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8
스칼렛은 멍하니 서있었다·
어린 자신은 진작 플란과 함께 사라졌다· 그러나 스칼렛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서있는 중이었다· 살랑이는 바람이 또 한 번 그녀를 훑을 때까지도·
“누나가··· 없다고···?”
그녀가 끊어질 듯 가느다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상황을 이해하려 애썼지만 여전히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머릿속의 퍼즐 조각이 너무나도 부족한 탓이다·
또한 동시에·
“윽·”
다시 한번 머리가 유리처럼 부서지는 감각·
심각한 두통이 스칼렛을 덮쳤고 그녀는 한 손으로 자기 머리를 짚었다· 동시에 눈앞에서는 생소한 환각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반드시 명심해라· 스칼렛·
이렇듯 진지한 얼굴로 호소해오는 것은 처음 보는 늙은이였다· 비굴하고 초라한 행색 기품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 남성이 자신의 양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이 아비의 말을 꼭 기억해다오·
─네가 살아남고 싶다면 작열과 가정을 꾸리는 것만이 유일한 해답이다· 알겠느냐?
─응? 알았다면 뭐라도 대답을 다오· 어서!
환각은 거기까지였다·
“하·”
스칼렛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녀의 아버지는 테오도르다· 그 추한 늙은이의 모습은 결코 가주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리 생각하는 와중에도 마음속 한쪽에서 불안감이 피어오르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누나가 없다고 응답한 플란 자신을 아비라고 칭한 의문의 남성· 불안의 증식 속도는 갈수록 빨라져만 간다· 스칼렛은 어느새 자기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 쥐고 있었다·
“기억· 기억이 점점····”
기이한 감각·
공간의 오묘한 기운이 서서히 스칼렛의 몸으로 흡수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머릿속의 퍼즐 조각들의 개수가 하나둘 많아진다·
“···이런 식인 건가·”
리브라가「보관」을 이용하여 구축해냈고 이 공간의 주인은 당연히 스칼렛이다·
이 공간 자체를 흡수해가면서 기억을 되찾아가는 방식· 이 가설은 제법 아귀에 맞아떨어진다·
다만 전부를 흡수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소요될 것인가· 아직 그것까지는 알 수가 없었다·
우선 그녀도 검술 훈련장을 떠날 때가 되었다·
스칼렛이 발걸음을 뗀 순간·
삐이이이─
심각한 이명과 함께 눈앞이 새하얘졌다·
◈
“흐읏!”
정신을 차려보니 완전히 다른 공간이었다·
“후우 후 후우····”
가쁜 숨을 겨우 고르며 스칼렛은 소매로 이마에 맺힌 땀방울들을 닦아냈다· 비단 이마뿐만 아니라 전신이 온통 땀범벅이었다·
어딘가로 빨려가는 듯했던 정신이 이제야 좀 돌아온 느낌이다· 한없이 흐렸던 시야 역시 조금씩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정신은 혼미하지만 곧이어 시야에 들어오는 기괴한 풍경에 눈을 부릅뜨게 되었다·
“···!”
고개를 내려서 바라본 자신의 손·
손바닥은 물론이고 손가락의 마디마디도 작다·
조막만 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이나 작았다·
게다가 약지에는 웬 반지가 끼워져있는 채였다·
“작아졌잖아·”
그렇게 내뱉은 순간·
스칼렛은 자신의 목소리 또한 굉장히 앳되었음을 깨달았다· 명백히 어린 소녀의 것이었다·
이번에는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려 자기 얼굴을 매만졌다· 피부위에 무언가가 발라져 있지는 않았으나 무엇보다도 보드라운 감촉이 전해졌다·
“아니 어려진 것인가·”
갑작스러운 상황에 우선 주변부터 살폈다·
유디트 저택의 응접실이었다· 그녀는 공간에 홀로 담겨있었고 거울에 비추어진 소녀의 정체는····
“···동화(同化)·”
어린 스칼렛· 그 시절의 육체와 동화되었다·
쿨럭─!
