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0
오로라는 내실 밖으로 나섰다·
황궁의 방문자를 자신의 몸으로 직접 마주했다· 뒤에는 언제나처럼 호위 기사 반을 대동한 채였다·
그리고 황궁의 방문자는 셋째 황녀 유시아·
“····”
복도를 걷던 유시아는 오로라를 마주치자 멈추어섰다· 별로 반가운 마음은 아니었던 건지 조금 당황해하는 것이 보였다·
오로라가 코웃음을 쳤다·
“오라는 놈은 안 오고 안 와도 좋을 놈은 기어코 돌아왔구나· 나를 농간하겠다는 것인지·”
오로라가 중얼거렸다· 사막의 모래알처럼 건조한 음색이었고 둘째 황녀를 그냥 지나치려던 유시아는 멈칫했다·
“괜찮다· 그냥 지나가거라· 오늘만큼은 미천한 동생을 굳이 질책하는 것도 귀찮구나·”
“오늘 플란 경을 호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
오로라는 천천히 미간을 좁혔다· 다만 의외의 말을 내뱉은 유시아의 얼굴을 훑을 뿐이었다·
“또 장난감이 필요해지셨습니까·”
유시아는 감히 오로라의 눈을 마주보았다·
유시아의 금빛 눈동자에는 별도 달도 없지만 다만 그 자체가 천체(天體)처럼 빛났다·
잠깐의 정적 후 오로라가 피식 웃었다·
“직접 나서지 않고도 세상을 다룰 줄 아는 것이 황족이니라· 하여 훌륭한 이를 내 신하로 두겠다는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도 아닐 터인데·”
그렇게 말하며 유시아의 눈두덩이 위로 기다란 검지손가락을 얹는다·
“또한 요즘들어 네 미래가 보이지 않는구나· 갈수록 플란 그 놈과 많이 엮이는 모양이야·”
“그게 어떻단 말씀이십니까·”
“정쟁(政爭)에서 내가 누군가를 살려둔다면 그건 놈의 미래가 훤히 보이기 때문이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겠느냐·”
오로라는 검지에 힘을 주어 유시아의 눈두덩이를 꾸우욱 눌렀다· 유시아는 물러서지 않았다·
“···미래도 안 보이는 네가 이토록 건방지게 군다면 내가 네 눈알을 뽑아버릴지도 모르지·”
“그러신다 한들 플란 경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실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로라가 노골적으로 표정을 구겼다·
심기가 불편했다· 오늘 하루만에 벌써 같은 이야기를 두 번이나 듣게 되니 슬슬 한계였다·
“오늘따라 헛소리를 하는 놈들이 많도다····”
가소롭다는 듯 오로라의 입꼬리가 위를 향했다·
“내가 무언가를 귀찮아하면 물러졌다고 착각하는 놈들이 꼭 생기는구나· 나의 위치를 그새 망각하고 꼭 그따위 소리를 해·”
감상인듯 푸념인듯 애매모호한 목소리· 유시아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것을 맞받아친다·
“오히려 둘째 황녀께서 착각하고 계십니다· 또한 플란 경에 대해서는 조금도 모르고 계십니다·”
둘의 시선이 다시 허공에서 부딪힌다·
“무언가를 빼앗고 조련하실 생각이시겠지만 오히려 그 반대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
유시아의 말에 오로라는 코웃음을 쳤다· 이내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하게 되묻는다·
“유시아 너는 스스로가 내뱉은 말을 장담할 수 있겠느냐·”
“예· 저는 플란 경을 잘 알고있으니까요·”
“····”
참으로 단순한 답변·
그러나 오로라의 호승심과 소유욕에 더더욱 불을 지피기에는 충분한 발언이었다·
“그렇단 말이지·”
두어번 작게 고갯짓을 한 오로라는 이내 미소인지 분노인지 모를 표정을 머금었다·
“처음에는 플란 그 놈을 향해서 분노가 치밀었는데 그게 너에게로 전부 옮겨가려 하는구나·”
“제가 바라던 바입니다·”
유시아는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오로라가 한 걸음 다가가서 둘 사이의 거리를 좁힌다·
“바라는 대로 될지는 지금부터 한 번 보아야지· 너는 나와 내기를 해야만 할 것이다·”
내기·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굉장히 잔인했지만 돌아오는 유시아의 대답은 그저 미소였다·
“어떤 내기일지는 짐작이 가는군요· 저는 플란 경이 길들여지지 않는다에 걸겠습니다·”
“····”
둘째 황녀는 유시아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 한없는 믿음이 아주 거슬렸다·
“그래· 하지만 만약 길들여지면 너는 눈을 내놓아야만 할 것이니라·”
오로라의 취미 중 하나는 안구 수집·
눈동자에 웬만한 천체를 담은 오로라에게 비어있는 것은 ‘태양’· 유시아의 황금빛 눈동자에는 그것이 잠들어있었다·
유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승리한다면····”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혹시라도 그리 된다면 입으로 내뱉을 수 있는 건 전부 들어주지·”
“저는 플란 경을 위한 요구를 할겁니다·”
“그건 네가 적당히 알아서 해라·”
두 황녀는 서로를 교차하며 지나쳤다·
잠시 후 두 황녀의 거리가 완전히 멀어지게 되었을 때· 반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정말로 내기를 하실 생각이십니까?”
