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9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평화로운 새벽·
나는 기숙사의 책상에 앉아 계획서를 살핀다· 마탑을 건설하기 위해 점검해야 할 것도 앞으로 해야 할 것도 대단히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다’와 ‘어렵다’는 엄연히 다른 뜻을 가진 단어이다· 바꾸어 말해 일이 많을지언정 결코 계획의 실현이 어렵지는 않으리라·
“흠·”
상상(想像)이란 본래 마법사의 전문 분야기에 나는 계획서를 살피며 동시에 머릿속으로는 미래의 모습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마법을 향한 열정이 있는 자라면 누구라도 그 총체를 자유로이 한껏 누릴 수 있게 되리라·
대충 그러한 생각을 하던 때·
“으아아····”
고양이처럼 몸을 부르르 떨면서 유시아가 있는 힘껏 기지개를 켰다· 그녀는 여태껏 바닥에 다소곳하게 앉아서 서류들을 살피던 중이다·
아니 차라리 서류 더미에 파묻혀있다고 표현하는 편이 올바를 듯하다· 사실상 종이의 바다에 두둥실 떠올라있는 수준이었으니까·
“플란 경~ 이거 정말로 끝이 없습니다····”
유시아가 칭얼거렸다·
“끝은 있다·”
“예···· 그걸 모르는 것은 아니옵고····”
유시아가 한숨을 푹 내쉬면서 서류들을 허공에 하나하나 띄워 올린다· 논문의 요약이라면 베키에게 시켰겠으나 현재 그녀가 맡은 것은 조금 결이 다르다·
나는 유시아에게 투자자 명단을 작성하도록 지시했다· 신상부터 금액까지 세세하게 기록해야 한다는 조건 탓인지 이 작업은 이틀째 끝을 보지 못하고 있는 채였다·
물론 마이에브에게 시킬 수도 있었지만····
나는 벽면을 바라보았다·
「실패작」
[*다시는 암살 시도를 하지 않겠습니다·]
[*아 제발요·]
그녀는 한동안 액자 안에서 지내게 될 것이다·
나는 기록지 위로 마법을 덧입히기 시작했다·
이 기록지 한 장이 앞으로 마탑의 건설까지 아주 지대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나는 차분하게 마나를 끌어올리며 유시아에게 물었다·
“얼마나 더 걸릴 것 같나·”
“내일도 끝을 장담할 수 없겠습니다···· 마탑에 투자하겠다는 사람이 상상 이상으로 많고 심지어 지금도 계속 늘어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것 좀 보라는 듯 유시아가 물장구라도 치는 것처럼 양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종이들이 주변에 파도처럼 흩날린다·
이내 유시아가 옅은 미소를 머금는다·
“그래도 기쁜 마음입니다· 단체 취재 이후 플란 경을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아졌다는 뜻일 테니까요·”
“마음에 들어 하는지까지는 모르겠군· 하지만 투자할 마음은 생긴 모양이지·”
“아 단체 취재 이야기를 하니까 문득 생각이 나는 건데 말입니다·”
유시아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묻는다·
“플란 경 일전에 제가 건네드린 자료는 한 번 살펴보셨습니까?”
“그래·”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유 능력 ‘작열’의 기원 스칼렛이 유디트의 혈통을 이어받지 않았다는 것· 예상외의 정보들이 가득했지만 결국 내가 크게 신경 써야만 하는 것은 없었다·
바꾸어 말해 내게 제약이 될만한 것이 없다·
“저도 단체 취재를 보면서 많이 놀랐습니다·”
유시아가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서 말을 잇는다·
“사실 플란 경이 단체 취재에서 가문을 밝힐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로지 마탑에 관한 말씀만 하셨죠·”
“나는 마법사다·”
조금의 간격조차 없이 대답을 뱉었다·
“가문보단 마법에 관한 이야기가 우선이지·”
“마법사···· 플란 경은 마법사····”
내 말을 한동안 곱씹다가 유시아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예· 역시 플란 경은 늘 플란 경 다우십니다·”
유시아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플란 경 저는 궁금한 것이 하나 남아있습니다·”
“들어주지·”
고개를 끄덕였다·
밤낮으로 명단 작성을 돕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가벼운 질문에 대한 답 정도는 줄 생각이다·
“대표 중 누가 가장 마음에 드냐던 질문 혹시 플란 경께서는 기억하고 계십니까?”
