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1
추가로 이틀이 지난 지금· 이른 아침·
나는 베르켈의 위험 지역에서 얻어낸 보물 고대 룬어의 힘이 담긴 동력원을 분석하고 있다·
기록지에 담아낸 입체 그림은 역시나 화제가 되어주었다·
나는 20개를 추가로 제작한 뒤 그것이 경매에 출품되도록 마법 학부에 요구했는데 너무나 당연하게도 긍정적인 답변을 돌려받았다·
물론 이 20개에는 몇 가지 입체 요소를 추가로 넣었다· 이른바 ‘한정본’이라는 것으로 판매 수익은 전부 마탑의 건설 자금으로 사용할 생각이다·
그러한 과정들을 거치고 나니 내게도 비로소 동력원에만 집중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겨났다·
기숙사에서 이틀 내내 심혈을 기울였다·
바이올렛으로부터 건네받은 연구서와 내가 기존에 알던 지식을 비교 대조했고 동시에 많은 수의 논문들을 발굴하여 참조했다·
또한 박람회장에서 얻었던 액자 형식의 보물·
「꿈」에 담긴 고대 룬어까지 활용해가면서 살핀 결과 추상적이고 아득했던 동력원의 윤곽이 마침내 드러나기 시작했다·
“과연····”
실로 어마어마한 힘을 품은 물건이었다·
처음에는 연성 계열의 동력원이라는 것 정도만 알았으나 이틀 내내 매진한 끝에 알게 되었다·
이 동력원은 ‘연성’ 그 자체에 가깝다는 것을·
연성은 기본적으로 이해 분해 재구성의 3단계로 이루어지는데 어마어마한 힘을 품은 만큼 3단계의 활용 범위도 높을 것이라 장담한다·
일례로 필요에 따라 마탑의 외형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또한 내부 공간도 자유로이 용도에 맞게 변형할 수 있을 터이다·
“결과값이 대단하겠으나····”
이러한 가정은 아직 ‘기대’나 ‘상상’의 수준에 머무른다· 실현되는 것은 연구가 완전히 마무리된 다음의 일이니까·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겠어·”
그리 중얼거리며 이번에는 초대장을 살폈다· 근래 나를 향해오는 우편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이건 황금색이었기에 유별나게 눈에 띄었다·
또한 무시할 수도 없었다· 황실의 것이니까·
“흐음·”
활자들이 한 장을 빼곡 채우고 있었지만 담고 있는 내용은 너무나도 단순했다·
“사형과 검증 강연· 둘 중 하나를 고를 것·”
사형보다는 검증 강연을 하는 편이 낫겠지·
그렇게 생각한 그때·
“쿨럭─!”
사레가 들렸는지 기숙사 한편에 있던 마이에브가 기침을 내뱉으며 가슴팍을 두드렸다·
그녀는 그릇에 피를 담아두고는 수프처럼 떠먹던 중이었다· 요컨대 식사 중이다·
나는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얌전히 먹어라·”
“····”
마이에브가 묘하게 불만이 섞인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불만이 있을 법도 했다· 내 노예가 된 이후 그녀는 단 한 번도 인간의 피를 섭취하지 못했으니· 지금도 짐승의 피나 떠먹고 있을 뿐이다·
그녀가 스푼을 몇 번 더 움직이더니 말했다·
“그 귀한 동력원을 아주 보란 듯이 꺼내놓고 연구하시니 제가 노예로서 참 걱정이 되네요·”
“염려가 있다면 수련을 해라· 쓰레기 같은 암살 방식이나 고안하니 늘 걱정이 태산이지·”
“그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니라····”
“그럼·”
“····”
마이에브가 입을 꾹 다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잔뜩 있는 것처럼 입술을 한참 오물거리다가 이내 소심하게 대꾸한다·
“제 말은 혈귀들이 고대 룬어에 얼마나 크게 집착하는지 뻔히 아시잖아요· 주인·”
나는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허공에서 우리의 시선이 부딪힌다·
마이에브의 붉은 눈동자가 슬그머니 깔렸다·
“···아는 게 많으시다고 칭찬한 거예요·”
“마이에브 너는 다른 혈귀들이 두렵나·”
“주인· 그럼 주인은 그게 신경도 안 쓰이세요?”
그 질문에 나는 오히려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인간은 마나를 매개로 마법을 사용하지만 혈귀들은 생명력을 매개로 흑마법을 사용한다·
마법을 다른 존재들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구축해온 그들에게 나는 흥미가 가득할 뿐이다·
방심하는 것과는 다르다· 나는 그들을 깊게 이해하고 싶을 뿐이고 이해도가 높아질수록 사고가 벌어질 확률도 자연스레 낮아질 터이니·
나는 마이에브에게 말했다·
“너를 혈귀들의 품으로 돌려보내야겠다·”
“돌려보내 주신다고요?”