폐부가 찢어질 듯한 통증과 함께 기침을 내뱉었다· 황급히 입가를 가린 손바닥에는 어느덧 피가 흥건하게 묻어있었다·
“맞아 이랬었다·”
그러고 보면 어렸을 적의 자신은 병약했었다· 아니 시체에 가깝다고 표현해도 되리라·
부패의 저주·
그 원인은 저주에 있었다· 세포가 서서히 사멸되어 결국 극심한 부패상태에 이르는 저주·
떠오르는 기억들을 더듬어가며 조립하던 중 응접실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온다·
인원은 총 세 명· 전부 하녀들이었지만 누구 한 명 스칼렛이 아는 얼굴은 없었다·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응접실의 탁자 위에는 고급 다과와 차가 자리하고 구석진 곳의 먼지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춘다· 스칼렛은 그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였다·
“···눈치가 없는 건지 일부러 저러는 건지·”
하녀가 속삭이듯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건·
곁에 있던 하녀가 그 말을 자연스레 이어받는다·
“일부러 저러는 거겠지·”
“역시 그렇죠? 어이가 없을 정도로 뻔뻔하네·”
“통째로 멸문당했는데 무슨 짓인들 못 하겠어 지푸라기라도 잡겠다고 발악하는 거지 뭐·”
“쫓아내고 싶네· 정말·”
멸문?
강렬한 단어의 등장에 스칼렛은 귀를 기울였다· 향긋한 차향이 슬그머니 코끝에 닿을 때쯤이었다·
“쉿·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목소리 좀 낮춰·”
“이 정도면 안 들려요· 아니 그리고 좀 들으면 어때요? 자기가 큰 소리 낼 입장도 아닌데·”
“불쌍한 것도 사실이잖아· 하필 최상급 마인에게 걸려서 말 그대로 모조리 잃었던데·”
불길했다·
대화 내용이 불길한 것이 아니라 흘끔흘끔 스칼렛을 향하는 시선들이 불길했다·
‘뭐야·’
···마치 스칼렛을 향한 이야기라는 것처럼·
“그런데 이거 유디트에서는 오히려 마인 덕을 봤다고 표현해야 하는 상황 아니에요?”
하녀 중 한 명이 쏘아붙이듯 말했다·
“이번에 수습하면서 보니까 빚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면서요· 마인의 습격이 없었으면 계속 뻔뻔하게 숨겼을 거 아니야·”
“그건 그래· 빚을 꼭꼭 숨기고 혼약을 한다는 게 말이야? 미친 거지· 사기야 사기·”
또 한 번 머리가 빠직 하고 깨지는 듯한 감각·
이야기의 배경이 자신의 신분이 하녀들의 시선이· 스칼렛은 한순간에 모조리 이해되었다·
자신은 유디트의 인물이 아니다·
그녀는 플란과 남매가 아니며·
오히려····
“···!”
놀란 스칼렛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뇌를 거치지 않고 오직 본능이 시킨 움직임이었다· 하녀들 역시 깜짝 놀라하며 행동을 멈추었다·
“····”
소리라는 개념이 절멸한 듯 고요해졌다·
자신보다 키가 훨씬 큰 하녀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오로지 스칼렛만을 바라본다·
경멸이 어려 차가운 눈빛이었고 스칼렛의 기억 어딘가에 각인된 공포를 일깨우는 시선이었다·
기억은 계속해서 흘러들어온다·
유디트의 저택에 방문할 때마다 이러했다·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그녀에게는 늘 이러한 시선이 달라붙었다·
스칼렛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이 딛고 서 있는 바닥이 끝도 없이 아래로 꺼지는 감각· 하녀들은 자신들의 일에 마저 집중하기 시작했다·
“왜 저래? 꼴에 자기 이야기라고·”
“도련님만 불쌍하게 됐어요· 근데 어차피 파혼하시겠죠? 안 그럼 말이 안 되는데·”
그때 응접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문을 열고 나타난 것은 플란이었고 하녀들은 급하게 헛기침하며 고개를 숙였다·
“오 오셨어요· 도련님·”
플란은 아무 말 없이 하녀들을 응시했다· 그들은 안절부절못하더니 이내 빠르게 자리를 비운다·
그렇게 둘만 남게 된 응접실에서 플란은 스칼렛의 건너편에 착석했다·
스칼렛은 고개를 숙인 채 들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것이 비록 기억의 편린에 불과하다고는 하나 자신의 태생을 떠올려낸 지금· 플란의 모습을 한 무언가를 어떤 시선으로 마주 보아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쿨럭─!
