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1
“뭐가 잘 안되는 모양이지· 스칼렛·”
“····”
스칼렛은 가만히 제 고유 능력을 점검했다·
‘회로에는 전혀 이상이 없다·’
정체 모를 위화감이 스칼렛의 몸을 훑었다·
돌발 상황 자체를 결코 허용하지 않는 무위를 지니고 있었기에 현재 느끼는 위화감이 생소했다·
여태까지 마법사들과 수 없이 싸워봤지만 자신의 불꽃을 통째로 억누르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아니면 설마 회로도 없는 주제에 저 녀석이 보여준 작열과 관련이 있는 걸까·
그러나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마법인가·’
화염이 없더라도 플란을 이기기엔 충분할 터이니·
“어이·”
스칼렛의 검 끝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플란에게로 향했다· 아주 단순한 행동이지만 품고 있는 묵직함은 무엇과도 비할 수 없었다·
“내 삶에 잘 안되는 것은 없었다· 늘·”
스칼렛이 플란을 향해 걷기 시작했고·
유디트의 결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후웅─!
휘둘러진 검이 더없이 날카롭다·
검술에 나름의 묘미가 있는 이유는 같은 검술 속에도 각자 다른 기사의 생애가 담기기 때문이다·
스칼렛의 검은 잔잔하고 무겁다·
화려함이나 기교에는 일절 투자되지 않은 검· 그 무엇에도 연소하지 않고 타오를 불꽃과도 같았다·
콰아아앙!
내리쳐진 스칼렛의 검을 플란이 피해냈다·
그 막대한 위력에 암석 파편들은 허공으로 솟아오르고 순간 허공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한다·
“이런 식인가·”
플란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간 상대했던 기사들의 검과는 확연하게 다르다·
묵직하다· 검 하나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사실 고작 그러한 표현으로는 어폐가 있을지도 모른다· 무겁다는 말은 그저 무게를 표현한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러나 스칼렛의 검은 서서히 주변으로 퍼져나간다· 말 그대로 연소하지 않는 화염 같은 검이었다·
플란이 몸을 움직여 그 정교한 검로를 피해낼 때마다 스칼렛의 검은 그 지점에도 화염처럼 번져가며 전부를 집어삼키려 들었다·
‘잔불의 기사·’
그녀의 추종자가 많은 이유를 알 법도 했다·
기나긴 장도를 깃털처럼 다루는 힘· 와중에도 정확히 잡혀있는 중심·
‘그렇지·’
화염 없이도 드러나는 천변만화의 날카로움·
이 세계에 떨어진 이래로 감상을 느낄만한 검술을 견식한 적이 없었다· 무엇을 추구하는 검이겠구나 싶기는 해도 그것들은 전부 미완성에 불과했다·
그러나 여기 진정 기사다운 검이 있다·
무게감이 있고 쾌청하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검로가 플란의 활동 반경을 자꾸만 좁히려 들었다·
‘과연 이래야지·’
굳이 고유 능력을 활용하지 않더라도 기사라면 이미 자신만의 ‘고유한 검술’을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 기사라고 칭할 수 있지 않겠나·
스칼렛의 검은 화염 하나 두르지 않고도 타오른다·
드디어 기사의 검을 마주쳤기에····
“오늘은 재미있을 듯하다·”
플란이 무속성의 병기 여러 개를 생성하여 스칼렛을 향해 일제히 쏘아냈다·
“후·”
스칼렛은 호흡을 내쉬며 그것들 전부를 단 한 번의 일격으로 찍어눌렀다·
‘···도대체 뭐냐 넌·’
하지만 속으로는 많은 당황을 삼키고 있었다· 플란은 지금 이 순간에도 스칼렛의 검을 피해내고 있지 않은가·
물론 검마태제의 전투 토벌제에서 플란이 활약하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이미 확인했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겪어보니 생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아이반이나 자네트가 상대할 것이 아니었다·’
여러 번의 기회를 주었더라도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당장 자신의 검조차도 상처 하나 없이 피해내는데 녀석들이 어떻게 감당했겠는가·
마법사·
기사·
···도저히 그것을 알 수가 없다·
‘아니면 일부러?’
마법에 자신이 몰랐던 분야가 있는 것인지 플란이 마법을 이렇게 활용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그는 마법을 검술처럼 활용하고 있었다·
평범한 승리를 열망하는 생각이 읽히지 않는다·
너의 방식을 알고 싶다 너의 방식을 이해하겠다 너의 방식으로 승리하겠다····
플란의 눈동자에는 그리 적혀있는 듯했다·
“감히 나의 검을 이해하겠다고!”
스칼렛의 이마에 핏줄이 세로로 섰다·
유디트의 명예 기사의 자존심 검을 놓은 배신자를 향한 분노· 모든 것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화염처럼 타오른다·
플란은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무속성의 병기들을 쏘아내는 중이었다·
“치워라!”
카앙─!