마이에브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녀가 들고 있던 그릇과 스푼을 놓쳐버렸지만 그건 내가 염동으로 적당히 붙잡아서 치웠다·
“혈귀들의 계획이 무엇인지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지· 낱낱이 조사해서 내게 이르도록·”
“아니 하아····”
마이에브가 손으로 자신의 눈가를 덮는다· 세상을 잃은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는 건 덤이었다·
“수행이 불가하다 판단되면 말해라· 쓸모가 없는 너를 이 자리에서 처분하지·”
“저 마이에브에요· 수행 능력이 없다니·”
마이에브가 발끈했다· 동시에 투덜거린다·
“하지만 예전보다 어렵긴 하겠네요· 지금은 누구 덕분에 노예 각인이 보란 듯이 있어서·”
그녀가 이것 좀 보라는 듯 내게 손등을 보인다·
나는 그녀의 주변으로 액자 틀을 생성시켰다·
“쉬어라· 마이에브·”
“각인도 새겨졌으니 이제 더 열심히 하겠다는 뜻이었어요· 위장술 하면 마이에브· 저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해야 할 일은 또 있다· 너는 마셀린 상회의 상단 주로 위장한 적이 있을 테지·”
“네· 마법 학부의 투자를 제가 독점하고 있죠·”
“앞으로는 관리에 더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이미 체계적으로 잘 관리하고 있어요·”
마이에브가 손가락을 튕기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장부가 나타났다·
“금전적인 부분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럼 뭘 관리하라는 건지 이해를 못했어요·”
“투자자들에게 모인 금화가 어떻게 쓰이게 될지를 세세하게 설명해라· 손 편지로 감사 인사도 전해· 받은 게 있다면 응당 돌려주어야지·”
마이에브가 표정을 구겼다·
“손 편지····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 안 되어도 해야지·”
“왜죠·”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상하좌우로 액자 틀이 달라붙었다· 조그만 감옥에 갇힌 마이에브가 다급하게 외쳤다·
“아 하면 되잖아요· 하면···!”
◈
‘디페시’는 깊고 아득한 심해에서 맥동하는 공간 오로지 마법으로만 이루어진 공동 사회·
수중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상의 도시 형태가 구현되어있는 이곳은 가히 마법 연구의 총체·
디페시 내부에서는 자신의 마법으로 세상이 들썩이기를 바라는 기인들이 흩어져 존재한다·
‘대륙에 존재하는 최상위 마법은 전부 디페시에서 창안되었다’는 말이 있을 만큼 이곳의 구성원들은 고차원적인 마법 연구를 꿈꾸는 것이다·
이들은 온종일 연구에 매진하고 서로를 견제하고 안부조차 묻지 않는 식으로 지내지만····
현재 그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모여있었다· 한창 진행 중인 경매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원인은 바로 아카데미의 한 학생이 만들어낸 입체 그림의 한정본· 고작 한 장의 기록지·
“현재 989명의 인원이 1000개의 금화를 제시했습니다· 10분의 휴식 뒤 1200개의 금화로 경매가 재시작됩니다·”
이들이 거액을 들여 얻고자 하는 것은 사치품 따위가 아니다· 플란의 기록지에 담겨있는 야광 입체 그림의 한정본이다·
“10분 뒤 2000개로 경매가 재시작됩니다·”
디페시의 상주 인원이 1001명임을 고려하였을 때 989명의 참여는 실로 엄청난 성과다·
경매는 별다른 소란 없이 이어진다·
각자가 배부받은 명함 크기의 기록지에 금화의 개수를 기재하기만 하면 끝이니 딱히 목소리를 낼 필요가 없다·
“예· 4000개에 20명· 축하드립니다·”
플란의 입체 그림은 아카데미의 과거 현재 미래를 훌륭하게 담아냈다는 점에서 디페시 마법사들의 관심을 끌었다·
특히 ‘미래’를 조형하는 과정에서의 다각도적인 접근에서는 관심뿐 아니라 감탄까지도 얻었다·
“이것으로 경매를 마칩니다·”
낙찰자들에게 기록지 한정본이 배부되며 마침내 경매도 끝을 맞이했다·
20명 중 한 명인 황실의 재무관 레일리는 다행이라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굉장히 치열했구만 이게 그 정도인가?”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디페시는 오로지 마법으로 이루어진 공동 사회이기에 제아무리 황실이라도 경매품을 선점할 수 없었다·
그래도 황실을 향한 혜택이 있기는 했으니 3시간에서 1시간을 더해 총 4시간 동안 디페시에 체류할 수 있다는 점이 바로 그러했다·
바로 그때였다·
“예· 마지막 변형의 모습만으로도 이 기록지에는 대단한 소장 가치가 있지요·”
옆에서 누군가가 레일리의 중얼거림을 받았다· 선글라스로 눈을 가린 여인이었지만 재무관은 그 모습이 익숙했다·
“마법 학부의 총장···· 코네트?”
