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6
흑마법의 기운이 갈수록 짙어져 간다·
궁정 마법사 로라·
황궁에서 검증이 있었을 당시 나의 마탑 설계에 딴지를 걸었다가 보기 좋게 논파를 당했던 그녀·
황녀의 명에는 철저하게 충성하겠다는 것인지 로라가 이 무도회장을 신설하면서 많은 신경을 썼다는 것이 꽤 느껴졌다·
일례로 무려 3층의 구조를 지녔다는 점부터가 그러하다· 현재 무도회장 내부에 고립되어있는 인원이 많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터·
나는 우선 결계의 모습을 살폈다·
시간을 들이면 원리를 파악할 수 있겠으나 사람들의 몸에 독이 계속해서 퍼지고 있으니 그다지 좋은 선택지는 아니었다·
따라서 나는 몇 가지의 사실들만 먼저 추렸다·
“···대담하군·”
결계의 밀도가 상당하다·
원거리에서 이 정도의 결계 밀도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바꾸어 말해 술자가 현장에 버젓이 남아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흑마법의 주인 혈귀가 이곳에 있는 것이다·
“····”
뒤이어 무도회장 내부로 보랏빛 안개가 서서히 깔리기 시작했다· 눈이 따가울 정도로 탁한 기운 이 안개도 역시 독을 머금은 채다·
발원지는 위층·
“너희는 절대 1층을 벗어나지 마라·”
그들 모두에게 독이 퍼지지 않도록 기초적인 조치를 취한 후 나는 2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점점 자욱하게 깔려가는 보랏빛 안개를 헤쳐내며 오로지 감에 의존하여서만 걸은 결과·
“다들 진정해주세요· 정말 괜찮을 거예요·”
2층에 도달하니 웬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바람 원소를 발현하여 일시적으로 보랏빛 안개를 걷어냈다· 그러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이 시야에 담긴다·
“적고 적었고···· 우선 확인된 인원은 이 정도인가? 3층에도 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키가 아주 조그만 여학생이 메모장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그러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메모지에 향해있던 그녀의 고개가 나를 향해 회전한다·
“어? 플란이네?”
나는 그녀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녀는 반가운 이를 마주했다는 듯 나를 알아보았다·
“다행이다! 후배님 지금 눈으로 보면 알겠지만 상황이 많이 안 좋거든· 그래도 확실히 이렇게 너를 마주치게 되니까 엄청 든든하긴 하네·”
그녀가 뒤늦게 가슴 부근의 명찰을 가리킨다·
“아 나는 에밀리· 마법 학부 2학년 회장· 수상한 사람 아니야· 혹시라도 혈귀로 오해할까 봐·”
나는 조용히 그녀의 모습을 살폈다·
비스듬한 비대칭 단발머리는 갈색을 띠고 어깨에는 ‘회장’이라고 적힌 완장을 찬 모습·
메모지에는 사람들의 이름이 가득 적혀있다· 아마 에밀리는 줄곧 신변이 확보된 인원의 명단을 작성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 플란이다!”
그때 다른 누군가도 나를 발견하고서 크게 외쳤다· 그 외침이 주변으로 하나둘 번져나간다·
“플란? 플란이라고?”
“나 좀 살려줘!”
“점점 숨이 막혀···! 숨 좀 쉬게 해줘!”
