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7
“아오···!”
녀석이 흑마법을 발현하려고 하면 나는 그것이 결과를 나타내기 전에 액자 안으로 담는다·
이렇게 연구 자료가 또 하나 늘었다·
“야 무슨 인간이···!”
흑마법의 위력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하기에 마나의 소모량이 많았지만 어두운 이곳에서는 밤의 정령 헤라의 효과를 받아 상쇄했다·
바닥에 액자가 수북이 쌓였을 때쯤 결국 소녀 혈귀가 먼저 마법의 발현을 그만두었다·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나였다·
“흑마법을 더 다양하게 구사할 순 없었나·”
중복된 술식을 담은 액자들을 깨트리며 내뱉은 감상이다· 중복된 것들을 전부 삭제하고 나니 사실상 다섯 개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이 술식들은 연구해서 좋은 곳에 쓰도록 하지· 네가 제법 유능한 흑마법사이길 바랄 뿐이다·”
“건방진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네? 인간· 그런 말은 승리를 거머쥔 뒤에 하는 거야·”
소녀 혈귀는 비웃음을 흘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를 죽이지 않는 한 결계는 사라지지 않아· 이걸 어떡하나? 투자자들이 전부 독기에 범벅되어 죽어버리게 생겼네·”
이것 좀 보라는 듯 소녀가 날카로운 엄지손톱으로 자기 목을 천천히 긋는다·
척 보기에도 깊은 상처에 피가 아래로 철철 쏟아지지만 그녀는 결코 힘들어하는 기색이 없다·
“보다시피~ 나는 죽는 몸이 아니거든·”
계속해서 비아냥대며 혈귀 소녀는 검지 끝으로 허공에 작은 동그라미 하나를 그려 보인다·
“내가 원하는 건 이거 하나야· 인간 이게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잘 알고 있잖아?”
그러자 주변에서 성질 급한 투자자들 몇 명이 끼어들었다·
“금화를 원하는 건가! 얼마든지 주겠네!”
“나도! 금화라면 많아!”
혈귀 소녀는 가만히 나를 바라볼 뿐이다·
애초에 그녀가 그려낸 것은 금화가 아니다· 고대 룬어의 힘이 담긴 동력원을 말하는 것이지·
“어떡할래 투자자들 다 죽일 거야? 정말 그래도 괜찮겠어? 네가 기껏 일궈낸 마법 학부잖아~”
“한심하긴· 너와 협상은 없다·”
나는 더더욱 큰 비웃음으로 받아쳤다·
“무식하게 많은 생명력으로 여유를 부리는 방식···· 정말 수도 없이 보았고 이제 질린다·”
마치 수술대를 세로로 세워둔 것처럼 나는 염동으로 녀석의 몸을 고정했다· 천천히 다가가서 녀석의 목을 직접 내 손으로 쥐었다·
“네 무식함을 무엇부터 알려주어야 할까·”
흑마법의 원천인 생명력·
녀석의 혈액 내부에서는 그것이 크게 맥동한다· 나는 그녀의 목에 난 상처에 역으로 마나를 밀어 넣기 시작했다·
“무한한 양이 결코 아님에도 무한하다고 착각한 무식함· 그게 네 한계다·”
지금도 소녀는 상처에서 피를 쏟아내고 있다· 나는 빠져나가는 생명력의 양만큼을 자신의 마나로 채워나간다·
나의 의도를 깨달았는지 소녀 혈귀는 어이가 없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서 내게 물었다·
“···이게 지금 정신이 나갔나? 내 몸을 네 마나로 전부 채워보겠다는 거야?”
