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3
검증 강연을 마친 뒤 하루가 지났다·
아침에 눈을 뜨니 마이에브가 바닥에 앉아 많은 양의 서류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녀석이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물었다·
“잘 잤냐·”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마이에브는 자기 입을 손바닥으로 때린 후 말을 정정했다·
“아니 아니아니· 안녕히 주무셨어요·”
나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검증 강연을 도대체 어떻게 하신 거에요· 일이 다 끝나간다 싶었는데 투자자가 또 늘었어요·”
“앞으로는 더 늘어날 거다·”
“아···· 맞아· 내일부터는 마법 학부에서 축제가 열린다고 했지·”
눈앞이 깜깜해졌다는 듯 마이에브가 손바닥 하나로 자신의 양쪽 눈을 덮었다·
나는 천천히 책상 앞에 앉았다· 마이에브는 잔에 고급 차를 담아서 내 앞으로 내려놓는다·
“독이 들었나·”
“언제까지 그렇게 의심하실 거예요·”
“몰라서 묻는 게 아니다·”
“···들었어요·”
마이에브가 헛기침하더니 화제를 전환한다·
“아무튼 둘째 황녀도 마탑 건설을 밀어줄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네요· 굉장히 의외에요·”
마법 학부에 축제를 열어 투자자의 모집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황녀는 단 한 가지를 걸었다·
─후에 나와 단둘이서 대화해야 할 것이다·
어렵지 않은 조건이길래 받아들였지· 그 한마디를 회상하며 나는 말없이 차를 홀짝였다·
근래 들어서 오히려 마이에브의 허접한 암살 시도가 차의 맛을 올려주는 중이었다·
하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독이 든 차를 포장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뛰어난 맛을 품어야 할 테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녀의 독살에 응해줄 마음이 없다· 한 차례 정화를 거친 후 여유롭게 차를 음미했다·
“투자자 관리는 대책이 필요하겠어···· 아 그리고 주인· 역시 혈귀들도 관심이 엄청 많아요·”
마이에브가 내게 기록지 하나를 건넨다·
“이거 공허에서 가져온 거예요· 녀석들도 관심이 많은지 자기들끼리 돌려보고 있더라고요·”
“알게 된 것을 전부 보고하도록·”
“주인의 발상에 착안해서 생각을 뻗던데요·”
마이에브가 차분하게 설명을 잇는다·
“동력원을 손에 넣는 게 최우선· 그다음에는 주인이 마탑을 세우고 싶어 하는 것처럼 자신들의 기념비를 세우고 싶어 해요·”
“그런 식인가·”
내가 세우게 될 마탑·
마법의 요람이라 불리게 될 그곳에서 고작 인간의 마법만 연구해서는 많이 아쉬울 것이다· 혈귀들이 관심을 가져준다면 오히려 좋지·
요컨대 실험체들이 알아서 와준다는 것이다·
“조심하는 게 좋아요 주인·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녀석들이니까요· 생각도 행동도 사용하는 흑마법도·”
“그래서 즐길 생각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너는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여기나·”
“글쎄요···· 의미 없는 질문이네요· 그분은 상상을 초월하는 존재라 한 번 계획하신 이상 결국 실현될 거에요· 저는 받아들일 뿐이죠·”
마이에브가 말하는 ‘그분’이란 혈귀들의 공주를 뜻한다· 한 번 계획한 것을 반드시 실현하는 이라니 자연스레 흥미가 돋는다·
“너도 제법 솔직해졌군·”
“솔직함도 암살에 제법 도움이 된다네요·”
최근 마이에브는 제법 솔직해졌다·
나는 새삼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아서 서류를 살피는 모습·
“마이에브·”
“···!”
마이에브가 본능적으로 어깨를 떨었다· 서류를 내려놓더니 손을 저으면서 덧붙인다·
“죄 죄송해요· 주인·”
그러나 나무라기 위해서 그녀를 부른 것은 아니다· 나는 손가락을 튕겨서 조그만 책상을 하나 만들어주었다·
“앞으로 작업은 앉아서 해라·”
“···?”
마이에브가 사슴 같은 두 눈을 깜빡였다·
◈
둘째 황녀 오로라가 주최한 축제· ‘강림제’·
오로라가 기획한 지 고작 24시간 만에 개최되었으니 이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새삼 그녀의 권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도회 형식에서 크게 다르지는 않다·
황실에서 내려온 것이라 거창한 이름이 붙기는 했으나 결국 여러 사람이 춤을 추며 사교하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흐음·”
현재 내 정복은 흑색으로 정갈하다· 축제 기간 동안만큼은 학생들도 아카데미의 제복을 벗어 던지는 것이 허용되었기에·
“플란 준비 다 됐어?”
