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4
우리는 느리지만 신중하게 전진했다·
미로같이 뻗어있는 지형조차도 우리에게는 제약이 되지 못했다· 이는 전적으로 고대 룬어 지도와 환상 지도를 합쳐놓은 덕택이다·
그렇게 여러 지형을 통과하여 마침내 그 끝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에 다다른 찰나·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애들아 옆에 있지?”
“악! 누가 내 발 밟았어!”
“조심을 해 그럼·”
“그만 그만 좀 밟아!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알 수 없는 공간이 펼쳐졌다·
어둠이 사방을 가득 메운다· 평평한 바닥이 발에 닿는 다는 점을 제외하면 현재 확신할 수 잇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지도에 의하면 이곳이 신전의 중심부임이 틀림없었다· 나는 주변의 기운에 집중했다·
시야가 어두워도 상관없었다· 기운을 살필 수 있다면 내게는 눈이 있는 것과 다름없으니·
“····”
얼마 지나지 않아 공간을 가늠했다·
느끼기에 넓은 원형의 공간이었다·
계단식 관객석에 둘러싸여 있는 극단이 나타나서 공연이라도 할 것 같은 그런 장소 말이다·
그런데 그때·
팡─!
갑자기 아주 조그만 광원이 생겨났다· 그것은 공간의 가운데 일부분만을 밝혔다·
“다들 움직이지 마라·”
나머지 세 명에게 가만히 있을 것을 지시하고 나는 천천히 그 지점을 향해 나아갔다·
뚜벅─ 뚜벅─
고요한 공간에서 오직 발소리만이 울려 퍼진다·
“또 누가 있는 모양이네?”
정면에서 고혹적인 목소리가 닿았다·
나는 가만히 정면을 바라보았다·
느껴지는 살기는 전혀 없었으니 굳이 경계 태세를 취할 것까지는 없었다·
“이건 마법사의 기운인데···· 아 역시·”
이내 붉은색의 장미를 인간으로 빚어낸 듯한 여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네트·
천축의 단장 생도였다·
그녀가 뒤로한 어둠에는 천축의 기사 세 명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너를 여기서 마주칠 줄 알았어·”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에게로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리고 갑자기 한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악수 한번 어떠니?”
나는 조용히 그녀의 모습을 살폈다·
당연한 말이지만 천축은 약하지 않다· 사람들이 입을 모아 우승 후보로 이야기한 조였으니까·
현재 천축과 우리의 점수는 엇비슷하고 이들이 사룡을 피해서 점수를 얻기 위해서는 이 신전에 방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안 받아주니까 좀 머쓱하네· 네 순간 이동 마법 나름 재미있어서 이렇게 먼저 내민 건데·”
자네트는 명성이 헛되지 않게 멀쩡한 모습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상처는 없으며 피로한 기색도 없다시피 했다·
그녀가 이내 손을 거두어들였다·
“뭐 좋아· 플란· 그럼 다른 걸 제안할게·”
나는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우리는 너희의 점수를 원하거든·”
“····”
“최소 절반을 양도해· 그럼 토벌제가 끝나는 순간까지 건드리지 않을 거야· 약속·”
그녀가 잔망스럽게 새끼 손가락 하나를 폈다·
“어떠니? 나쁜 제안은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차분하게 대답을 돌려주었다·
“말이 짧군·”
“···음?”
그녀는 붉은 빛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 넘겼다·
우아한 동작으로 안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이내 동전 하나를 꺼내 들면서 나를 쳐다본다·
“나는 일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싶어질 뿐이야· 여긴 위험 지역이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공간인데 평화만큼 중요한 게 또 있겠니?”
“자네트·”
조용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말이 짧다고 했을 텐데·”
잔잔하게 분노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천축을 향한 악감정 같은 건 아니었다·
“점수를 구걸하려면 응당 존댓말이 나와야지·”
단순하게·
고대 룬어 보물을 살피고 싶은데 타인에게 시간을 쏟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불편했다·
“평화를 스스로 걷어차고 있는 것 같은데· 오히려 네가 위기 상황이라는 걸 모르겠나·”
자네트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제 목덜미 위에 손 하나를 얹더니 웃음을 터뜨린다·
“역시 자신감이 넘치는구나· 너의 그런 점이 나는 싫지 않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승을 양보할 생각은 없으니까 말이야·”
자네트가 말을 이었다·
“서로 치열하게 싸워서 점수를 쟁탈할 수도 있겠지· 근데 그건 너도 싫은 거 아니니·”
팅─!