“궁금하다는 하나가 고작 그거였나·”
“앗 아닙니다·”
“그럼 궁금한 게 하나가 아니라는 말인 건지·”
유시아가 눈을 두어번 깜빡였다·
“아아 그렇군요· 질문을 바꿔야겠습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녀의 눈동자가 천장으로 향했다·
“어디 보자····”
턱에 검지를 올리고서 한참을 고민하더니·
“···플란 경은 누가 마음에 드십니까?”
잠시 정적이 내려앉는다·
다음 순간 허공에서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다·
유시아의 얼굴이 빠르게 붉어진다· 황금빛 눈동자가 내 눈을 마주 보지 못하고 사선으로 굴러가더니 이내 그녀가 빠르게 고개를 젓는다·
“아무 아무것도 아닙니다· 원점으로 돌아와서· 투자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다행입니다·”
“다행이라·”
나는 혀를 찼다·
“아직은 턱없이 부족하다· 이 정도로는 안 돼·”
“아 그것도 그렇군요· 마탑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정말 천문학적인 비용이 필요하니까요·”
유시아가 시무룩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쩐지 그녀의 앞머리도 더듬이처럼 축 처진 듯했다·
“플란 경 제가 도울 방법이 없겠습니까?”
“투자자 명단이나 실수 없이 작성하도록·”
“흐음···· 이럴 때는 제 재력이 아쉽습니다·”
유시아가 어깨를 으쓱인다·
“마음 같아서는 야광으로 반짝이는 형광 마탑을 마구마구 짓고 싶습니다·”
“그만둬라·”
하지만 대답한 직후 나는 자신의 말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 한편에서 보란 듯이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야광·
야광이라·
“제법 참작할 여지가 있다·”
◈
새벽이 깊어지는 와중에도 나는 오로지 마법을 덧입히는 데에만 몰두했다·
술식을 해독한 이에게 내가 제작한 입체 그림을 감상하도록 장치하는 것이니 사실상 기록지 위에서 펼치는 예술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입체 그림에 야광의 요소를 덧입혔다·
“난도가 상당하다·”
정교하고 세밀한 술식들을 섞다 보니 난이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했다· 아고라 보드에 당장 실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하지만 난도가 높아야만 옳을 것이다·”
극악의 난이도로 우월감을 느끼겠다는 알량한 심산이 아니다· 그저 이 기록지에는 해독이 어려워야만 하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유시아·”
나는 유시아를 불렀다·
서류 더미에 뒤덮여서 끙끙거리던 유시아는 눈 깜빡할 사이 정면에 서서 대기 중이었다·
“플란 경 부르셨습니까!”
그녀가 황금빛 눈동자를 반짝거리면서 내 다음 말을 기다린다· 몸 뒤에서는 마치 보이지 않는 강아지 꼬리가 살랑이는 듯했다·
“대여가 필요한 도서가 몇 권 있다·”
“마법서 말씀이십니까?”
“기록지에 관한 이론서 전부 그리고 도색(塗色)에 관한 것도 전부·”
이 세계의 기록지는 어느 정도의 마법까지 머금을 수 있는가 색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는가·
···일일이 시험하기엔 시간이 아깝다·
이런 부분에서는 도서를 활용하는 것이 옳겠지·
“예· 저에게 맡기십시오·”
유시아는 금세 되돌아왔다· 책이 얼굴을 가릴 정도로 탑처럼 쌓아서는 양팔로 마법서를 있는 힘껏 끌어안은 채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 있습니다!”