오로라가 멈추어섰다· 반 역시 멈추어서서 오로라의 등에다 대고 말을 잇는다·
“그냥 플란을 처벌하고 끝내면 될 일입니다·”
“····”
“그렇지 않습니까·”
결국 오로라는 호위기사를 돌아보았다· 반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셋째 황녀님과 충돌하실 이유는 없습니다·”
“충돌이 아니다· 그냥 밟고 지나갈 뿐이지· 날 때부터 잘근잘근 밟아주었건만 그새 또 주제를 망각한 모양이니라·”
대화는 더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수정구를 준비해라· 내가 직접 입을 열어서 플란 그 놈에게 말을 전달해야겠으니·”
그 말을 끝으로 오로라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명령에 번복은 없었고 그 뜻을 이해한 반은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
다음날 아침·
플란을 제외한 마법 학부의 세 대표들은 현재 연구실에서 녹초가 되어있었다·
“이러다 진짜 죽겠어···· 마탑이 소환수면 얼마나 좋을까? 그냥 딱 소환하면 생기게 말이야·”
베키가 골골대며 책상에 엎드렸다·
이들이 녹초가 된 이유는 지극히 단순했다·
재정 문제가 해결되자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마탑을 건설할 토지였고 플란은 그 토지의 선별을 대뜸 세 마법사에게 일임했다·
문제는 ‘선별’의 난이도가 엄청났다는 것이다·
입체 지도의 지형 관측 기류 관측 밀도 관측···· 심지어 각 관측마다 엄청난 양의 마나와 집중력을 요구한다·
그 결과 이들이 밤을 새야만 하는 것은 애초부터 굳이 두말할 필요도 없는 기정사실이었다·
“그러게· 플란이 우리를 믿고 맡겨준 건 기쁜데 한편으로는 어깨가 너무 무겁다· 우리가 지금 찾고 있는 건 무려 마탑을 지을 장소니까·”
목소리의 주인은 루이스였다· 평소처럼 환하게 웃고는 있지만 어느샌가 그의 얼굴에도 다크 서클이 자리하고 있었다·
“참 이상하단 말이지· 분명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고 플란이 우리보다 마법도 잘하잖아· 그런데 이걸 왜 굳이 우리한테 맡기는 걸까?”
“나도 그 점이 궁금해· 역시 우리한테 전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는 건 아닐까 싶은데·”
“···그거 진짜로 가능성 있네· 플란이라면·”
얌 하는 소리를 내면서 베키가 에그타르트를 크게 한 입 베어물었다·
트릭시의 하녀들이 새벽에 이곳까지 들러서 고급진 디저트와 도시락을 챙겨주었는데 사실상 베키의 입으로 전부가 들어가게 되었다·
“근데 괜찮은 땅을 찾았는데 이미 누가 쓰고있는 땅이면 어떡해?”
“플란이 그건 걱정하지 말라고 했어· 뭐가 있든간에 결국은 마탑을 짓게 될거라면서·”
“하긴···한다면 하는 녀석이지· 플란은· 아니 잠깐만· 그럼 집이 있어도 그냥 밀어버린다는 거야?”
중얼거리던 베키의 입이 떠억 벌어졌다· 그리고 어느샌가 문득 둘의 시선이 트릭시에게로 향한다·
“트릭시· 너는 뭐라도 좀 알겠어?”
“음?”
당근을 오독오독 씹던 트릭시는 베키의 난데없는 부름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뭘·”
“아니 플란이 몇 번이나 강조했었잖아·”
베키가 이번에는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그게 영 거슬려서 트릭시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토지 선별은 트릭시 네가 총 책임자고 또 제일 중요하다고 말이야· 뭔가 알고있는 게 있어서 플란이 그렇게 말한 거 아니었어?”
트릭시는 묵묵히 토끼처럼 당근만 씹었다·
베키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플란은 이번 선별에서 트릭시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었으니까·
그런데 뭘 알아야 말이지·
입체 지도를 살피면서 적합한 장소를 선별하라는데 정작 자신은 하나도 아는 게 없었다·
···그냥 가르침씨의 장갑을 준다길래 참여했다·
“레헬른 언덕은 어때?”
