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
“저기 바이올렛 교수님!”
다음날 커피를 사러가는 길 바이올렛은 아침부터 몇몇 학생들에게 발목을 붙잡혔다·
하나 둘 셋···· 생각보다 그 수가 많다· 바이올렛이 퉁명스레 대답했다·
“왜요·”
“저기 그····”
바이올렛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낸 여학생은 우물쭈물거릴 뿐 말을 잊지 못한다· 결국 옆에 있던 남학생이 당돌하게 입을 열었다·
“게시판에 붙은 등급 벽보를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어서요·”
“어떤 부분이 이상하죠·”
“부정행위를 저지른 학생이 A등급을 받았는데 표기상의 오류인가요?”
“부정행위를 저지른 학생이라····”
바이올렛은 그 말을 되뇌다가 이들이 말하는 ‘부정행위를 저지른 학생’이라는게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플란 학생 말인가요?”
몰려온 학생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인다· 바이올렛은 남학생의 명찰을 확인했다·
“로이렌·”
“네?”
바이올렛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로이렌뿐만 아니라 전부 들으세요· 모든 등급은 부정행위 없이 산정되었습니다·”
“마법 스크롤 사용···· 없었나요?”
“없었는데요· 다른 교수가 그런 소리를 했나요?”
“아니 그냥 소문이····”
“본인들 입으로도 소문이라면서 왜 찾아와· 장난해?”
“·······”
학생들이 난감해하는 표정을 짓더니 서로의 얼굴을 한 번씩 쳐다보며 시선을 교환했다·
그러다 이번에는 처음의 여학생이 입을 열었다·
“플란의 결정이 날아간 거리는 고작 절반정도 아니었나요? 그 거리면 A등급을 받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너희들이 ‘정화 보조’라는 개념을 아예 몰라서 그런거고· 바이올렛은 답답한 마음을 겨우 삼켰다·
“스크롤 사용이 의심되어 재시험을 치렀고 재시험에서는 문제없이 A등급에 해당하는 거리를 출력했어요·”
“그건 저희가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고 저희도 재시험보면 더 잘할 수 있어요!”
또 다른 여학생이 옆에서 거든다· 하아 바이올렛이 한숨을 푹 내쉬면서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플란이 재시험에서 A등급의 기량을 냈다는게 믿기 힘들고 본인들도 재시험을 보고싶다는거죠 지금?”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가냘픈 손 하나를 허공으로 들어올렸다·
“맞잖아? 이제와서 아닌 척 하지말고· 그렇게 생각하는 학생들 손·”
속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안 드는 학생은 없었다· 결국 몰려온 학생들 전부가 손을 들어올렸다
“참나·”
얼굴들을 보아하니 하나같이 B등급 C등급을 받았던 학생들 뿐이다·
“그래요· 여러분도 재시험 보죠·”
“······!”
학생들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그러나 바이올렛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은 채였다·
“대신 방식은 조금 달라요·”
바이올렛이 태연한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일주일 뒤 진행되는 탐험에서 플란보다 기록이 좋으면 무조건 A반으로 승격·”
학생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허나 바이올렛의 제안에 말대꾸를 할 수 있는 학생은 없었다·
그녀의 제안은 지극히 합리적이었다· 플란의 기량을 확인하며 동시에 재시험의 효과도 볼 수 있는 제안이었으니 말이다·
“우두커니 서서 뭐해? 가서 마법 연습이나 하세요·”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서 입만 뻐끔거리는 학생들을 향해 바이올렛은 코웃음을 치고 뒤돌아섰다·
◈
점심시간 메르헨 아카데미의 학식은 그럭저럭 먹어줄 수 있는 수준이었다·
마법이 배고픈 학문이라는 것도 이제는 옛 이야기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포크를 움직이는데·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다니까!”
입가에 음식을 잔뜩 묻힌 베키가 재차 강조했다·
그녀는 나와 식사 ㅡ처음부터 같이하려했던 것은 아니고 그녀가 내 건너편에 대뜸 앉았다ㅡ 를 시작한 후로 온통 바이올렛 교수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중이었다·
“있으면 있는거지·”
“······짜증 안 나? 다른 학생들이 의심하는거? 그리고 안 신기해? 바이올렛 교수님이 그런 조건을 내걸었다는게?”
다른 학생들이 의심하는건 신경 쓸 이유가 없다· 말이 아닌 마법으로 증명해나가야하는 일이므로·
또한 바이올렛이 나를 유별나게 대하는 것도 진작부터 예상한 바다· 오리엔테이션 이후부터 그녀는 나를 주시하고 있으니·
바이올렛이 나를 변호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 이유도 어렵지않게 짐작이갔다·
‘적은 가까이 두겠다는거겠지·’
붙어있어야 감시가 쉬울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게 ‘적’으로 분류될만한 일인가? 집요한 여자였다·
같이 A등급인게 다행이라 어쩌고···· 바이올렛 교수가 저쩌고···· 참새처럼 짹짹대는 베키가 시끄럽다·
그녀의 입가에 잔뜩 묻은 양념이 너무 거슬려서 염동으로 냅킨 하나를 잘 접어 베키에게 건네주었다·
“등급으로 호들갑 떨 것 없다· 중요한건 본인 스스로 마법을 얼마나 탐구하느냐지·”
“야! 등급으로 호들갑 떨게 없긴 뭐가 없어!”