“음·”
나는 그것들 전부를 허공에 펼친 다음 필요한 것들을 족족 찾아내며 작업에 열중했다·
그리고 마침내·
“···됐다·”
원하던 예술의 결실을 볼 수 있었다·
진정한 명품이란 그 가치를 알아보는 소수의 사람끼리만 향유할 수 있는 고급품· 나는 이 기록지에 담긴 것이 그리되도록 의도했다·
해독하는 이는 얼마 없겠지만 해독한 뒤 감탄을 토하지 않는 이도 없을 것이다· 요컨대 노력한다면 결코 배신감을 느끼는 일이 없으리라·
“유시아· 이게 기록지 중 가장 상등품이었나·”
“그럼요· 가장 좋은 겁니다·”
“열 장 정도만 더 부탁하지·”
내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유시아는 문밖으로 쪼르르 달려 나갔다·
딱─!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첫 번째 변형·
그러자 입체 그림이 허공에 떠오른다·
어느 봄날 커다란 꽃 한 송이가 개화하듯 무엇보다도 선명하게 구현되는 마법이었다·
그려지는 것은 과거 마법 학부의 모습· 서적에 있는 것을 참조하여 조형했다·
딱─!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겼다· 두 번째 변형·
그러자 마나가 수채화처럼 번지며 현재 마법 학부의 모습을 나타낸다·
그 전부를 푸른색으로만 표현하지 않았다· 기록지의 성분과 도색 이론을 참조하여 하나하나 현실과 일치하도록 채색했다·
그리고 중요한 건·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 번 더 손가락을 튕기면 이 입체 그림은 차원이 다른 모습으로 또 한 번 변모하게 된다·
세 번째 변형·
이 세계에서는 아직 생소한 개념·
그렇게 또 한 번 손가락을 튕기려는 찰나·
“플란 경! 저 왔습니다!”
유시아가 기록지 두루마리를 들고 등장했다· 나는 그림을 한순간에 지워버렸다·
“유시아·”
나는 기록지 열 개에 추가로 이 예술품을 담은 뒤 그 중 다섯개를 유시아에게 건넸다·
“이게 뭡니까?”
“정오가 되거든 이걸 총장실에 전달해라·”
“전달· 예! 덧붙일 말은 없습니까?”
왜 전달 해야 하는지는 묻지 않는다· 나는 유시아의 그런 태도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전달만 하면 된다·”
지시사항은 그게 끝이었다·
‘최대한 많은 사람이 보게 할 것·’이라는 문구를 첫 번째 두루마리에 적어두었으니 총장 코네트가 나머지는 알아서 할 터다·
나는 문득 책상 한편에 놓여있는 황금색의 초대장을 들어 올려 살폈다· 그러고 보니 날짜가 고작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
초대장이라고는 해도 사실 강압적이다·
둘째 황녀 오로라가 자신의 이름을 달아두고 황궁의 방문을 요구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시선은····
“이걸로 충분하겠지·”
여전히 두루마리에 향해있었다·
◈
다음날 플란이 황궁에 방문할 날이 되었다·
내실의 권좌에 앉은 둘째 황녀 오로라는 눈을 감고서 황궁의 분위기를 느꼈다· 오늘따라 황실이 크게 소란스러워서 거슬렸다·
“···다들 잠이 덜 깬 것인가·”
그러나 잠이 덜 깬 것이라면 고요해야 옳을 터·
오로라의 시선이 호위 기사 반에게로 향했다·
“반·”
“예· 황녀님·”
반이 절도있게 고개를 숙였다·
“황궁이 왜 이리 소란스러운 것이냐·”
“플란 때문입니다·”
“고작 방문하는 것으로 호들갑인가·”
쯧· 오로라가 혀를 찼다· 그러나 잠시 후 반은 뜻밖의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방문하는 것 때문이 아닙니다· 오전에 공개된 기록지때문에 학계가 온통 난리입니다·”
“기록지? 학계가 난리?”