또 한 차례 피를 토해냈다· 이번에는 통증이 극심하여 미처 손으로 가리지도 못했다·
“괜찮아? 왜 여기까지 왔어 스칼렛· 내가 간다고 했잖아· 몸 안 좋은 거 뻔히 다 아는데····”
“····”
스칼렛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다· 턱을 타고 흐르는 피를 닦지도 못한 채 그저 호흡을 고른다·
그렇게 제 허벅지만을 바라보던 시야에 어느 순간 플란의 손이 불쑥 들어온다·
손바닥에는 무언가가 올려져 있었다· 아마 손수건일 것이다·
그러나·
“혼자서 닦을 수 있겠어? 아니면 닦아줄까?”
“····”
스칼렛의 시야에 그것 따윈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플란의 손끝을 붙잡는다· 예상 못한 행동이었는지 잠시 플란의 손이 뻣뻣해졌다·
“왜 그래? 스칼렛·”
“반지····”
스칼렛은 플란의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것과 똑같은 것· 너무 어렸을 때의 일이고 이제야 막 기억이 났는데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너···· 왜 왜 나랑 약혼했지?”
“응?”
“가족도 없고 언제 죽어버릴지도 모르고 파혼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는데· 도대체 왜····”
“이제 머리도 아픈 거야?”
플란이 검지로 스칼렛의 이마를 콕 밀었다· 그제야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친다·
“스칼렛은 스칼렛이야· 그렇잖아·”
말문이 막혔다· 하려던 말은 잊어버렸다·
스칼렛은 기가 차다는 듯한 표정이 되어 플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린 플란은 태연하고 다 자란 스칼렛은 혼란스럽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이상한 상황이었다·
◈
기억 공간에서의 표류가 시작되었다·
어느 순간 기억 흡수가 돌연히 멈춘 탓이다·
서서히 떠오르던 기억들이 더 이상 없어지게 되면서 스칼렛은 기억 공간에서 전전긍긍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한 와중에도 빌어먹을 저주는 스칼렛에게서 신체의 자유를 박탈했다·
그리하여 유디트 저택의 방·
“으─·”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감내할 수 없을 것 같은 고통에 신음하며 스칼렛은 침대에 누운 채로 꼼짝도 하지 못하는 신세였다·
“오늘을 넘기기 힘들 거래요·”
물수건을 갈아주던 하녀가 중얼거렸다· 곁에 있던 다른 하녀가 그녀의 어깨를 툭 친다·
“그래도 그렇지· 당사자가 듣고 있잖아·”
“본인부터가 잘 알고 있을걸요? 고명하다는 마법사들도 해주에 실패 신성력도 먹히질 않고 마녀들은 엉뚱한 해결책만 내놓으니····”
쭈우욱 하는 소리와 함께 하녀가 물수건을 비틀어서 쥐어짠다·
“이 정도면 우리도 최선을 다했잖아요· 사기꾼을 벌써 며칠째 밤새가면서 간호한 거야?”
빌어처먹을·
그렇게 중얼거리고 싶었지만 입술을 달싹일 여력조차도 없었다· 하녀의 말대로 스칼렛은 본인의 몸 상태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오늘 하루·
오늘 하루라는 말도 길다·
머지않아 숨이 끊어지리라· 분명·
마음 같아서는 1초라도 더 버텨내고 싶다·
매초 흘러들어오던 기억들 매초 되살아나던 감정들· 그러한 것들을 조금이라도 더 느낀 채로 열람을 마무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기억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 시기를 극복해냈기에 잔불의 기사인 지금의 자신이 있는 것 아니겠는가·
도대체 어떻게 이토록 끔찍한 저주를 극복해내고 살아남았는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자리를 비켜줘·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해·”
귀에 들려오는 것은 플란의 목소리· 동시에 하녀들이 우수수 방을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슬쩍 옆으로 돌리자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플란의 모습이 보였다·
“····”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통에 몸부림치는 스칼렛 곁에 붙어 가만히 있어 준다·
“···왜·”
“····”
말을 걸어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제는 스칼렛에게도 되물을 기력이 없었다· 가쁜 숨을 헐떡이며 가만히 눈을 감는다· 그렇게 고통을 이겨내는 데에만 집중하기를 수 분·
마침내 플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정말 이 방법밖에 없겠어·”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나름대로 결연한 의지를 다진 것처럼 말이다·
삐이이─
그러는 사이에도 이명은 커져만 갔다· 머리는 타버릴 듯한 고온으로 달아오르기 시작했고 스칼렛의 정신 역시 혼미해졌다·
그러한 와중 스칼렛은 무언가를 깨달았다·
“방···· 법···?”