녀석이 가소롭다는 듯 말을 이어간다·
“내가 왜 굳이 저항하지 않을까? 너랑 나는 지금 연결되어있어· 그 하찮은 계획이 실패하는 순간 내 생명력이 네 몸을 녹여버릴걸·”
나는 한숨을 내쉰다·
세상에 태어난 이래 건방진 족속들을 수도 없이 보았으나 마주칠 때마다 어떠한 한심함과 분노가 치밀어오르는 것은 좀체 고쳐지지 않는다·
“혈귀·”
나는 놈의 종족을 읊조렸다·
녀석의 몸이 아주 살짝 떨렸다·
“네 추측 자체가 틀렸다는 걸 모르겠나·”
굳이 생명력을 전부 게워낼 필요가 없다·
적절한 양의 마나를 밀어 넣었고 소녀 혈귀는 눈동자를 스르륵 굴려서 나를 바라본다·
머릿속에 그려진 술식들은 정교하게 맞물리며 효과를 발휘하고 「역류」가 발동한다·
“마나로 덮어씌우지 않는다· 역류시킬 뿐·”
곳곳에 스며든 마나가 녀석의 혈류를 조작한다·
역류를 막기 위해 존재하는 신체의 기관들을 완전히 무시하고서 억지로 그 방대한 양을 거꾸로 솟구치게 만든다·
퍼어어억─!
굉장한 소리와 함께 소녀의 몸이 뒤흔들렸다· 몸의 온갖 구멍에서 혈액이 터져 나온다·
찰나의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억···· 어 거걱····”
눈이 완전히 뒤집힌 채로 피를 쏟아내는 그녀를 굽어다 보며 나는 몇 마디를 덧붙였다·
“동력원을 원한다면 평범하게 방문해라· 인질극은 스스로 생각해도 조금 유치하지 않나·”
피눈물을 질질 흘리면서도 녀석은 이내 초점을 되찾는다· 몸을 부들부들 떨며 나를 노려본다·
“으···· 극····”
“그리 분해할 것도 없지 않나· 네 몸도 아니니·”
“···!”
그러자 녀석은 더더욱 놀란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더 크게 역류한 혈액이 그녀의 육체를 폭파했고 나는 그 사체가 사방으로 튀지 않도록 적당히 염동으로 묶었다·
“불쾌하군·”
감상은 길지 않았다·
분신의 생성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 실제로 살아 활동했던 생명체의 몸을 제물 삼는 흑마법·
방금 그건 빙의(憑依)였다·
나는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랏빛 안개는 어느샌가 자취를 감추었고 무도회장을 둘러싼 결계 역시 완전히 사라진 채였다·
“····”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생존한 투자자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물론 시선을 보내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아까 혈귀에게 금화를 제시했던 투자자들이었다·
“투자를 강요하진 않는다·”
모두 조용히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서서히 빛이 돌아오는 무도회장에서 나는 말을 이었다·
“그러나 투자한다면 결코 믿음을 저버리는 일도 없다는 것을 알도록· 보았으니 알겠지·”
대답은 없었다·
있더라도 들을 필요가 없었다·
한 치의 거짓말도 하지 않았으니·
◈
베키와 트릭시는 무도회장 외부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의류점에서 종일 티격태격헀던 탓에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는데 도착해보니 섬찟한 광경이 그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랏빛의 결계가 무도회장을 반구형의 형태로 완전히 감싸고 있는 채였다· 근처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두통이 올 지경이었다·
“어? 결계가 사라진다!”
그러한 와중 누군가가 외쳤다· 베키와 트릭시도 두 눈을 똑똑히 뜨고 보았다·
진하던 결계가 반투명해지더니 이내 사라진다·
부작용도 여파도 없는 원상복구였다· 뒤늦게 기사들과 마법 학부의 교수들이 안으로 진입하려 했다·
그러나·
무도회장으로부터 유유히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심상치 않은 걸음걸이에 모두 진입하려는 움직임을 멈추고 시선을 집중했다·
베키도 목을 쭈욱 빼고서 그게 누군지 살폈다·
“어? 플란?”
플란·
다름 아닌 그였다·
앞장서는 그의 뒤를 다른 이들이 뒤따랐다·
“내부는 어떻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소행을 벌인 혈귀는 찾아냈나?”
플란은 가만히 멈추어선 채로 얼굴에 질문이 가득한 이들을 한 차례 빙 둘러볼 뿐이었다·
“검은 집어넣지 그래·”
뒤늦게 도착한 마법사들을 향해서도 비슷한 시선을 보냈고 다들 일단 그렇게 했다·
“무도회장에서는 선율과 춤을 즐기면 족하다· 다들 왜 그러나· 마치 전투라도 할 것처럼·”
플란의 말에 모두 눈을 깜빡였다·
누군가가 침묵을 깨고서 플란에게 물었다·
“우선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주시게 그래야 우리도 판단을 내릴 것 아닌가·”
그러자 플란은 턱으로 무도회장을 가리켰다· 너무나도 멀쩡한 상태인 그 무도회장을·
“아무 일도 없었다·”
낮게 깔리는 목소리·
직접 눈으로 보기에도 별일이 없는 듯했으니 몰려온 이들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
“플란!”