자네트가 엄지를 튕겨 허공으로 동전을 띄워 올렸다· 그것은 아주 높이 떠올랐다가도 다시 손가락에 문제없이 안착한다·
“잘 생각해보고 다시 대답해주렴· 우리 평화롭게 가자· 서로 평화롭게·”
나는 자네트가 습관적으로 동전을 튕기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그것을 염동으로 저 멀리 쏘아버렸다·
“····”
자네트의 얼굴 위로 한순간 불쾌감이 스쳤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동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네트는 엄지로 무언가를 튕기는 듯한 시늉을 했다·
이 공간에 있는 모두가 어느덧 공허해진 자네트의 손가락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이봐 플란·”
침묵을 가장 먼저 깬 것은 당연히 자네트였다·
그녀는 몸을 정지한 채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리고 천천히 눈동자만 올려 나를 바라본다·
“너 지금 장난····”
그러나 그 말은 매듭지어지지 못했다·
찰나의 순간·
쐐액─!
동전이 쏘아져 나간 방향으로부터 검은 그림자가 뱀처럼 날아들었다·
그것이 목표하는 것은 나였고 나는 그것을 어렵지 않게 피해냈다· 뒤이어 선연한 살의가 공간을 가득 메운다·
다른 인물 두 명이 등장하며 일어난 변화였다·
옆에 있는 그 녀석을 보자마자 알았다·
그녀가 바로 수많은 그림자를 다루는 장본인이며 건방지게 나를 관찰한 마인이라는 것을·
오른편에 있는 녀석은 가만히 우리를 응시할 뿐이다· 왼쪽의 마녀가 키득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동전은 좀 기분이 나쁘네? 나를 무슨 저금통으로 아는 걸까···· 흐응·”
나는 굳이 마녀에게 대꾸하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 있는 마인이라는 건 벌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에·
대신 자네트에게 물었다·
“저것도 네 일행인가 자네트·”
“그럴 리가· 애초에 둘 다 마인이잖아·”
모두의 시선이 두 마인에게로 향했다· 그들은 빛을 등지고 있었기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자네트가 그들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꿰뚫어버리기 전에 모습을 보여!”
그러자 공간의 어둠이 모조리 걷혔다· 동시에 모두의 얼굴이 차게 식었다·
둘 중 한 명이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지금은 영락없는 마인이지만 분명 한 때 기사로서 마주했던 자였기 때문이다·
나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다른 게 아니라 잠시 그녀의 이름이 생각나질 않아서·
이내 아주 겨우 기억이 났다·
“···엘라였던가 이름이· ”
“그래· 분명 내 손으로 명예 처형을 시켰는데·”
자네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엘라· 그녀는 마인으로 다시 태어난 채였다·
마인으로부터 오묘한 힘을 받은 것인지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강대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조소를 머금었다·
“아무리 보아도···· 죽이지 못한 모양인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렇네· 기억이 났어· 숨이 붙어있는 채로 사지를 마비시켜 뒀었지·”
우후후후후─!
그때 마녀가 소름이 끼치는 웃음소리를 냈다·
“집 나간 애완동물들이 전부 돌아오면 이런 기분일까? 다들 어서 와~”
“네게는 분명 미래를 보여주었을 터인데· 용케도 도망가지 않았군·”
“아~ 그 잔재주에는 꽤 놀랐어· 그거 내가 상당히 아끼는 수정구였는데·”
우리를 향하여 뱀 같은 그림자들이 꿈틀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그 은밀한 움직임을 조용히 눈으로 살폈다·
“너는 이름이 무엇이지·”
“편한 대로 불러~ 오래 볼 사이는 아니잖아?”
플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됐다· 소개는 잠시 뒤에 해라·”
나는 모든 이들을 뒤로 몇 걸음 물러나게했다· 자네트는 의아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내 진중한 눈빛을 마주하더니 결국 그렇게 했다·
“아직 한 명이 도착하지 않았으니·”
화륵─
다음 순간·
무언가가 작게 타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작지만 또 기이하리만치 선명한 소리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벽면에 열기를 품은 균열이 세로로 생겨나더니·
콰아아아아아아─!
붉은 검기에 공간이 반으로 갈라졌다·
“···!”
다른 이들의 얼굴에 충격이 어릴때쯤 눈앞에는 이미 일직선으로 쭉 뻗은 형상으로 구덩이가 파여있었다·
내가 물러나게 하지 않았더라면 전부 한 줌의 재가 되어 사그라들었을 것이다·
열풍은 한 박자 뒤늦게 휘몰아친다· 이내 그곳에 용암이 고이고 달아오른 공기는 피부를 데워버릴 듯하다·
극한의 고온으로 달아오르기 시작한 공간·
작은 용암의 강·
인간이라면 절대로 발을 딛지 못할 그곳을·
무심하게 걷는 여기사가 있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용암에 아무렇지도 않게 깊숙이 발을 내딛는 그녀가 저 멀리 보였다·
잔불의 기사 스칼렛·
“···나머지는 저 녀석이 도착하면 듣지·”
나는 다만 그렇게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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