몰라서가 아니라 설마 하는 마음에 되물었다·
스칼렛이 그간 잔불의 기사로서 있을 수 있었던 이유· 만약 그 이유가 그녀가 떠올린 추측과 들어맞는다면····
“맞아· 스칼렛·”
스칼렛의 생각이 맞다는 듯 플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작열을 넘겨줄게· 그 방법밖에 없어·”
작열·
본인이 불꽃을 다루게 된 경위가 이러했나·
그 말을 듣자마자 심장이 쿵쾅거리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눈동자는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미친 듯이 뒤흔들렸다·
“알았지? 나한테 맡겨·”
플란의 말에 스칼렛은 고장 난 듯 고개를 저었다·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아도 어떻게든 저었다·
“아니 아니야· 안 돼· 그건 안 돼····”
“왜?”
플란이 되물었다·
스칼렛은 명확한 답변을 내뱉을 수 없었다·
본인의 생각을 스스로조차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표현할만한 여력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순간에도 매 호흡이 마지막 호흡 같았다·
소년은 그런 스칼렛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의 생각을 전부 이해하고 있다는 듯이·
“아하·”
삐이이이이─
그러나 저주는 둘의 대화가 이어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귀가 찢어질 듯한 이명이 울린다·
삐이이이이─
의식이 끊길 것 같은 와중에도 스칼렛은 플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플란은 안심하라는 듯 웃어주었다·
“····”
찰나의 순간·
주마등이 스쳐 가듯 세상이 느려졌다·
동시에 스칼렛은 두려웠다·
눈앞의 그가 겨우 기억의 편린에 불과하더라도 스칼렛은 조금 더 대화를 나누어보고 싶었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고 그것을 전부 확인하고 싶었다·
기억을 되찾는다 해도 이대로 열람을 마친다면 이때의 플란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두 번 다시 없을 테지·
“괜찮아· 스칼렛·”
“···!”
따뜻한 음색으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플란은 스칼렛의 정수리에 손바닥을 얹었다·
그녀는 플란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는 자신을 향해 웃어주고 있었다·
“고유 능력 같은 거 없어도·”
흐려져 가는 세상·
스칼렛은 플란의 얼굴을 바라보려 애썼다·
새하얘져 가는 시야 속에서 그의 얼굴은 유독 기이하리만치 선명하다·
그의 미소 목소리 표정· 스칼렛은 모든 것을 전부 잊고 있었다· 동시에 그녀는 플란에게 그러한 얼굴을 해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음을 깨달았다·
“언제라도 나는 항상 플란이야· 알잖아?”
“····”
스칼렛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하려던 말도 잊었다·
모든 기억이 되살아났다·
피가 터지도록 아랫입술을 짓씹어 파도처럼 밀려드는 감정의 격류를 가까스로 참아냈다·
“그랬었···· 구나····”
아니 참아내지 못했다· 그녀의 몸이 아주 크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가느다랗다·
“그랬던 거였어····”
감정의 격류는 참으면 참을수록 강해져 어느덧 억누를 수 없는 해일의 크기를 이루었다·
“너는 내게 그런 얼굴로 그런 목소리로·”
그녀의 볼을 타고서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그런 말을 했었어····”
플란이 그런 스칼렛의 손을 감싸 쥐었다·
소녀는 가만히 소년을 마주 보았다· 스칼렛의 몸 안에 더없이 따뜻한 화염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안녕 스칼렛·”
플란의 짧은 인사를 끝으로·
쏴아아아─
눈앞이 하얘지며 「열람」은 끝을 맞이했다·
◈
“욱─!”
열람을 마치고 초상화 밖으로 튀어나온 직후 스칼렛은 핏덩이를 한 움큼이나 토해냈다·
“으 으으·”
슬슬 현실과 환상이 쉽사리 분간되지 않는다· 정신력을 너무나도 크게 소모한 탓이었다·
“후우 후우우····”
비틀거리던 스칼렛은 결국 벽에 몸을 기대었다· 육체적인 피로도 피로지만 정신적으로 받은 충격은 그것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했다·
“위험했소이다·”
리브라의 편린이 중얼거렸다·
“기억 속을 영원히 표류하는 것· 조금만 더 늦게 나왔더라면 정말 그리될 뻔했소·”
스칼렛은 아직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남아있는 의문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녀는 유디트의 장녀라는 사실에 왜 단 한 번도 의문을 품지 않았는가·
플란의 존재를 어째서 잊었는가·
···어째서 그를 그토록 미워했는가·
“돌려주시겠소이까·”
리브라의 편린이 손 하나를 내밀었다·
“열람은 이 정도면 충분하외다· 아니 애초에 이 이상은 불가능하오· 무리하면 목숨을 잃게 될 것이라며 본체가 몇 번이고 경고하더이다·”
“그래·”
스칼렛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내가 설령 죽는 한이 있더라도····”
돌려주기 위해 들어 올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진실을 알아야겠다·”
그녀가 그리 중얼거린 순간 눈 깜빡할 순간 검날이 플란의 초상화에 깊숙히 박혀 들었다·
“···!”