냅킨으로 입가를 문질러 닦은 후 베키가 바쁘게 말을 이어간다·
“A등급 받은 덕분에 이 학식도 드디어 무료로 먹을 수 있게 됐고 3일 후에는 기숙사도 들어갈 수 있고····”
눈쌀이 찌푸려질정도로 귀가 아프다· 딱히 더 먹고싶은 맛의 학식도 아니기에 슬슬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이쿠· 실수·”
그런데 그 때 누군가가 다분히 고의적으로 나를 밀치려들었다· 어렵지 않게 몸을 비틀어서 피해낸다·
“뭐야 피했네?”
덩치가 큰 남학생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무슨 의도였을까 싶어서 지긋이 노려보자 되레 화를 낸다·
“뭘 쳐다봐? 실수한건데 불만있어? 스크롤이라도 쓰게?”
베키가 뒤늦게 일어나서 내 어깨를 툭툭 치면서 속삭였다·
“야 플란 무시해· 분위기가 좀·”
베키의 시선을 좇아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식사를 준비하는 새내기들 식사중인 새내기들 식사를 마친 새내기들 그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해있었다·
물론 그 시선은 곱지 못했다· 베키가 나를 재촉했다·
“얼른 나가자· 쟤네들 열등감 장난 아니야···”
······내게는 이 모든 상황이 가소로워서·
여느때와 별반 다를 바 없이 입꼬리를 슬그머니 밀어올리면서 식당을 나섰다·
이후에는 혼자 있고싶다는 이유로 베키를 떼어냈다·
누구에게나 혼자 있고싶은 시간은 있겠다만 나는 남들에 비해 혼자있고 싶은 시간이 특히나 많다·
‘어느 세계든 열등감은 있겠지·’
나를 향한 부정적인 감정 따위는 익숙하다· 그것들은 오히려 내 증명욕구를 부추기는 훌륭한 연료가 되어줄 터·
배정받은 등급의 강의가 시작되기까지는 이틀의 여유가 있다· 이틀간 무엇을 하며 보낼 것인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재미있는 것은 늘 찾아보면 있다·
지는 쪽은 엎드려 사과하기로 했던가· 피식 웃으며 트리비아의 메모가 가능한 페이지를 펼쳤다·
오늘은 아고라 보드에 어떤 문제를 낼지 고민할 것이다···
◈
기사들의 식사는 투박하고 또 묵직하다·
식기 움직이는 소리조차 거의 나지 않는 유디트의 식탁에서 가주 이반 유디트가 입을 열었다·
“카타리나에게 들었다· 플란이 이틀째 저택으로 복귀하지 않았다고 하더구나·”
일정한 속도로 고기를 썰던 스칼렛의 나이프가 멈춘다· 그녀는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드디어 제 스스로도 수치를 느낄 줄 알게 되었나봅니다· 저택으로 돌아올 면목이 없음을 인지한겁니다·”
“스칼렛·”
이반이 탁 소리가 나게 식기를 바닥에 내려둔다·
“너는 아직도 그때의 일로 플란을 원망하는가·”
“·······”
순간 스칼렛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녀가 슬그머니 눈을 옆으로 굴렸다·
“원망하지 않는 것이 이상합니다·”
이반은 말을 신중하게 골라내는 듯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포크와 나이프를 집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래도 네 동생이다· 행방 정도는 알아보도록·”
“그리 하겠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 스칼렛은 자신의 방 책상에 앉아 잠시 고민했다·
쓰레기 주제에 왜 이틀간 행방이 묘연한가 하인중 누구를 풀어 그를 찾게 할 것인가·
······길게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이번에는 아카데미가 하인 역할을 해줄테니·
유디트가 아카데미의 검술학부에 공헌한 바는 크다· 이 정도 요구는 가볍게 들어주리라·
그녀는 종이를 펼치고 깃펜을 집어들었다·
스칼렛의 손에 쥐어진 것은 그 무엇이든 검과 같다· 그녀의 손을 따라 깃펜이 올곧은 선들을 그어낸다·
그녀는 기사다· 귀찮은 미사여구따위기 편지에 덧붙여지지는 않는다·
서신은 그저 플란의 출석 태도 성적 등등을 묻는 짧은 내용만으로 채워진다· 문장을 고르고 활자로 옮기는 행위가 그녀의 손에서 동시에 이루어진다·
마지막 줄에는 오늘 내로 답신을 달라는 내용까지 확실하게 덧붙였다· 이만하면 충분하다·
책상 한 켠에 놓여있는 종을 울리자 이내 하녀장 카타리나가 스칼렛의 방을 찾는다·
“예· 스칼렛 아가씨· 부르셨나요·”
“메르헨 아카데미에 내 이름으로 부쳐·”
카타리나는 양 손으로 서신을 받아들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스칼렛은 가만히 팔짱을 끼고서 플란과의 식사에서 서로 무엇을 약속했는지 되짚는다·
중간평가까지 최상등급을 가져오지 않는다면 플란은 유디트 가문에서 제명이다· 그녀는 실패한 동생을 향해 어떠한 정도 베풀지 않을 것이다·
“·······”
툭 툭 툭 손 끝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문득 과거의 생각이 밀려든다·
아직 어린 시절의 플란은 검을 쥐고서 스칼렛을 향해 환하게 웃는다· 짧은 다리를 휘적이고 고사리 같은 손을 휘두르며 열심이다·
이내 고개를 털었다·
“······쓰레기·”
콰득 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수련하기에도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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