베키가 좋은 생각 아니냐는 듯 눈을 번쩍 떴다·
하지만 루이스가 조용히 고개를 젓는다·
“요즘 급격하게 퍼지는 소문이 있어· 언덕 쪽의 결계가 약화되어서 굉장히 위험한 지역으로 변해가고 있대·”
“정말? 어라 입체 지도를 지금 보니까 기류가 조금 혼탁해진 것 같기도 하고····”
“그래· 아예 뜬 소문은 아닌 것 같아·”
바쁘게 대화를 나누면서도 그들은 계속해서 입체 지도 속의 지형들을 살펴나갔다·
그러나 학생 수준인 그들이 보기에도 플란이 내건 27가지의 조건과 ‘완벽하게’ 부합하는 지형이라는건 거의 없었다·
아니 아예 없었다·
“심지어 아카데미 내부에도 이런 장소는 없어· 이러면 근방에 남는 곳은 한 군데 뿐인데····”
“어? 그렇네! 아직 거기를 안 해봤네!”
도대체 어느 장소를 이야기하는 건지· 트릭시는 슬슬 발레라도 하면서 몸을 풀고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가르침 씨의 안대를 선불로 받아버렸으니까·
트릭시는 결국 따분함을 이겨내기 위해 혼자만의 상상에 빠져들었다·
안대를 선물하는 것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네 눈에는 온통 나만 보여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를 담아서 준 거 아닐까· 가능성이 있다·
“트릭시! 이쪽 구역 네가 한 번 살펴봐봐!”
“····”
베키의 요란한 목소리로 인해 상념이 박살났다· 현실로 돌아온 트릭시는 조용히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베키가 말했다·
“나랑 루이스는 마나를 다 써버렸어· 그리고 관측 분야에서는 네가 제일 성적이 높잖아·”
“알았어·”
트릭시는 마지못해 입체 지도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겼다· 한 구역 정도라면 가능할 거다·
“시작한다·”
트릭시는 마나를 끌어올려 관측에 나섰다·
매초마다 마나가 뭉텅이로 소모되며 그 지역의 실체가 드러났고 그렇게 정보를 얻게될 수록 셋 모두 눈을 감아야만 했다·
눈이 부시게 청명한 푸른 기류·
이 구역은 마탑을 충분히 세우고도 남을만큼 눈부신 광채 그리고 풍부한 영양을 품고 있었다·
“오! 성공이다!”
“플란이 트릭시에게 맡긴 이유가 있었네·”
베키는 양 손을 하늘로 뻗으며 쾌재를 불렀고 루이스는 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러나·
트릭시만이 오히려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이거 왜 익숙하지·”
이상하리만치 눈에 밟힌다·
어딘가 모르게 익숙하고 고작 지형과 고도만 확인했을 뿐인데 상세한 모습까지도 머릿속에 그려지는 듯 하다· 심지어 향도 나는 것 같고·
본인의 마법적인 경지가 상승한 것인가·
그러다 문득 어느 순간·
어떠한 생각이 트릭시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잠깐 잠깐·”
동시에 트릭시는 플란이 왜 자신을 총책임자라고 칭하며 강조했는지도 깨닫게 되었다·
“····”
트릭시가 서서히 미간을 좁혔다· 저도 모르게 한 차례 마른침을 삼키게 된다·
가로로 길게 늘어져있는 순백색의 저택·
호수를 품고 꽃이 만개해있는 정원·
계절에 따라 각기의 아름다움을 품는 곳·
이곳은 분명····
“···우리 저택이잖아!”
트릭시는 까무라칠 듯 놀라하며 벌떡 일어났다·
마탑을 짓기 적당한 장소라는 건 바로 프리츠·
본인 가문의 저택이 위치한 장소였다·
◈
나는 아카데미의 도서관에 있다·
“흐음·”
이곳에서 밤을 새는 건 학파를 조사하는 데에 그럭저럭 도움이 되었다· 애초에 수만권의 책이 있는 공간이니 도움이 안 되는 것이 이상하다·
문득 시계를 바라보았다·
지금쯤이면 트릭시도 마탑을 짓기에 적합한 장소가 어디인지를 알아냈을 터·
나는 그곳에 마탑을 짓겠노라고 이미 내정해두었기에 지금부터는 설득하는게 관건일 것이다·
“또 궁정 마법사들과의 토론이라 했던가····”
조사 조사 조사 조사·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위를 점할 수 있도록 나는 정보에 집중한다·
그렇게 또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순간 인기척이 느껴졌다·
“플란·”
난데없이 나타난 기사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독서에 집중했다·
···다섯 페이지만 더 읽으면 끝이었기에·
“플란·”
“플란·”
“플란!”
그들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거의 고함이 되었을때쯤 나는 마침내 전부 읽은 책을 덮었다·
그것을 책장에 다시 꽂아둔 후에야 나는 몸을 돌려 그들을 돌아보았다·
기사가 말했다·
“둘째 황녀님의 호출이 있었다·”
“알고있다·”
그러자 그가 표정을 조금 구기고서 말한다·
“그리고 너는 황궁을 방문하지 않았지·”
“알고있다·”
그의 표정이 더더욱 일그러졌다· 엄중하기 그지없던 그의 목소리에 분노가 살짝 묻어난다·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정녕 모르겠나·”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나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알고있다·”
나는 모르는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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