“예· 맞습니다·”
여인이 선글라스를 위로 슬쩍 들어 올려 보이자 감춰져 있던 기묘한 역안이 모습을 드러낸다·
레일리가 반갑게 인사했다·
“여기서 총장님을 마주치게 될 줄이야· 마법 학부에서 보고만 받으셔도 괜찮았을 텐데 기꺼이 먼 걸음을 했구만·”
“아 점검 차원에서 나온 게 아니니까요·”
코네트가 후후후 웃음을 흘렸다·
“그저 순수하게 플란의 마법을 좋아합니다· 한정본이 구매하고 싶어서 방문했을 뿐이지요·”
그녀가 살짝 기울이며 말을 잇는다·
“한데 굉장히 먼 걸음을 한 것은 재무관께서도 마찬가지인 듯 합니다· 고생하셨군요·”
“아 둘째 황녀께서 명하셨다네· 아무쪼록 이 한정본이 마음에 드셔야 할 텐데 그래도 총장도 원하는 한정본이라니까 조금 마음이 놓여·”
“과찬이십니다· 그럼 좋은 하루 보내시길·”
“그래· 조만간 축제가 열리면 다시 보자고·”
재무관의 인사에 코네트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그녀가 몸을 돌려 되묻는다·
“축제?”
“그러고 보니 몰랐겠군· 마법 학부는 마탑을 건설하기 위한 자금이 필요하지 않나·”
“부끄럽지만 그렇지요·”
“황녀님께서 투자자를 모집하기 위한 장을 열어주겠다고 했네· 또 축제만 한 것이 없지·”
레일리가 기록지를 한 차례 들어 올려 보인다·
“이렇게 아량을 베푸시는 이유는 물론 플란의 입체 그림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야· 다른 이유는 조금도 없어·”
“···마법 학부가 또 플란의 덕을 보았군요·”
코네트의 얼굴 위로 옅은 미소가 번졌다· 레일리가 그녀를 마주 보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사실 축제 이야기는 살짝 이른 감도 있구만· 플란이 이틀 뒤 황궁에 방문하는 게 먼저니까·”
“그건 저도 아는 이야기군요· 기록지를 검증하는 차원에서 이틀 뒤에 해독 강연이 있다지요·”
이 역시 따지고 보면 놀라운 일이었다·
보통은 검증을 마친 기록지가 세간에 내보내지기 마련인데 플란은 아주 큰 화제를 일으킨 다음 검증을 받는 수순을 밟고 있었으니·
“정확하네·”
레일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쁜 일이지만 동시에 두려운 일일세 둘째 황녀님의 관심은 축복인 동시에 재앙이거든·”
“아뇨· 기쁜 일이라고만 생각하겠습니다·”
코네트가 생긋 웃었다·
쪽 소리가 나게 기록지에 입을 맞춘다·
“플란은 이번에도 잘할 테니까요·”
◈
이틀 뒤·
나는 무사히 황궁에 도착했다·
강연실 옆에 붙은 대기실 안· 마법 학부의 다른 대표들은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하고있는 채다·
“화 황실 사람들···· 내가 그런 사람들이랑 같이 있어도 되는 게 맞나···?”
베키가 찬물을 수도 없이 들이켰다· 트릭시가 미간을 좁혔다·
“가만히 있으면 돼· 그게 어렵나·”
“어려워····”
“그럼 날뛸 거야?”
“가만히 있을게···”
베키를 비롯한 대표들은 내가 굳이 데려왔다· 기록지를 해독하는 강연은 그들에게도 분명 좋은 학습이 될 터였으니·
문득 트릭시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그녀는 내 몸 구석구석을 뚫어져라 살핀다·
“····”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일 때·
똑똑─
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플란 씨 검증 강연 준비해주세요·”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관료의 안내를 받아 강연실 앞까지 도착했다· 문은 관문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거대하다·
들어서기 전 나는 세 마법사에게 말했다·
“너희는 내 설명을 놓치지 말고 들어라·”
그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한 후 강연실에 들어섰다· 아득히 넓은 공간· 나를 동그랗게 둘러싸고 사람들이 앉아있는 형태였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유독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회색빛의 가림막을 사이에 두고서 정면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는 누군가·
가려져 있지만 황금색으로 빛나는 초승달 모양의 안광만큼은 내게 전해져온다· 단순히 언어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빛이 나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녀가 둘째 황녀 오로라임을·
나는 태연하게 기록지를 펼쳤다·
“풀이를 시작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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