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2
“풀이를 시작하지·”
플란은 강단에 올라서 조용히 기록지를 펼쳤다·
굳이 자기소개는 하지 않았다· 애초에 오늘 그에게 주어진 역할은 술식의 해독뿐이었으므로·
술식을 풀이하는 것 자체에는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플란은 본인이 훨씬 긴 시간을 소모하게 될 것이라 내심 예측했다·
그를 동그랗게 둘러싸고 앉은 이들의 표정이 곧 증거였다· 의심과 기대가 뒤섞여있는 얼굴들·
의심은 해소되는 순간 확신으로 변모하지만 으레 해소하는 과정에서 꽤 많은 시간을 잡아먹는 법이었으니 말이다·
애초에 마법사가 그런 족속이다·
제 손으로 신비를 빚으면서도 가끔 신비를 인정하지 않고 눈으로 기적을 보더라도 쉽게 의견을 굽히지 않는다·
늘 틀을 깨부수고 나아가기에 바꾸어 생각해보면 항상 틀에 갇혀있는 이들· 플란은 오늘도 그들이 또 하나의 틀을 부수길 바란다·
“우선 첫 번째 변형의 해독이다·”
우선 다른 이들이 보다 용이하게 기록지에 접근할 수 있도록 플란은 핵심적인 술식들만 몇 가지를 추출하여 설명했다·
첫 번째 변형은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관찰」 「입체 변형」 「투과」정도를 간략하게 설명했고 말 그대로 핵심만 짚었다·
그리고 한 가지를 추가로 덧붙였다·
“이 세 가지를 활용한다면 결과물은 굉장히 선명하게 드러난다· 다만 완성된 입체 그림이 잉크처럼 번질 수 있음에 늘 유의하도록·”
그건 바로 「보존」·
마법사가 마나로 입체 그림을 조형하는 과정은 인간이 잉크를 활용하여 인쇄하는 과정과도 꽤 유사한 구석이 많다·
그렇기에 선명한 결과물만 확인하고 안심해서는 안 된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보존이다·
“보존에 있어서는 위 술식과 같이 효율을 추구했다· 그럼 다음 두 번째 변형·”
허공에 두 번째 입체 그림이 펼쳐진다·
주제는 ‘현재’· 마법 학부가 지닌 모습을 온전히 담아낸 결과물이다·
첫 번째와 원리는 크게 다르지 않다·
이것 역시 존재했던 것을 인쇄하듯 찍어낸 것에 불과하기에 그는 중복되는 설명을 전부 제외하고서 넘어가려 했다·
“질문·”
그때 누군가가 날카롭게 끼어들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궁정 마법사 나인하트· 알이 작고 동그란 안경을 쓴 그는 매서운 눈으로 플란을 노려보았다·
그 역시 플란의 술식에 이상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러나 검마태제를 비롯하여 최근 세간을 뒤집어놓은 일련의 사건들 심지어 지금 이 기록지와 마탑 건설 건까지····
오히려 기이할 정도로 놀라운 행보를 보이기에 학부의 학생이 결코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의문은 더더욱 커진 것이다·
“너는 방금 효율을 강조했어· 그렇지?”
일평생 마법에 매진해왔기에 마법이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았다· 그런 나인하트는 지금 막 플란의 빈틈을 발견한 듯했다·
“플란 그럼 효율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고·”
나인하트가 허공에 마력을 방사했다·
정육면체 모양의 미세한 마력 입자가 차곡차곡 쌓이고 이내 마법 학부의 모습이 완성된다·
“두 번째 변형의 경우 결국 입자를 하나하나 쌓아서 아카데미의 정경을 모방한 거잖아· 효율은 사실상 포기했다고 봐야 맞을 것 같은데·”
“결과는 같지만 방식에서 차이가 있다·”
플란은 고무 막처럼 탄성을 지닌 얇은 마나의 막을 만들어냈다· 그것을 나인하트에게 덮어씌우자 당연히 마나의 막도 그의 형상을 띄었다·
그는 그 형상을 「보존」을 통해 굳힌다·
나인하트의 동상처럼 완성된 입체 그림· 고작 5초도 걸리지 않는 과정이었고 굳이 하나하나 입자를 쌓지 않더라도 매우 정교했다·
“설명은 이 정도면 되었나·”
“···어? 잠깐 잠깐만·”
나인하트가 제 모습을 본뜬 동상과 플란을 번갈아 가면서 쳐다보더니 눈을 깜빡였다· 평정심을 잃은 목소리로 되묻는다·
“너는 그럼 마나의 장막을 마법 학부의 면적만큼이나 넓게 펼칠 수 있다는 소리야···?”
