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6
마법이 난무하고 그림자가 넘실거리는 공간·
나는 묵묵히 한가운데의 일로를 걷는다·
그림자 마수들이 겹겹이 쌓여서 형성되었던 바다 따위는 반으로 갈라놓은 지 오래였다·
나의 진격을 방해하는 그림자는 없었다·
대부분이 달려들기를 망설였고 실제로 달려들게 된다면 즉각 소멸시켰기에· 결국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
저 멀리에서 마녀가 나를 멍하니 바라본다·
여기서도 확연히 보인다· 위로 솟아있던 그녀의 입꼬리는 이미 원래의 높이를 되찾은 채였다·
“헤라·”
다시 한번 두글자를 읊조렸다·
내 손에서 활의 형상으로 굳어지는 밤의 정령· 화살의 형태로 맺어지는 마력의 울림·
그것들을 굳이 손으로 쥘 필요도 없다·
나는 그저 염동만을 활용해 그것들을 들어 올렸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조준을 마쳤다·
마녀는 곧바로 자신을 보호하려 했다· 그림자 장막이 그녀의 주변을 몇 번이고 감싸더니 흡사 벌레의 고치 같은 형태가 되었다·
그러나·
내게는 그것들의 약점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인다·
“마인을 상대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나는 우두커니 서서 지켜보는 세 마법사를 향해 말했다·
“너희도 마법사의 시야를 가질 필요가 있다·”
그들의 망막에 마나를 덧씌워 나와 시야를 공유하게 만들었다· 그러자 푸른 색 점으로 훤히 드러나는 그림자 장막의 약점·
“마기는 흐름이 불규칙하고 약점이라 칭할 부분이 분명히 존재하니 말이다·”
세 마법사는 이것이 신기한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나와 저 멀리있는 마녀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나는 장막의 약점에 마력 화살을 꽂아 넣었다·
콰득─!
그림자 장막에 박혀든 화살이 주변으로 내 마력을 흘려 넣는다· 마인 특유의 검은 마기를 약화하는 것이다·
직후 새까맣던 그림자 장막이 반투명해 보일 정도로 옅어졌다· 나는 다시 한번 화살을 겨눈다·
그리고 발사·
푸른 화살이 직선의 궤적을 그어내며 뻗어나간다· 약화된 그림자 장막은 주인의 몸을 지켜내지 못했다·
“···윽!”
가죽과 살이 꿰뚫리는 질척한 소리와 함께 마녀의 오른팔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그녀가 눈을 부릅떴다·
그 표정에 어려있는 것은 고통보단 충격이었다· 마녀는 비틀거리면서 벽에 몸을 기대었다·
내가 또 한 번 화살을 맺어낸 그 순간·
쿵─!
위로부터 떨어진 무언가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동시에 검은 기운이 사방으로 뻗친다·
그것은 이미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존재였다· 두 안구가 새까맸고 풍기는 기운 역시 마기뿐이었으니 어떻게 보아도 마인이었다·
손에 쥔 사검(絲劍)만이 그녀의 과거를 간직한 채다·
기사 학부 네 남매의 엘라· 그녀였다·
나는 조용히 권고했다·
“비켜라·”
그러나 그녀는 내 권고를 듣지 않았다· 칼날 같은 살기를 뿜어내며 그저 한 가지를 되묻는다·
“플란 나를 기억하고 있겠지·”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궁금하지도 않을뿐더러 마인으로 변해있는 모습을 마주하면서 어떠한 감상을 느낀 것도 아니었기에·
그러나 엘라는 그것에 분노한 듯했다·
“···대답해·”
엘라는 낮게 읊조리며 검은 기운을 발산했다·
그녀의 검은 사검은 허공에서 여러 차례 얽혔다· 이내 손아귀의 형상을 이루더니 내게 쇄도한다·
빠르고 또 정교하다·
좌측으로 뻗는가 싶더니 우측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발목을 노리는가 싶더니 기이하게 궤도를 꺾어 순식간에 목을 조이려 든다·
무차별하게 뻗어오는 검은 손아귀 속에서 사각지대는 결코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규칙성이라면 존재했다· 나는 공격을 차분히 염동으로 튕겨내며 규칙을 읽었다·
그렇게 정확히 열 번을 튕겨낸 후 물었다·
“고작 이게 최선인가·”
겨우 이 정도로 나를 가로막겠다는 것인가 혹은 공격의 선택지가 이것밖에 없는가·
둘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을 터였다·
“····”
엘라 또한 그것을 아는지 침묵했다·
“후우─”
그녀가 심호흡하며 마기를 끌어 올렸고 엘라의 등 뒤에서 검은 손아귀가 좌우 대칭을 이루며 개수를 불렸다·
맨손이었던 그것들은 곧 그림자로 벼려진 검을 하나씩 쥐었다· 그것들의 형태가 각기 달랐다·
엘라가 지면을 박차고 내게 달려들었다· 동시에 나는 네 가지의 마법을 구상했다·
딱─!
