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5
일직선으로 파인 지면에서 용암이 들끓는다·
잔불의 기사가 이곳으로 향해오는 중이고 천축 마녀 그리고 우리 사이에서는 긴장감이 돌았다·
베키가 내게 다급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플란· 뭔가 계획이 필요할 것 같아· 상황이 다급할수록 잘 짜여진 계획이 있어야 무사히····”
“너는 늘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군·”
“···그런가? 아니 그래서 계획이 뭔데?”
그녀가 재잘거리던 그때였다·
우후후후후─
소름끼치도록 불쾌한 웃음소리가 넓게 퍼지고 마녀는 자신의 양 손바닥을 천천히 맞붙였다·
쿵─!
그리고 거대한 진동이 발생했다·
나를 비롯하여 모든 이의 행동이 잠시 굳었다·
신전의 구조가 뒤바뀐다· 작은 강이라고 표현해도 손색없었을 용암 구덩이가 순식간에 메워져 버렸다·
우리를 동그랗게 둘러싼 계단 형식의 관객석이 무너져 내리고 신전의 벽면조차 사라져서 끝을 가늠할 수 없는 넓이의 광장으로 변모했다·
후드드득─!
위에서 검은 비가 쏟아진다·
바닥에 고인 그것은 천천히 뭉쳐서 인간 형태의 그림자로 피어난다· 그리고 그 소환에는 결코 끝이라는 게 없었다·
“저게 다 뭐야····”
트릭시가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말도 안 되게 넓었던 광장· 이곳의 절반 이상을 벌써 그림자들이 잔뜩 메웠다·
“플란 이거···· 이거···?”
곁에 선 베키는 질문을 끝맺지조차 못했다·
대답을 돌려주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녀가 무엇을 궁금해하는지는 뻔했으므로·
“영혼 수확이군·”
“영혼 수확?”
영혼 수확·
문자 그대로 죽은 이들의 영혼을 수확하는 것·
보아하니 영혼에 제멋대로 그림자를 덮어씌워 재가공한 형태다· 영혼들의 수확 시기는 제각기 다양하지만 전부 10년 이내·
바꾸어 말해 베르켈에서 최근 10년간 생겨난 사체의 영혼을 수확했다는 말이 된다· 어쩌면 그 전부를·
쿵─!
쿵─!
지면은 계속해서 울린다·
그림자들의 외면은 기괴하기 짝이 없다·
인간을 조형하려다 그만둔 것처럼 얼굴의 이목구비는 모조리 뭉개져 있고 팔과 다리가 두 개 이상인 것들도 많았다·
쉽게 말해 존재 자체가 혐오스럽다·
우후후후후─
그림자 마수들의 바다 뒤편으로 저 멀리 물러난 마녀의 모습이 점처럼 조그맣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 정도는 똑똑히 볼 수 있다·
위로 말려 올라가는 마녀의 입꼬리를 응시하며 나는 가만히 읊조린다·
“준비해라·”
동시에 세 마법사의 몸 위로 보랏빛의 장막을 덧씌워주었다·
“이게 뭐야·”
“어? 이건 처음 보는 마법인데····”
새 옷을 입은 듯 세 명이 자신들의 이곳저곳을 살핀다· 밤의 정령 헤라의 형태를 뒤바꿀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하고 지금은 ‘보호막’의 형태로 그들에게 둘러주었을 뿐이다·
콰아아아아─!
그 순간 밀어닥치는 그림자의 해일·
그들의 목표는 그림자를 제외한 모든 것이다·
◈
쿠구구구구─!
자네트의 검이 일직선으로 뻗어나간다·
단 한 번 찌른 것에 불과하지만 그 일격으로 관통한 그림자들의 약점 수는 서른 개가 넘는다·
“역시·”
천축의 동료 바스티안은 자네트의 고유 능력 ‘약점’의 활용을 보며 감탄했다·
그러나 그것은 길지 못했다·
쏴아아─!
파도처럼 밀어닥치는 그림자 마수들이 비어버린 빈자리를 곧바로 메꾼다· 바스티안은 이들의 개체수가 당황스럽다·
“도저히 끝이 안 보여·”
“무슨 숫자가···!”
점수를 많이 벌어서 좋다는 생각 따위는 들지도 않는다· 한 마리 한 마리가 두려운 것은 아니나 ‘끝이 없다’는 전제가 깔리게 된다면 이야기가 많이 달라진다·
무언가를 해치웠더라도 결코 해치웠다고 표현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저거 플란이잖아·”
그때 자네트의 중얼거림이 바스티안의 귀에 닿았다· 그는 그쪽을 돌아보았다가 흠칫 놀랐다·
그림자 마수들이 뭉쳐 해일이라 표현할 수 있을 만한 것이 플란을 통째로 찍어눌렀다·
천축은 상황도 잊고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바스티안이 혀를 쯧 차고서 입을 열었다·
“결국 저놈이 제일 먼저 가버렸구만·”
“허무할 정도로 쉽게····”
자네트는 그리 중얼거리며 볼의 땀방울을 훔쳐낸다· 검을 쥔 손아귀에 힘을 주며·
쿠구구구구─!