“별로 대단한 일은 아니지· 다음·”
플란이 마지막 입체 그림을 펼쳤다·
“세 번째 변형·”
주제는 ‘미래’· 그가 앞으로 만들어낼 마법 학부의 모습이 허공에 펼쳐진다·
밝은 곳과 어두운 곳에서 관찰했을 때 결과물이 확연하게 달라지는 묘한 이치· 그에 관한 해설을 하던 중 이번에는 다른 이가 끼어들었다·
“질문이 있어요·”
다른 궁정 마법사인 로라였다·
건축하면 로라 로라하면 건축· 황궁의 정원을 직접 도맡아 관리할 정도로 그녀는 마법 설계 분야에서 조예가 깊은 인물이었다·
“마지막 변형의 주제는 미래· 그럼 마법 학부의 모습도 이렇게 만들 계획이라는 건가요?”
엄연히 따지자면 마법에 관한 질문은 아니었다·
로라의 질문은 향후 계획에 초점을 두고 있었지만 플란은 그것을 알면서도 일축하지 않았다·
이 또한 검증의 일부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현재 마탑 건설은 아주 큰 관심을 받고 있고 그들은 당연히 플란에게 현실성에 관한 문제를 질문하고 싶었을 터·
어차피 언젠가 한 번은 제대로 짚고 넘어갈 부분이었기에 플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모습은 기본형에 불과하다·”
그러자 로라는 붉은색의 화살표들을 만들어냈다· 그것들이 마탑의 여러 부분을 가리킨다·
“높이만 높은 건물은 대체로 실속이 없죠· 유지하지 못할 높이를 세운다· 그건 허세고 설령 세운다고 하더라도 크나큰 낭비 아닐까요?”
로라와 같은 점을 우려하고 있다는 듯 상당수의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로라는 멈추지 않고 입체 그림에 간섭까지 했다· 높게 솟아오른 마탑을 반으로 나눈 뒤 쌍둥이처럼 나란히 세운다·
“이 정도라면 절충이 되겠네요· 환상만 품은 건축은 인명 사고로 이어져요· 현실을 보세요·”
하지만 플란은 태연하게 답했다·
“현실을 논했건만 너는 환상이라 칭하는군·”
“반말···?”
로라가 표정을 구겼다·
그러나 존대를 향한 지적은 나중이다· 우선 마법적인 논검이 우선이었다·
“확실히 동력을 소모하는 방식의 마탑이라면 건물을 둘로 나누는 편이 일리가 있다·”
“모든 동력은 소모하는 식이에요·”
“아니 내 동력원은 두 가지의 특질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자생 다른 하나는 순환· 애초부터 낭비랑은 거리가 멀지·”
플란은 그리 중얼거리며 몇 가지 술식을 허공에 띄웠다· 그것을 살피며 로라가 미간을 좁혔다·
“으음 술식에는 틀린 부분이 없긴 하지만····”
그녀가 꿍얼거리는 사이 플란은 시계를 확인했다· 길어도 90분 정도만 할애할 생각이었는데 벌써 85분이 지났다·
“별 볼 일 없는 질문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했군· 마지막 변형에 대한 해설은 따로 없다·”
“···!”
몇몇 마법사들이 원망 섞인 눈빛을 로라에게 보냈다· 로라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잠깐만 잠깐만!”
그녀가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이론에는 분명 오차가 없어요· 그렇지만!”