손가락을 튕겨 발현한다·
수풍지화(水風地火)의 4원소가 동서남북 네 방향을 하나씩 차지하며 떠올랐다·
어느새 목전까지 다가온 엘라가 그림자 검으로 내 목을 베어내려는 찰나의 순간·
원소가 뒤섞이며 폭발했다· 수풍지화의 폭류가 공간을 찢으며 앞으로 뻗어나간다·
푹─!
백색을 띠는 광선이 엘라의 복강을 너무나도 쉽게 꿰뚫었다· 마기와 원소는 서로 상극을 이루니 당연한 결과다·
순간 엘라의 눈이 크게 뜨였고 나는 숨결이 닿을 거리에서 그녀의 검은 눈을 들여다보았다·
우리 둘 다 상대방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지만 서로가 처한 상황은 판이하였다·
“너···· 는···· 도대체···· 정체가····”
검은 피를 게워내며 엘라가 짧게 읊조렸다·
나는 그녀의 검은 눈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내가 있었다·
나는 조용히 그녀의 정수리에 손을 얹었다·
“그때도 분명 말해주었지·”
그리고 그녀를 무심하게 옆으로 치워냈다·
“마법사라고·”
엘라의 몸이 낙엽처럼 쓰러지는 것을 확인한 후 나는 다시 마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득히 멀었던 거리가 이제는 제법 가깝다·
걷고 또 걸어 마침내 마녀가 들어있는 고치 앞에 서고 그것을 염동으로 찢어발겼을 때·
손바닥만 한 보석을 한 손으로 필사적으로 쥔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마녀의 모습이 보였다·
“···!”
그녀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심장이 철렁였음을 나는 주변의 마기를 통해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염동으로 보석을 빼앗았다·
“이게 고대 룬어의 힘을 담은 물건인가·”
과연 예상대로 엄청난 마력이 담긴 동력원이었다· 짧은 순간 동안 나는 이것의 활용처를 이것저것 떠올렸다·
어쩌면 마탑을 새로 새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 안 돼····”
물건을 빼앗기자 마녀는 평정을 잃었다· 나는 허공에 떠 있는 화살로 그녀의 이마를 겨누었다·
“사 살려 살려줘····”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해도 내가 살려주는 일은 없을 터이니·
“고통스럽진 않을 테니까·”
“이 보석은 미완성이야· 나 나를 살려두는 건 어때? 내가 완성해줄게! 다 완성해서 너한테 줄 테니까···!”
구구절절한 설명이 이어졌으나 화살은 너무나도 쉽고 빠르게 쏘아졌다·
푸욱─!
마녀의 미간에 구멍이 생겨났다·
건방졌던 마인은 흔적조차 없이 고요하게 사라졌다· 내 관심은 이내 보석으로 옮겨졌다·
말도 안 되는 힘이 잠들어있는 이 동력원·
“···미완성이라·”
그 말이 거짓은 아닌 듯했다· 보석은 사체(死體)를 자신의 힘으로 저장하는 듯했고 아주 조금 미완성이라 여겨지는 부분이 있었니·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대단히 많은 개체의 그림자 마수들이 남아있었다· 바꾸어 말해 사체로 바꾸어도 좋을 것들이 넘쳐난단 말이다·
‘마기는 특히 화염에 약하지·’
이내 보석을 완성할 방법을 떠올려냈다·
◈
“····”
자네트는 잠시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다·
공간의 흐름이 완전히 뒤바뀌어있었다· 이 기이한 현상의 설명은 한 명의 이름으로 충분했다·
플란· 그가 바꾸었다·
엘라와 마녀의 기운이 전부 소멸했다· 남아있는 그림자 마수들이 여전히 많은데도 불구하고 더 이상 위기감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말 그대로 공간의 흐름이 뒤바뀐 것이다·
그는 허공에 마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푸른색의 십수(十數) 획이 허공에 크게 그어진다·
눈을 가진 이들은 그것이 무슨 결과를 불러올지 예상조차 못 한 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정지된듯한 공간에서 홀로 움직이는 플란의 손·
그의 보석은 빛을 무지갯빛으로 투과시킨다· 허공을 춤추는 듯 거닐며 플란과 감응하더니·
마침내·
완성된 마법진은 총 여덟 개·
플란은 그것을 각기 다른 방향으로 배치하였다·
“하····”
자네트가 마법진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비웃음 따위는 조금도 섞이지 않은 그저 순수한 감탄이었다·
그녀의 고유능력 ‘약점’·
보이지 않는다·
플란의 마법진에는 약점의 요소가 전혀 없다·
공간의 마력과 플란의 마법진이 서로 공명하기 시작했다· 그가 조용히 손을 뻗은 순간·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일변했다·
“···!”