스칼렛의 검이 플란의 병기들을 쳐낸다·
최소한의 움직임에 최대의 위력·
낭비 요소가 없기에 동작에는 절도가 가득하다·
그녀의 검은 오로지 직선으로 움직이며 허공을 갈라놓았고 플란의 공격을 모조리 쳐냈다·
“으음·”
기억을 베는 자· 리브라가 둘의 결투를 지켜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기대했던 것 이상이로고·”
“음·”
유디트의 가주 테오도르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 뿐이다·
“스칼렛도 참 부지런히 해왔지·”
테오도르의 얼굴 위로 감회가 스쳤다·
그 역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스칼렛이 지금까지 미친 듯이 검을 휘둘러 왔다는 사실을·
“하지만····”
테오도르는 말을 잇지 못한 채로 리브라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마주한 리브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테오도르 나는 플란한테 눈이 간다네·”
기억을 베는 자· 리브라는 플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을 이었다·
“그대도 알지 않나· 날 때부터 쥐었던 검을 놓고 새로운 길을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
“아니 불가능이라 생각해도 좋을 것이외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리브라·”
테오도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검에 구애받지 않고도 플란은 증명이라는 신념을 그저 꿋꿋하게 이어가고 있는 거야·”
“내 생각이 바로 그러하더이다·”
삿갓을 쓴 채로 강아지풀을 질겅이던 리브라· 그녀의 눈이 이채를 띄기 시작했다·
작열의 기사 에블린 유디트·
“에블린의 길을 답습하는 것이 옳은가· 전혀 다른 길에서 신념을 잇는 것이 옳은가· 그 답이 오늘 이 자리에서 나오는 것 아니겠소이까·”
둘은 다시 한번 결투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근처를 집어삼키는 스칼렛의 검로 사이사이를 고작 한 끗 차이로 유영하는 플란의 모습을 말이다·
◈
하늘처럼 뻗어있던 평원은 더는 평원이라 부를 수 없었다· 거대한 구덩이가 무수히 생겨난 흉측한 지면일 뿐·
‘흥미롭다·’
기사의 지루한 인생사도 이렇게 검술을 통해 들을 수 있다면 다소 즐겁다·
이게 스칼렛이 걸어왔던 길 그리고 나름대로 짊어졌던 무게라는 것이겠지·
이건 상대방을 멸하기 위한 검이 아닌 마음을 꺾기 위한 검이었다·
‘이것이 스칼렛이 걸어왔던 궤적·’
스칼렛의 검술은 그 자체로서 고유하다·
잔불의 기사라는 이름이 결코 헛되진 않았다·
그래· 이런 검을 보고 싶었다·
오직 검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 고유함 기예···· 그것들이 고팠다·
플란이 슬쩍 시선을 옮겼다· 묵묵히 검을 휘두르는 스칼렛 역시 플란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칼렛이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이것이 자신의 검이라고·
“잘 감상했다 스칼렛·”
플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부터는····”
플란의 주변에 마법진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그의 발이 허공을 지면처럼 디뎠고 활동 범위를 되찾은 그가 하나둘 술식을 전개했다·
“다음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말이다·”
파칭─!
마법진들이 유리창처럼 부서져 내리며 섬광처럼 밝은 빛이 한 차례 발했다·
“····”
잠시 정적이 흘렀다·
스칼렛은 재빠르게 주변의 모습을 살폈고 이내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눈속임? 추하구나· 쉴 틈을 벌고 싶었던 거냐·”
그러나 이내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화륵─!
난데없이 스칼렛의 검 위로 불이 붙었다· 그녀가 딛고 있었던 지면은 발자국 모양으로 그을린다·
‘···?’
스칼렛의 머리에 의문이 어렸다·
‘갑자기 화력이 오른 건가·’
그러나 화력이 갑자기 상승했다고 하기에는 어색한 구석이 많다· 정확히는 미묘하게 느껴지던 것들이 이제야 원래대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그때 플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칼렛 나는 너의 순수한 검술이 궁금했다·”
옷깃을 세우고 앞머리를 차분하게 정돈하며 그는 말을 잇는다·
“고유 능력이라는 게···· 고도로 발전하면 확실히 고유한 구석이 있긴 하더군 완전히 간섭하기에는 아직 불안정하다는 걸 확인했다·”
플란이 마지막으로 어깨를 두어번 털자 전투 이전의 모습을 완전히 되찾게 되었다·
“그래서 일대의 원소를 전부 차단했었지·”
스칼렛은 한동안 플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역시 그랬었나·”
잘 움직이지 않는 입술을 애써 달싹였다· 플란은 지금껏 모든 원소를 통제하고 있었단 말인가·
“스칼렛 지금부터는 네 화염을 내게 보여라·”
플란이 손가락을 탁 튕겼다·
그의 검지 끝에서 불꽃 하나가 피어오른다·
“그 불꽃이 과연 꺼지지 않을지 나는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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