그녀가 이번에는 지면을 꿰뚫어 커다란 균열을 만들어냈다· 이렇듯 고유능력 ‘약점’은 살아있는 것을 상대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웅덩이에 빗물이 고이듯 균열 안으로 그림자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밀어닥치는 그림자들은 끝이 없었다·
바스티안이 혀를 내둘렀다· 이쯤 되니 그도 사뭇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우리 다 뒤지는 거 아니냐?”
“잔불의 기사께서 오고 계셔·”
스칼렛의 화염에 저항할 수 있는 마수란 없다· 그녀가 이곳에 발을 딛는 순간 모든 상황이 종료될 테지·
“그래? 마법사 놈들이 그때까지 버틸 수 있으려나· 대장놈이 먼저 당해버려서 사실상 죽는 건 시간문제인데·”
“그건 우리 쪽에서 엄호해·”
“뭐?”
“엄호해!”
자네트가 바스티안의 팔목을 붙잡았다· 그녀의 이마에는 핏줄이 세로로 선 채였다·
“마인이 나타났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희생자는 최소한으로 줄인다!”
“····”
“알았어 몰랐어!”
진지해진 자네트의 태도에 곁의 다른 기사들도 놀랐다· 극한의 상황이라 그런지 자네트도 슬슬 다급해지고 있었다·
“알았어· 알았다고·”
구할 틈이 있다면 말이지·
그림자 마수들로 잔뜩 뒤덮인 이곳에서 바스티안은 굳이 그것까지 입에 담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때·
무언가를 짓누르고 있던 그림자들 더미 사이에서 빛이 한 줄기 새어 나왔다· 두 줄기 세 줄기···· 이내 그 수가 많아진다·
펑─!
그리고 거대한 폭발과 함께 플란을 짓누르고 있던 그림자들이 형편없이 사방으로 튕겨졌다·
“뭐야 저놈···!”
“살아있었어?”
다시 모습을 드러낸 플란은 여전히·
태연하고 여유롭게 눈을 감은 채로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다·
천축을 상대하던 그림자들이 일제히 몸을 비튼다· 그것들 전부가 목표를 플란으로 바꾸었다·
사내가 중얼거린 한 마디·
“···헤라·”
그 한마디에 그의 앞에 활의 형상이 생겨났다·
플란은 품속에서 새하얗게 빛나는 명함 한 장을 꺼내었다· 그것을 천천히 활시위에 겨눈다·
「마력 백지 수표」
언젠가 마법 학부 총장 코네트로부터 받았던 물건 그녀의 마력을 잔뜩 담아낸 용지·
술자의 능력만큼 마력을 뽑아낼 수 있고 플란은 결코 자기 능력을 의심하지 않는다·
구구구구구····
그의 마력에 휘말려 노면의 흙 부스러기들 따위가 공중으로 떠오른다·
키기기기긱─!
물론 그림자들은 그것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림자 마수의 진군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오로지 플란을 향해 뻗는 무한한 파도였다·
“····”
그리고 플란은 천천히 눈을 뜬다· 손 끝으로 수표를 쥐어 그 힘을 더더욱 증폭시킨다·
이에 감응하듯 형태를 뒤바꾸는 장대한 마력·
그 형태라는 것은····
화살·
플란 입장에서도 제법 마음에 드는 결과였다·
활과 화살에서 눈 부신 빛이 흘렀다·
“···또 뭘 하려는 걸까·”
자네트가 그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멍하니 중얼거릴 틈이 있었다· 모든 그림자 마수들이 플란을 향해 뛰어갔으니까·
지금도 화살은 더 단단한 마력을 머금어간다·
탁─
그리고 플란이 손을 놓은 순간·
빛이 번졌다·
온 공간이 마력 화살의 황금빛에 물들었다·
천지를 뒤흔드는 충격·
도무지 치워지지 않을 것 같았던 마수들의 무리가 바다라고 표현했던 그 아득한 양이 황금빛 마력에 잡아먹히며 반으로 갈라진다·
일자로 쭉 뻗은 길이 생겨나고·
멍해진 마녀를 마주보며 플란은 걷기 시작했다·
◈
전투가 처절하게 이어지고 있다·
잔불의 기사 스칼렛은 그것을 피부로 느낀다· 전장은 피와 그림자로 가득 뒤덮여있다·
그녀는 무표정으로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고작 그것 하나만으로도 고온의 기류가 공간을 뒤흔들고 발을 내딛은 지면은 흉악하게 뒤집히며 허공으로 튀어 오른다·
그럴 때마다 기괴한 비명을 내지르며 한 줌의 재로 사그라드는 마수들·
그러나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전황 속에서 태연함을 유지하는 것은 스칼렛 뿐만이 아니었다·
한 명이 더 있었다·
그림자로 벼려진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 사방에서 마법이 충돌하며 터져 나오는 폭음·
그 혼란 사이에서 울려 퍼지는 구두소리·
그것이 스칼렛의 귀에는 기이하리만치 선명하게 들려온다· 지능이 없는 그림자 마수들조차도 몸을 떠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과연 착각인가·
아니 그들은 분명 몸을 떨고 있었다·
스칼렛의 화염 때문이 아니라 플란 때문에·
모두가 그 광경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잔불의 기사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플란·”
오늘 무언가는 결론이 날 것이라고·
그녀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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