“예·”
오로라가 눈을 깜빡였다·
초승달의 동공이 마침내 반달의 모습을 띠게 되었을 때· 그녀가 한쪽에 서 있던 궁정 마법사에게 물었다·
“너는 그 기록지를 보았느냐·”
“예 황녀님· 보았습니다·”
“그 종이 쪼가리가 실로 대단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황녀님·”
궁정 마법사가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놀람이 가득했다·
“술식이 총 세 가지 단계를 거치며 변형되며 한 번 한 번 변형될 때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차원의 영역으로 들어섭니다·”
그 뒤로도 그는 설명을 늘어놓았다·
쉽게 말해 고작 한 장의 기록지지만 안에 품고 있는 내용은 몇백장의 분량이라는 것이었다·
“···너는 진정 내게 진실을 고하고 있느냐·”
“예· 마지막 변형은 아직 해독하지도 못했습니다· 이틀은 더 소요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진땀을 뻘뻘 흘리면서 대답했다·
진땀을 흘리는 이유가 자신이 아닌 플란의 마법이라는 것이 오로라는 제법 흥미로웠다·
“그렇단 말이지·”
결국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놈이 도착하면 직접 시연할 것을 명해야겠다·”
어차피 플란이 슬슬 도착할 시간이 되었다·
그런데 왜인가· 오로라가 그리 말하자마자 관료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는 것이었다·
“····”
오로라는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핀 뒤 다시 입술을 떼었다·
“멍청한 표정들을 짓는구나· 그것도 단체로·”
오로라의 중얼거림에 누구도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조금 더 표정을 구겼다·
“반· 너는 이러한 작태를 어떻게 생각하나·”
“그게 황녀님·”
반이 침을 꿀꺽 삼킨 뒤 말을 잇는다·
“플란이····”
“말을 똑바로 해라· 지금 기분이 별로 안 좋다·”
“플란이 기록지로 오늘 출석을 대신하겠답니다· 관료들에게 그리 전달했습니다·”
“대단하구나· 대단해· 참으로 대단하다·”
오로라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싸늘하게 정색한다·
“당장 잡아 오도록 해라· 눈알이 뽑히고 몸에 검날이 박혀 들어가도 과연 그리 말할 수 있을까·”
“황녀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사형당하는 것도 기꺼이 감수하겠답니다·”
“····”
그러자 오로라는 잠시 고민했다·
미래를 보는 ‘예지’가 플란과 관련해서는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녀조차도 플란이 사형당하는지 아닌지를 알 수 없다· 바꾸어 말해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본인이 직접 기록지를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길고 긴 고민 끝에서·
그녀는 결국 명했다·
“가져오너라·”
‘데려오너라’가 아닌 ‘가져오너라’·
그 뜻을 이해한 궁정 마법사가 이내 허겁지겁 플란의 마법이 담긴 기록지를 가져왔다·
둥─
그때 내실의 북이 울렸다·
원래라면 플란이 도착했어야 하는 시간이 되었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실제로 당도한 것은 고작 마법이 담긴 기록지 하나·
오로라는 두루마리를 펼쳤다·
황족으로서 날 때부터 지녔던 고결한 자신감은 그 간단한 동작에도 확실히 배어있었다·
“흐음·”
그녀는 기록지의 술식을 살폈다·
그녀는 마법과 검술을 비롯하여 모든 분야에 천부적이다· 그런데도 매번 직접 나서지 않는 것은 그저 권태가 이유였을 뿐·
그러니 술식의 해독 따위는 오로라가 마음을 먹는 순간 ‘별것 아닌 문제’가 된다·
그리고 오로라는 지금 마음을 먹은 참이다·
“····”
그렇게 기록지에 담긴 술식을 살핀 순간·
빼곡하게 채워진 검은 회로와 조건을 본 순간·
“이 놈은····”
오로라의 동공이 보름달을 품었다·
“사형으로는 못 끝내겠구나·”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128화에 스칼렛 삽화가 추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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