자리를 떠나려는 플란에게 베키와 트릭시가 다가갔다· 트릭시의 얼굴에는 의문이 가득했고 베키의 얼굴에는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괜찮아 플란? 별일 없어서 다행이다····”
베키는 무의식적으로 플란의 손을 잡으려다가 그것을 가까스로 거두어낸다·
“····”
플란은 조용히 트릭시와 베키의 모습을 살핀다·
그리고 이내 미간을 좁힌다·
“너희는 도대체 뭐지·”
같은 드레스 같은 목걸이 같은 팔찌···· 플란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색이었다·
잠시 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친해진 건가·”
“아니·”
“아니야!”
◈
그날 밤 자정·
공허의 어떤 회의실·
“상대가 꽤 강했던 모양입니다?”
혈귀의 간부 ‘가면’이 물었다· ‘소녀’는 탐탁치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강한 걸 떠나서 이상한 놈이야·”
“실제로도 그래야만 할 겁니다· 제가 꽤 아끼던 가면을 보란 듯이 부수고 복귀하셨으니까요·”
가면의 특수 능력은 다른 생명체를 빙의체로 전환하는 것· 그는 그것을 가면이라 칭하며 수집하는 것을 즐긴다·
“그딴 거 다시 만들면 그만이잖아! 아~ 생각할수록 짜증 나 죽겠네· 그 건방진 자식·”
소녀는 애꿎은 저주 인형의 팔을 쥐어뜯었다· 방심했다는 나름의 이유를 붙여보려고 해도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면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괜찮습니다· 애초에 탐색전 아니었습니까· 알아낸 정보나 풀어주십시오·”
“관찰력이 훌륭해· 혈액 내부의 생명력을 역류시킬 수 있다는 것도 내가 빙의체에 빙의해있다는 것도 전부 알아냈으니까·”
“협상은?”
“고대 룬어와 관련된 동력원을 원한다면 그냥 찾아오래· 인질극은 유치하다나 뭐래나·”
가면 너머에서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확실히 이상한 인간이네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동력원은 오히려 연구가 진척된 이후 빼 오는 편이 우리에게도 유리하니까요·”
“아 맞다!”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소녀가 벌떡 일어났다·
“걔 박제를 사용하던데? 진짜로 썼다니까?”
가면과 소녀의 시선이 동시에 공허의 어느 한편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마이에브가 서 있었다·
마이에브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나도 당했어· 엄밀히 따지자면 그 인간은 흑마법을 똑같이 사용하는 게 아니야· 오로지 순수 마법으로만 똑같은 결과값을 내는 거지·”
“그런 게 가능하다고?”
“방금까지 직접 겪고 온 거 아니셨어?”
“이 싸가지 없는 년이·”
소녀가 표정을 확 구겼다· 마이에브의 왼쪽 팔을 쳐다보더니 혀를 쯧 찬다·
“네가 더 한심해· 뭘 했길래 팔 하나가 없어?”
“···대충 사정이 있어·”
마이에브는 조용히 얼버무렸다·
노예 각인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그녀는 공허에 방문할 때마다 매번 팔을 도려내야만 했다·
“아니 근데 난 진짜로 이해가 안 간다니까·”
소녀는 자신의 의문을 중얼거렸다·
“다른 건 몰라도 왜 극독이 통하지 않았지?”
“치사량을 조절하지 않으신 것 아닙니까?”
“했어· 내 능력 몰라? 확실히 했다고· 그래서 이해가 안 간다는 거야· 내 독을 매일같이 먹지 않는 이상 진짜로 불가능한 일인데····”
쿨럭 듣던 마이에브가 갑자기 헛기침했다·
“····”
소녀의 극독이 통하지 않았던 이유·
···그 이유를 마이에브는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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