로라는 주먹까지 꽉 쥐고서 말을 잇는다·
“지금 논하는 건 현실성이잖아요·”
“두 번째 말하지만 나는 현실을 이야기했다·”
“제가 알기로 마법 분야에 그런 동력원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아요· 소모를 최대한 늦출 수는 있겠지만 자생? 순환? 불가능이라고요·”
“좋은 발언이다·”
플란이 옅은 미소를 머금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래서 마법의 분야를 넓힐 생각이다·”
“분야를 넓혀···?”
“이곳의 마법사들은 그간 인간의 마법만을 학습했지· 나는 이러한 부분에서 고대 룬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방침이다·”
“그럼 그 동력원이 고대 룬어랑 관련된····”
로라가 말을 차마 매듭짓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서서히 경악이 어렸다·
비단 그녀의 얼굴뿐만이 아니었다·
나머지의 반응도 둘 중 하나였다· 입을 꾹 다물고 눈을 크게 뜨거나 멍하니 입을 벌리거나·
고대 룬어라는 말에 강연실 전체가 술렁였다·
그때·
어디선가 서늘한 음색이 무겁고 짙게 깔렸다·
“다들 자리를 비우도록·”
짧은 한마디였지만 무게감은 어마어마했다· 가림막 너머의 여인이 내뱉은 한 마디에 모두 허겁지겁 강연실을 빠져나간다·
마법 학부의 세 대표는 멀뚱멀뚱 주변을 쳐다보다가 눈치껏 자리를 빠져나갔다·
어느새 둘만 남은 공간·
또 한 번 목소리가 낮게 깔린다·
“고대 룬어라고 하였느냐·”
가림막 너머 황금색으로 빛나는 초승달 모양의 동공이 플란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야말로 둘째 황녀 오로라·
“그렇습니다·”
“너는 참 재미있는 소리를 한단 말이지·”
황녀는 언어뿐만 아니라 안광으로도 말했다·
초승달과 상현달 사이를 수없이 거치는 그 눈동자에는 가림막 너머의 사내를 향한 오묘한 흥미가 담겨있었다·
“또한 오로지 금화만 투자받고 있더구나·”
오로라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건축 공학 기술···· 어떠한 인력도 받지 않고 그저 금화· 나는 자연스레 의문이 생겼도다·”
“어떤 의문이십니까·”
“이게 대규모 사기라면 좌시할 수 없다· 황녀인 내가 백성들이 현혹당하는 것을 지켜보기만 해서는 결코 안 될 일이지· 그렇지 않느냐·”
플란은 잠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따라서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된 결과를 약속하는 식으로 사람을 현혹하는 것은 굉장히 흔한 수법입니다·”
“그렇지·”
오로라의 눈이 가늘게 좁혀진다·
“그러나·”
플란은 마력을 ‘끊임없이’ 방사했다·
각각 아주 미세한 차이를 가진 방대한 양의 입체 그림들 그것들이 빠른 속도로 나열되자 하나의 ‘영상(映像)’을 이룬다·
입체 그림들은 정교하게 깎이며 또한 빠른 속도로 황녀의 눈앞을 지나친다· 오로라는 잠시간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사용된 입체 그림은 총 1만장·
황녀의 눈동자에 담긴 것은 현재의 마법 학부가 미래의 마법 학부가 되기까지의 과정·
“····”
잠시 정적이 흘렀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플란이었다·
“반드시 이렇게 될 겁니다· 오차 없이·”
“반드시 오차가 없다라·”
오로라가 다시 눈을 깜빡였다·
“오차라는 건 내가 손끝으로도 만들어낼 수 있노라· 네놈에게 들어갈 투자를 금지하는 건 일도 아니야·”
눈동자의 황금빛이 조금 더 강해진다·
“한데 그걸 알고 있음에도 너는 감히 오차가 없을 것이라는 표현을 입에 담을 수 있느냐·”
“예·”
플란은 곧바로 대답했다·
일 초·
이 초·
십 초·
그는 황녀의 안광을 피하지 않았다·
이윽고·
가림막 너머에서 여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
검증 강연을 마친 뒤 하루가 지났다·
아침에 눈을 뜨니 마이에브가 바닥에 앉아 많은 양의 서류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녀석이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물었다·
“잘 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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