천축 생도들을 비롯하여 세 마법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상에서는 밀밭이 살랑거리고 하늘 위에서는 강렬한 별빛이 끓어오른다· 어느 한적한 마을의 풍경에 풍차 몇 개가 조용히 돌아가고 있었다·
몸이 시리도록 떨리는 그 광경이·
···전부 눈앞에서 화염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자네트·”
옆에서 바스티안의 멍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흉터 가득한 얼굴로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바스티안의 모습이 자네트는 더없이 어색하다·
그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을 자네트는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림자들은 이 타오르는 화폭의 일부가 되어있었다· 한 줌의 재로 사그라들며 몸을 이리저리 비트는 그 모습조차도 예술적인 풍경이 뒤에 있으니 기쁨의 춤사위로만 보인다·
대단한 일이다·
한 번의 마법으로 이곳의 모든 그림자 마수들을 태워버리는 것은 분명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닐 터인데·
그런데도·
“말이 안 되는데· 이건 불가능해·”
자네트는 그리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기사도에 강한 열망을 품고 자라났다·
그런 자네트에게 있어 우상이자 나침반이었던 것· 그건 당연히 잔불의 기사 스칼렛이다·
재능을 갈고닦으며 힘든 순간도 많았고 어릴 땐 좌절도 몇 번 겪었으나 스칼렛을 떠올리며 결코 자신의 길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다시 말해 ‘잔불’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밀밭 일렁이는 별 풍차가 돌아가는 한적한 마을의 모습····
이 모든 것들을 화염으로 묘사한 화폭이란 얼마나 황홀하고 또 아름다운가·
그 꿈같은 광경에서 자네트는 ‘잔불’을 느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스칼렛의 ‘잔불’을·
“····”
자네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어쩌면 잔불보다 선명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려는 자신의 뇌를 강제로 정지시키려 했다·
그때·
“야 자네트·”
바스티안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그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는데 그게 결코 화염의 열 때문은 아닐 터였다·
애초에 플란의 불꽃은 그림자만을 태웠다·
바스티안이 심호흡을 하더니 말을 잇는다·
“이거 아무리 봐도····”
“그만·”
자네트는 바스티안의 목에 검까지 겨누어가면서 그의 입을 막았다·
막아야만 했다·
바스티안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고 그건 절대로 내뱉어지면 안 되는 것이었으니·
“···그 이상은 절대로 말하면 안 돼·”
자네트는 다급하게 옆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따라 고개를 돌린 천축 생도들의 얼굴도 뒤이어 차례차례 경악했다·
어느새 도착한 잔불의 기사·
많은 기사 생도들의 나침반이자 신앙·
유력한 검성(劍星)후보·
스칼렛 유디트·
그녀의 얼굴에 분명 당혹감이 있었다·
···검을 쥔 그녀의 손이 분명 떨리고 있었다·
◈
한편 메르헨 아카데미의 공동 회의실·
뒤늦게 도착한 황실 인물들이 플란의 마법을 담아낸 순간 사람들 사이에서 오가던 몇 마디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기록지를 메우는 것은 예술이라고 칭해야 할 것 같은 화염뿐· 이외의 감상은 필요 없었다·
“····”
둘째 황녀의 곁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유디트 가문의 가주· 테오도르 유디트는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서 소리 없이 회의실을 벗어났다·
일 초·
십 초·
육십 초·
닫힌 회의실 문 앞에서 생각에 잠겨 그는 무언가를 열심히 고뇌했다·
“잔불·”
그렇게 중얼거렸던 그는 곧바로 말을 철회했다·
“아니·”
철회해야만 했다· 그가 방금 보았던 것은 결코 잔불이 아니었으니까·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또한 확신했다·
그 불꽃은·
“작열·”
틀림없이 작열(灼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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