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5
[*플란]
[▷저기 플란!]
[▶뭐지·]
의외로 답장이 일찍 도착했다·
베키는 마음을 가다듬은 후 답신을 보냈다· 막상 답장이 빨리 오니 할 말이 없었다·
[▷다른 건 아니고 트릭시랑 마녀의 숲에 잘 도착했다구· 고마워 예쁜 옷 많이 골라서 갈게·]
[▶적당히 최선의 것만 고르도록·]
연락이 오가니까 나름대로 즐거웠다· 베키는 문득 용기가 솟아올라서 다른 것도 물었다·
[▷플란은 검은색이 좋아 흰색이 좋아?]
[▶고작 옷 한 벌도 스스로 못 고르나·]
나름대로 돌려서 물었지만 곧바로 정곡을 찔렸다· 딱히 대답으로 돌려줄 만한 것이 없었다·
조금 절망하던 그때 연락이 추가로 왔다·
[▶흰색으로 해라·]
[▷아 고마워!]
베키가 반사적으로 흰색 드레스의 옷걸이에 손을 얹은 순간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응?”
트릭시가 어느샌가 자신과 같은 옷걸이에 손을 뻗은 것이었다· 트릭시의 눈동자가 베키의 다른 손에 들려있는 트리비아로 향했다·
“····”
베키는 아무 말 없이 트리비아를 끌어안았다· 일단 트릭시에게는 보여주지 않을 셈이었다·
너도 안 보여줬잖아·
“하·”
트릭시가 코웃음을 쳤다· ‘감히 네가’라고 적혀있는 것 같은 표정으로·
물론 힘의 차이로 인해 드레스는 트릭시의 것이 되었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이후부터였다·
목걸이 반지 귀걸이····
겹친다·
겹친다·
또 겹친다·
모든 분야에서 둘의 손은 매번 겹쳤고· 어떤 것은 트릭시의 것이 되었고 어떤 것은 베키의 것이 되었다·
“왜 방해하는데? 그냥 꼬질꼬질하게 다녀·”
“싫어!”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 속옷뿐·
[▷저기 플란· 혹시 안에 입는 것도····]
베키는 트리비아의 연락에 열중했고 트릭시도 아주 바쁘게 트리비아를 두드렸다·
어느샌가 말소리는 없어지고 지면 위로 손가락이 스치는 소리만이 가득할 뿐·
···두 소녀는 지금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
해가 저물어갈 때쯤의 무도회장·
무도회장은 급히 신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화려했다· 황궁의 정원을 관리한다던 궁정 마법사 로라 그녀가 힘을 써준 덕분이다·
염동으로 움직이는 악기들은 귀를 달래주는 선율을 내뱉고 사람들은 자유로운 방식으로 무도회를 즐기고 있으니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한쪽에서는 투자자들이 모여 자기들끼리 자산에 관한 대화와 샴페인을 나눈다·
“얼마나 투자하실 계획이십니까?”
“원래 크게 할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막상 와보니 또 욕심이 나는군요·”
“아무래도 황실에서 주최했다는 점이 큰 것 같습니다· 아니 황실에서부터 대놓고 밀어주겠다는데· 투자를 참는 편이 더 힘들죠·”
“마탑 설계도 황궁에서 검증을 마쳤다고 하더군요· 무려 로라가 인정했다고 합니다·”
누군가의 말에 투자자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로라? 황궁의 정원을 만든 그 로라가?”
“예! 그렇다니까요! 소문으로는 반박조차 못 하고 얼굴이 시뻘게졌다는 소문도····”
그리고 그러한 어른들의 대화를 루이스와 마틴은 멀리에 나란히 서서 지켜보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놀랍다니까· 마법 학부에서 무도회가 열릴 줄이야· 상상이나 해봤어?”
이 목소리의 주인은 마틴·
루이스는 오랜만에 마틴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서로가 원해서 한다기보다는 마틴이 일방적으로 말을 붙이는 것에 더 가까웠지만·
“상상도 못 했지· 하나를 짚을 필요도 없어· 마틴 나는 그냥 전부를 상상하지 못했어·”
“그렇지? 자 그럼 오늘은 또 누구를 꼬셔볼까나···· 오늘은 연상이랑 놀고 싶은데····”
마틴이 머리카락을 위로 스윽 넘기면서 말했다· 그 느끼한 표정을 바라보며 루이스는 음료를 홀짝일 뿐이었다·
“마틴은 참 한결같네· 또 여자 생각뿐이야?”
“내가 오히려 묻고 싶다· 너는 도대체 왜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 거냐?”
“신기한 걸 보고 있다는 듯한 눈빛은 치워주라·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 건 플란도 마찬가지잖아?”