기숙사 앞 베키가 손을 번쩍 들면서 인사했다·
“···헉·”
다음 순간 입이 크게 벌어지더니 손이 아래로 힘없이 툭 떨어진다· 베키는 입을 뻐끔거리면서 내 모습 여기저기를 살폈다·
“프 플란···?”
“너는 사람도 못 알아보나·”
“아니 이건 새삼 달라서· 아 나쁜 말은 아니고 칭찬이야! 칭찬! 너 오늘따라···· 응····”
베키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몇 차례 끄덕인다· 나는 미간을 좁힌 채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결국 천천히 손을 뻗었다·
“으 응?”
“움직이지 마라·”
“어···? 어···!”
손이 가까워지자 베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그런 베키의 옷깃을 천천히 펴주었다· 아직도 남아있는 먼지는 염동력으로 떼어냈다· 워낙 꼬질꼬질해서 그냥 지나치지 못한 결과다·
한층 깨끗해진 베키가 제 모습을 살폈다·
“와아· 깨끗해졌어· 훨씬 낫다!”
“그냥 새로 사는 게 낫겠군·”
베키의 사복 드레스 자체가 낡고 후줄근해서 조금 다듬어주는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총장 코네트가 ‘마녀의 숲’이라는 의류점의 무제한 이용권을 주었었지 비로소 그것을 활용해도 좋은 시기가 온 것 같다·
어쨌든 우리는 마법 학부의 광장으로 향했다· 차분하게 걷다 보니 도중에 루이스와 트릭시도 자연스레 곁에 합류했다·
나는 한 차례 손가락을 튕겼다·
동시에 헤라는 투명한 보호막의 형태를 띠며 세 마법사의 신체를 감쌌다· 내가 곁에 없는 상황에서는 헤라가 그들을 보호하게 될 것이다·
“보호막? 누굴 어린애로 알아·”
“어리지· 마법적인 경지가·”
“····”
트릭시는 분하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 뒤로도 몇 번 나를 흘끔흘끔 쳐다보는 것이 할 말이 꽤 많은 눈치였는데 결국 끝까지 입술을 달싹여서 단어를 내뱉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덧 마법 학부의 광장이었다·
“와 저게 다 뭐야?”
베키가 소리쳤다·
광장을 가로지르며 새하얀 융단이 깔려있었다· 인파는 융단을 비워둔 채 서 있었고 융단의 끝자락에는 계단이 있었다·
그간 마법 학부에 재학하면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진정으로 화려한 광경이었다·
“내가 알기로 둘째 황녀님은 안 오실 텐데?”
“맞아·”
루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직접 방문하시는 건 아니지만 강림제가 성대하게 시작될 수 있도록 저렇게 해주셨대·”
“그렇구나· 마법 학부에 이렇게까지···?”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지· 따지고 보면 검마태제의 전 종목에서 마법 학부가 승리한 게 더더욱 신기하잖아· 이건 그 축하일 뿐이야·”
“아 이해했다·”
베키가 나를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결국 이것도 다 플란 덕분인 거네!”
“아하하···· 그렇다고 봐야지?”
“시끄럽다·”
나는 대화를 일축시킨 다음 주변을 살폈다·
황실이 주관하는 행사라 그런지 인파가 어마어마하다· 관료들 외부 학계의 마법사들 심지어 기사들의 모습도 꽤 보였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누군가가 있었다·
잔불의 기사 스칼렛·
그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초췌해져서 텅 비어버린 눈이었지만 그 동공이 담고 있는 것은 분명히 나였다·
“····”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슬그머니 눈을 피한다·
펑─!
하늘에서는 마법 폭죽이 터졌다·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음악과 환성이 그 뒤를 뒤쫓았다·
곧이어 푸른색의 차원문이 크기를 키워가며 등장했고 인파들의 환호 역시 비례하여 커졌다·
그 속에서 길게 뻗은 다리가 먼저 빠져나와 지상을 밟는다·
마법 학부의 총장 코네트·
허리까지 치렁거리는 머리카락과 기묘하게 번뜩이는 역안· 마법 학부를 이끌어온 인물·
그녀는 황녀로부터 하사받은 하얀 융단 위를 걸었다· 유례가 없었던 마법 학부의 행사에 마법을 배우는 생도들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이윽고 코네트가 계단의 끝에 올랐다·
“이 축제의 시작을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후로는 듣기 좋은 말들이 이어졌다· 그녀 역시 이러한 행사가 꽤 감격스러웠던 듯하다·
펑─!
퍼엉─!
마법 폭죽은 계속해서 터진다· 소리는 점점 더 커져가고 사람들의 흥분은 그만큼 고조된다·
그때 문득 나는 또 한 번 시선을 느꼈다·
스쳐 가는 시선인가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오로지 나를 향해 내리꽂히는 듯한 그 시선·
고개를 돌리자 바로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스칼렛이 아직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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