목숨을 보채는 이들의 목소리가 뒤섞이며 불협화음이 된다· 그것이 자꾸만 심기를 건드렸다·
“그만·”
시끄럽게 뒤섞이던 목소리가 일시에 잦아든다·
나는 그들의 모습도 꼼꼼히 살폈다·
학생 학생 학생···· 이상하게 학생뿐이다·
“혈귀놈들···· 치사하게 교수나 궁정 마법사들이 없는 틈만을 아주 교묘하게 노렸어· 심지어 기사들도 없는 상황인데·”
에밀리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듯한 표정과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혈귀들도 바보는 아니니 당연히 나름대로 계획을 실현하기 위한 나름의 전략을 썼을 터다·
“원하는 순간 발동시키는 방식의 독이더군 사전에 감지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쩐지· 아무튼 큰일이야· 그나마 마법이나 고유 능력을 쓸 수 있는 사람들끼리 힘쓰고는 있지만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
지금 보니 에밀리의 안색도 썩 좋진 않았다·
숨이 가쁘고 이마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는데도 애써 괜찮은 척하는 모습· 완장에 적혀있는 ‘회장’이 제법 어울리는 모습이다·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트리비아를 두드린다·
“트리비아도 여기에서는 완전히 먹통이야· 기껏 강림제 참석자 전원에게 지급해놨더니····”
“시간은 내가 연장해주지·”
나는 모여있는 사람들에게도 기초적인 치유 마법을 사용해주었다· 나대지만 않는다면 신체에 독이 퍼지는 것이 어느 정도 늦추어질 것이다·
이후 에밀리에게 추가로 물었다·
“내부의 인원은 이게 전부가 아닐 텐데·”
“맞아· 후배님 이건 2층의 인원일 뿐이야·”
그녀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다· 동시에 자신의 메모지를 내게 보인다·
“사실 명단을 작성한 이유는 유명한 투자자들의 생존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거든?”
“한데·”
“없어· 정말 이상할 정도로 학생들 뿐이야· 투자자들이 전부 3층에서 어떻게 된 것 같은데 도무지 위층으로는 진입할 엄두가 나질 않아·”
결정을 빠르게 내렸다·
“너희는 모두 1층으로 내려가 있어라·”
“이동하라고? 하지만 후배님 1층으로 내려가더라도 결계가 해제되지 않으면 소용없잖아·”
“내가 해제하지·”
대화는 그뿐·
나는 3층으로 향했다·
◈
3층에서는 이전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짙은 보랏빛 안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원래 발목 정도를 감싸던 안개가 이제는 눈앞의 시야까지도 가리는 중이다· 머금고 있는 독성 역시도 훨씬 강력하다·
─강림제 참석자 전원에게 지급해놨더니····
문득 에밀리의 말이 떠올라서 나는 품속에서 트리비아를 꺼냈다·
결계 내부에서 현재 트리비아가 먹통이라 해도 이것을 활용할만한 방법은 여전히 존재다·
그것을 허공에 띄운 다음 표지 위로 손바닥을 얹고서 가만히 생각을 집중했다·
“····”
원래 마탑이 트리비아에게로 마나를 보내는 중추 역할을 했다면 일시적으로 그 역할을 내 육신이 해낸다·
나의 트리비아와 동일한 「회로」를 지닌 것들의 위치가 머릿속에 그려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3층에 있는 모두의 위치를 확인해냈다·
3층도 사람들이 전부 한 곳에 모여있었다·
나는 머릿속의 감각을 활용하며 그들이 있는 곳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딱─!
손가락을 튕겨 바람 원소를 펼쳐낸 순간·
시야가 넓어짐과 동시에 푸른색의 결계와 그 안에 들어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동시에 그들이 나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어···? 플란?”
“구하러 온 겐가?”
“결계는 해제된 거야?”
그들은 굉장히 체계적으로 버티고 있었다· 결계 내부에서 또 다른 결계를 펼쳐 독성이 이토록 강한 3층에서도 버텼다는 것이 그 증거다·
아마도 이 결계를 펼친 장본인· 황실의 인장을 달고 있는 마법사 하나가 내게 물었다·
“어떻게 됐죠· 1층의 결계는 해제된 겁니까?”
“아직이다· 원리를 일일이 파악하여 해제하는 것이 불가능은 아니지만 결코 좋은 선택지라고도 말할 수 없지·”
원리를 파악하여 해체하는 방식은 가능하다·
그러나 이는 긴 시간을 필요로 한다· 푸른 결계가 그 정도의 시간까지는 버티지 못할 터·
황실 마법사가 내게 가까이 붙었다·
“당장 대책을 찾아야 합니다· 현재 제가 3층에서 보호하는 분들은 전부 이름 높으신····”
“조용·”
나는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방법이 있으니 대기해라·”
모두가 움직임을 멈추었고 나는 푸른 결계에서 보호받는 이들의 모습을 둘러보았다· 그들의 상태부터 옷차림까지 면밀히 확인했다·
“방법···?”