“루이스 네가 뭘 모르네· 너무 몰라·”
마틴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무도회장에서는 쟁반이 스스로 허공을 부유한다· 마틴은 그 위에 놓인 샴페인 잔을 하나 낚아채더니 단번에 들이키고서 말을 잇는다·
“플란 같은 애들이 결국에는 여자도 돌려가면서 사귀고 결혼도 하고 마지막에는 애까지도 낳는 법이야· 할 거 전부 하고 산다고 인마·”
“알았어 알았어· 마틴 네 말이 다 맞아·”
워낙 허무맹랑한 소리였지만 루이스는 적당히 웃어주며 상황을 무마했다· 둘은 샴페인 잔을 소리가 나게 부딪힌다·
이번 ‘강림제’는 축제를 통해 외부인들이 마법 학부에 조금이라도 더 관심을 가지게 한 다음 그 관심을 마탑 건설까지도 잇는 것이 목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루이스의 눈으로 보기에도 제법 성공적이었다·
“이 정도면 정말 새로 마탑을 짓겠는데····”
앞으로 어떠한 변화들이 생겨날지 기대된다· 루이스가 미소와 취기를 동시에 머금은 그때였다·
“저기 루이스·”
마틴이 다급하게 루이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루이스는 굳이 옆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왜 그래?”
“나 나····”
“응· 가봐도 괜찮아· 여자애들한테 너무 민폐는 끼치지 말고·”
“그게 아니야· 나· 모 모 몸이····”
옆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
루이스는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마틴이 완전히 창백해진 얼굴을 하고선 바닥에 쓰러진 채였다·
마틴을 업어들고서 허겁지겁 무도회장의 1층으로 내려갔을 때 루이스는 더더욱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뭐야····”
외부인 투자자 학생···· 사람들이 누구랄 것 없이 허수아비처럼 하나둘 쓰러지는 중이었다·
“우 우욱!”
“속이 메스꺼워····”
그들의 얼굴도 역시 마틴처럼 창백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무도회장은 진한 보랏빛의 결계에 온통 뒤덮여서 안과 밖이 완전히 분리되어있는 상태였다·
“저기요 제 말 들려요? 저기요─!”
결계 바깥으로 사람의 형체가 보여서 외쳐보았지만 소리까지 전해지지는 않는다· 그야말로 희망 고문이었다·
‘나는 플란의 마법 덕분에 멀쩡한 건가···?’
루이스처럼 아직 상태가 멀쩡한 사람들은 몇 명 더 있었다· 쓰러진 이들과 공포에 질린 이들이 뒤섞이며 내부는 아비규환을 이룬다·
“여기에 갇힌 거야? 도대체 무슨 상황인데!”
“나갈래 나가게 해줘!”
뭉친 소리가 불협화음을 만들어내던 그때·
유난히 선명한 목소리가 있었다·
“소란 피울 것 없다·”
어떠한 동요도 없는 목소리· 모두의 고개가 자연스레 그곳을 향해서 돌아간다·
“····”
플란·
그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눈을 가만히 감은 채로 여전히 염동으로 연주되고 있는 악기들의 선율에 집중하고 있을 뿐·
혼자만 다른 무도회장에 있는 듯했다·
이윽고 그가 천천히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쓰러져있는 이들 진한 보랏빛의 결계 가득한 흑마법의 기운 공포에 질린 이들····
붉은 눈동자에 담기는 풍경은 온통 그따위 것들 뿐이지만 그는 조용히 샴페인을 음미했다·
그리고 그가 내뱉는 짧은 감상이란·
“···그래도 마이에브보다는 나은 수준인가·”
고작 그뿐이었다·
“독성이 아주 강해· 톡 쏘는 맛이 일품이다·”
그의 말에 모두 크나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여학생 한 명이 몸을 떨며 플란에게 되묻는다·
그녀의 손에도 샴페인 잔이 들려있는 채였다·
“독···? 방금· 독이라고 말했어···?”
플란은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인다·
“안심해라· 고작 극독을 섭취했을 뿐이니·”
플란의 한 마디에 여학생의 얼굴이 더더욱 창백해졌다· 순식간에 많은 수의 사람들이 플란의 앞으로 몰려든다· 샴페인을 마신 이들이었다·
“독? 이미 마셔버렸는데 나 어떡해?”
“죽는 건가? 죽을 정도의 독인가?”
“방법을 알려주게! 이제 우린 어떻게 되는 건가?”
플란이 잔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힘없이 낙하한 유리잔은 요란하게 파편을 튀기며 부서지고 그 소리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우선 환각을 보게되겠지·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몸이 천천히 녹아내릴 거다· 결국 눈동자만이 남아 바닥을 굴러다니게 될 터·”
플란의 입에서 희망적인 이야기는 무엇하나 튀어나오지 않았지만 누구도 플란에게 무언가를 따지려 들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가 너무나도 고요했던 탓이다·
“그러나 너희는 운이 좋아·”
플란은 누구에게 명령하는 일 없이 그저 조용히 자신의 마나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모두 잠자코 플란이 하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어떠한 망설임도 느끼지 않았고 어느샌가 다들 메스꺼움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역시 무도회의 일부라는 것처럼·
“마침 내가 이곳에 있었으니 말이다·”
그는 그렇게만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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