리브라의 편린이 눈을 치떴다·
“안 된다니까!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그녀의 말은 끝까지 듣지도 못했다·
스칼렛은 다시 한번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끼며 플란의 초상화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뼈가 으스러지고 온몸의 신경이 끊어지는 듯하다· 죽음보다도 고통스럽지만 그녀는 기어코 이를 악물어가며 버텼다·
그리고 마침내·
─작열은 성공적으로 이식되었더이다·
리브라의 덤덤한 목소리·
시간은 고요한 새벽·
공간은 유디트의 저택·
─한데 저주를 상쇄하는 데에 대부분의 힘이 쓰이고 있소· 스칼렛의 불꽃은 타올라봤자 고작 잔불에 머무를 것이외다·
역시 플란은 스칼렛게 작열을 전승시켰다·
플란은 도대체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스칼렛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힘조차 없었다·
그리고 이 열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기억에도 내가 손을 썼소· 플란 그대는 이 정도면 만족하시겠소이까·
그렇게 묻는 리브라의 목소리조차도 조금의 당황이 섞여 있었다· 테오도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작열을 유디트의 밖으로 새어 나가게 둘 수는 없지· 스칼렛은 어차피 친족이 남아있지 않고 유디트의 장녀로서 살게 하는 것이 서로에게 최선일 것이다·
─그대가 아니라 나는 플란에게 물었소이다·
리브라와 테오도르의 시선이 플란에게로 향한다· 스칼렛 역시 그의 대답만을 기다렸다·
플란은 입을 열지 않는다·
그의 온몸을 붕대가 뒤덮고 있었다· 곳곳이 붉었으니 척 보기에도 멀쩡하지는 않은 몰골이었다·
리브라의 얼굴이 한층 더 진지해졌다·
─그대는 지금부터 약혼자를 누나라고 부르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오· 후회하지 않겠소?
스칼렛은 휘청거리며 벽을 짚었다·
무엇이든 마주할 각오가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착각이었다·
쿵쾅거리는 심장과 바싹 메마른 입안· 머리는 터져버릴 것 같고 식은땀이 온몸을 적신다·
─물론 후회하는 것도 있습니다·
플란의 한 마디·
스칼렛은 침을 꿀꺽 삼켰다·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검을 쥐었던 것을 후회합니다·
─그건 어째서니·
되묻는 목소리의 주인은 에블린 유디트· 스칼렛의 어머니···· 아니 그냥 작열의 기사였다·
─검이라는 것은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플란이 제 손바닥을 조용히 내려다본다·
─결국 스칼렛을 구해낸 것은 고유 능력이었습니다· 제 검술이 아니라요· 기사로서의 저는 스칼렛의 적을 베어내는 것이 고작이겠죠·
─그걸 깨달았구나·
에블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히 흐뭇해하는 얼굴이었다·
─앞으로는 진정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기적에 가까운 무언가를요·
─소중한 걸 지키는 증명이라니 좋아· 그리고 그 방식은 마법이었던 모양이네·
마법·
마법이라고?
그의 책상 한편에 펼쳐진 노트를 에블린이 쳐다본다· 그런 에블린을 쳐다보는 스칼렛의 표정은 더더욱 멍해진다·
무엇을 듣고 있는 것인가 들어도 되는가· 심지어 그런 생각까지도 들기 시작했다·
“방식이 마법···?”
스칼렛이 그리 중얼거린 순간·
─그래· 응원할 게 플란·
에블린이 그의 어깨를 두드린다·
─네 뜻대로 되어 꼭 스칼렛을 지켜주렴·
“···?”
스칼렛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도무지 상황이 이해되질 않아서 표정이 자연스레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녀의 눈동자가 본능적으로 굴러갔고·
시야에는 소년의 일기장이 들어온다·
─대마법사가 되고 싶다·
소년의 일기장에는 그리 적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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