“역시 술자의 숨통을 끊어놓는 수밖에 없지·”
결계의 밀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음을 확인했기에 술자는 반드시 이곳에 버젓이 남아있다·
“····”
또한 나는 의문스럽다·
황실 출신의 마법사가 굳이 마법 학부를 위해서 다른 투자자들까지 보호한 이유는 무엇인가· 왜 2층에는 투자자가 단 한 명도 없었는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푸른색의 결계가 다시 보니 덫처럼 보인다·
딱─!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마이에브의 흑마법에서 영감을 얻었던 것· 「박제」를 발현했다·
「박제」가 황실의 마법사를 가두어버린다·
“이봐!”
누군가가 다급하게 외쳤다·
“저분은 재무관 레일리 님의 호위 마법사야·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모두의 시선이 한 명에게로 향한다· 유디트의 저택에서 일면식을 타두었던 나이가 지긋한 사내였다·
‘황실의 재무관이었나·’
레일리가 입을 열었다·
“틀림없네· 그녀는 지금까지 나를 호위해준 황실의 마법사야· 마법을 풀어주었으면 하네·”
“흐음·”
그러나 나는 옅은 조소를 머금을 뿐이었다·
위장 방식이 마이에브와는 다르다·
혈귀는 예상을 벗어나서 행동한다던 말· 그게 거짓은 아닌 듯했다· 그러나 딱히 크게 벗어나지도 않았기에·
나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인간은 체내에 마나를 지니고 있고 그로 인해 마법이 닿으면 특유의 저항을 보인다· 이는 본능적인 방어기제라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지·”
뚜두둑····
황실 마법사를 가두었던 틀이 저절로 부서진다·
조각난 액자 틀을 염동으로 집어 올렸다· 나무의 균열 틈새에는 붉은 기운이 스며들어 있었다·
자력으로 빠져나온 그녀를 나는 응시했다·
“너의 방어기제는 마나가 아닌 생명력이구나· 한낱 혈귀 따위가 감히 인간을 사칭하나·”
다른 이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황실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당사자조차도 조금은 놀란 눈치였다·
“····”
황실 마법사는 불길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자기 목을 손톱으로 그었다· 그러자 원래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검은 드레스를 입고 저주 인형을 꼭 끌어안은 소녀 혈귀였다·
“깜빡 속아버렸네~ 어떻게 박제를 사용한 거지? 순간 마이에브가 온 줄 알고 헷갈렸잖아·”
소녀의 입꼬리는 위로 올라가 있었지만 눈동자에는 인간을 향한 경멸이 가득 담겨있었다·
“그리고 그거 알아?”
혈귀의 저주 인형이 독기를 가득 머금는다·
“인간의 마법으로 어쭙잖게 흑마법을 흉내 내는 거· 난 그따위 행동 절대로 용납 못하거든·”
쿠구구구구─
소녀의 몸을 보랏빛 기운이 감싼다·
“우선 그 건방진 손가락 열 개를 전부 꺾어줄게 협상은 그 이후에 차분히 나누자고?”
굉장한 기운이 검붉게 피어올랐지만 나는 그 흑마법의 결과물까지 확인할 마음은 없었다·
정신을 집중한다·
주변이 마법사의 시야로 보이기 시작하고 기류들은 선명한 선의 형태로 변모하여 드러난다·
계산에 많은 시간은 필요치 않다·
그저 그녀의 ‘발현 과정’을 통째로 박제했다·
“응···?”
액자틀 내부의 흰색 도화지 위로 소녀 혈귀가 발현하려 했던 흑마법의 술식이 담긴다·
이 과정에 이해는 필요하지 않다·
그냥 단순히 더 많은 마나의 용적으로 상대방의 것을 품을 수 있다면 일단은 박제해두는 것이 가능하다·
“뭐야· 뭘 한 거야?”
혈귀가 또 한 번 흑마법을 발현했다·
그 술식도 깔끔하게 액자에 담겼다·
“마이에브랑 달라···? 야 너 뭐야?”
“····”
하나 둘 셋·
박제되는 술식들이 늘어간다·
나는 미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실시간으로 연구 자료가 늘어나고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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