이로 굳건하게 서 있었다·
밤하늘처럼 검고 깊이 있는 머리카락 그 아래에서는 별처럼 빛나는 황금색의 눈동자가 반짝인다·
“···!”
모두의 눈이 동시에 휘둥그레졌다·
둘째 황녀 오로라· 그녀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황녀님···!”
“감히 황녀님을 뵙습니다!”
오로라의 좌우에서 호위 기사들이 튀어나와 차근차근 회의장을 둘러싸고 너도나도 황녀를 향해 예의를 갖추어 인사를 올리기 시작했다·
한 손을 들어 올리는 것으로 모두의 인사를 받더니 황녀는 눈을 한 번 깜빡이고서 입을 열었다·
“너희는 전혀 다툴 필요가 없느니라·”
그녀의 여유 넘치는 발언에 몇몇 기사들이 소신을 가지고 목소리를 냈다·
“황녀님 하지만 이건!”
“대표들은 한 명 한 명이 제국의 미래가 될 재목입니다· 마법 학부가 그 제목들을 상대로 무슨 짓을 하였는지····”
“하·”
오로라는 조용히 코웃음을 쳤다·
“베르켈의 위험지역 따위도 돌파하지 못하는 놈들을 제국의 재목이라 칭한단 말이더냐?”
그녀가 두 번 눈을 깜빡였다·
한 번 깜빡이자 동공에서 별이 일렁였고 두 번 깜빡이자 황금빛 초승달의 모습이 일렁인다·
“그건 너무나도 시시한 농담이구나·”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곧 오로라를 위한 권좌가 회의실 안으로 옮겨졌고 황녀는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말을 잇는다·
“내가 위험 지역으로 관료들을 파견했다·”
모두의 얼굴에 다시 한번 놀람이 번졌다· 또한 동시에 다툴 필요가 없다던 오로라의 말이 이해되었다·
둘째 황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다들 관람할 준비는 되었느냐·”
◈
이른 시각·
우리는 신전의 중심부 근처에 머물러있다·
그림자와 마인이 되어버린 청운 기사단을 해치운 이후 우리는 기세를 몰아 온종일 신전 내부의 마수 사냥에 힘썼다·
어제 처치한 마수의 개체수는 적어도 백 개체 이상· 이는 세 마법사가 ‘협공’이라는 개념을 익힌 덕이 컸다·
“흐음·”
나는 곤히 잠들어있는 세 대표를 바라보았다· 현재 깨어있는 것은 내가 유일하다·
하루 만에 천축과 맞먹을 정도의 점수를 벌었고 왜곡 가방에는 아직 식량이 넉넉하다· 따라서 이 정도의 휴식은 줘도 괜찮을 것이다·
나는 헤라를 한 차례 점검하기로 했다·
[첫 흡수를 그 정도로 갈무리하다니 놀라울 정도로 완벽한 활용이었어요 주인님!]
헤라는 만족한 듯 했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앞으로는 훨씬 큰 힘을 다룰 것이니 한곳에 모여 증폭되는 힘을 제어하는 숙련이 필요하다·
“····”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헤라와 감응했다·
장갑이었던 그녀가 허공으로 붕 떠오른다·
[어라 정령화도 해보시게요?]
이번 점검의 목적은 헤라와의 감응도를 올리면서 정령화 역시 더 완벽하게 다듬는 것·
이전에는 마나의 총량 등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아 아쉬운 것이 많았으나 주변의 기운을 일부 흡수할 수 있는 지금이라면 도전할 만했다·
스으으으으─·
정령화는 헤라의 형태를 자유로이 바꾸는 것·
나는 거기서 한차원 더 나아가기로 했다· 원하는 형태를 이루되 닿는 가시광선을 분산하여 투명한 것처럼 여겨지는 것까지를 목표한다·
펑!
[오오?!]
의외로 쉽게 성공했다· 장갑의 형태였던 헤라는 내 의지에 따라 모습을 자유자재로 뒤바꾼다· 깃펜 상자 등등 여러모로 활용이 가능했다·
이만하면 되었다·
“다음은 목적지인가····”
지도를 꺼내 살폈다·
사룡과 스칼렛의 견갑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점수를 품고 있는 곳 동시에 고대 룬어 보물을 품고 있는 곳·
그 두 가지를 모두 충족하는 것이 이 신전이다·
아니 사실 신전보다는 덫에 가깝다·
어제 온종일 신전을 살핀 결과 이 구조물 자체가 그림자를 다루는 마인이 만들어낸 공간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 존재는 호시탐탐 나를 관찰하며 우리가 신전의 중심부로 향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순순히 유도당해주는 이유는 오로지 하나·
···덫을 통째로 부술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너─!”
트릭시의 앙칼진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나로서는 상당히 의아한 반응이었다·
적의 습격 따위는 아닐 터인데·
고개를 돌려보니 트릭시가 아직 잠이 덜 깬 베키의 멱살을 쥐어 앞뒤로 흔들어대고 있었다·
“미쳤어? 미쳤냐고!”
“흠냐···· 어걱 으 으응?”
“손수건 네가 내 손수건에 코 풀었지!”
“어···?”
실시간으로 창백해지는 베키를 바라보며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트릭시가 발작할 만도 하다· 마법적인 효과가 부여된 손수건을 그토록 애지중지하였으니·
“자다가 코가 막혔는데 일단 뭐가 손에 잡히길래···· 아니 애초에 그걸 왜 안고 자는 거야·”
“지금 그게 할 말이야?”
“알았어· 내 손수건 줄 테니까 화 풀어· 응?”
“안 돼!”
“···같은 손수건 아니야? 이거 깨끗해·”
“아니야!”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트릭시에게 다가갔다·
끝도 없는 둘의 싸움을 가만히 방관하기에는 앞으로 남아있는 일들이 너무나도 중요하다·
트릭시에게 만년필 하나를 건네주었다·
“받아라·”
트릭시는 미간을 좁힌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물론 나는 그럴듯한 이유를 덧붙여주었다·
“그러고 보니 이걸 손수건의 답례라며 전해달라더군·”
“····”
트릭시가 눈을 두어번 깜빡였다·
베키의 가슴팍을 확 밀치더니 만년필에 시선을 고정한다· 그새 눈이 조금 커다래진 것 같았다·
그녀가 나와 만년필을 번갈아 가며 쳐다본다·
“가르침 씨가· 나한테?”
“그래·”
“왜 이제야 줘·”
“깜빡 잊었다·”
“잊을 게 따로 있지· 지금 며칠이 지났는데·”
볼멘소리하면서도 트릭시는 만년필에 시선을 고정했다· 푸른 눈동자에서는 알 수 없는 욕망이 일렁였다·
“결정이나 해라· 선택은 네 자유니까·”
나는 만년필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트릭시의 눈동자가 그것을 따라 움직인다· 좌우로 움직여도 마찬가지였다·
“받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어· 원래 내 건데·”
트릭시가 그것을 잽싸게 낚아채서 안 주머니로 넣는다· 기분은 그새 풀린 모양이었다·
그때쯤 루이스가 담요를 전부 갰다·
나는 대표들에게 말했다·
“출발하지·”
이제 신전의 중심부로 들어설 시간이었다·
‘곧 마주치겠군·’
그게 마수든 천축이든 잔불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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