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1
오로라는 늘 원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손에 넣었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영리했고 또한 동시에 유능했으니까·
황제는 위중하여 오늘 하루를 무사히 넘길 수 있는지도 알 수 없었고 감정을 베는 자· 첫째 황녀 나이오비는 진정한 자신을 찾겠다며 여로에 오른 상황이다·
셋째 황녀인 유시아는 무려 10년에 가까운 세월을 식물인간 상태로 병상에서 보냈으니 아무리 눈치가 없는 이라도 황궁 내부에서 누구의 명령에 따라야 할지를 판단하기가 별로 어렵지는 않았다·
“흐음····”
그러나 오늘·
황궁의 실세 오로라는 실로 오랜만에 귀찮음인지 어려움인지 모를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어느덧 벌써 자정에 근접해가는 시각·
오직 한 명에게 자신의 음성을 전달하기 위해서 심지어 자신의 수면까지도 미루어가며 기다렸다·
지이잉─
그리고 마침내 수정구가 빛을 발하자마자 오로라는 자기 손바닥을 얹었다· 원래라면 어제 마주했어야 할 사내· 플란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났다·
“네놈이 드디어 얼굴을 보이는구나·”
“예·”
수정구슬은 플란이 실제로 오로라의 앞에 있는 듯 모습을 생생하게 투과해냈다·
“····”
오로라는 말없이 플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말없이 바른 자세를 지켰고 흠잡을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격식’을 사람으로 빚어낸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의문은 깊어져 간다· 이러한 녀석이 어째서 자신의 명령에 불응하였는가·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오로라였다·
“플란·”
“예·”
반의 염려 어린 목소리 플란을 길들일 수 없을 거라던 유시아의 확신· 그 두 가지는 결국 오로라가 고민이라는 것을 하도록 만들었다·
“이 내가 호출했는데 감히 불응하는 녀석이 하나 있었느니라·”
오로라는 일부러 무표정을 지어 보였다· 관료들을 늘 공포에 떨게 했던 무감함이 서서히 얼굴에 담긴다·
“심지어 뜻을 두 번 넘게 전달했건만 결국 마지막까지도 황궁에 방문하지 않았느니라·”
그러나 이러한 소리를 들으면서도 플란은 태연하다· 올곧은 눈으로 오로라를 바라볼 뿐이다·
자신을 마주하고도 공포에 떨지 않는다· 격식을 차리지만 결코 숙이지는 않는다· 환심을 사는 것보다는 솔직한 자신을 내보이는 것이 우선이다···· 플란은 그러했다·
‘겁이 없는 것인지·’
투자자를 모을 수 있도록 강림제도 열어주었고 부족한 자금도 대주겠다고 했건만 여전히 오로라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 영 오묘하다·
“왜 방문하지 않았느냐· 나를 납득시켜야만 할 것이다·”
“····”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를 납득시키지 못한 것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같은 결말을 맞이했다· 이런 것까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 없겠지·”
플란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오로라의 이야기는 완전히 남의 일이라는 것처럼·
“···그랬습니까·”
“그래· 앞으로도 예외는 없을 것이니라·”
“황녀께선 제가 궁정 마법사들과 토론을 나누고 마법을 전수할 것을 바랬던 것 아닙니까·”
“그렇지· 전언을 읽기는 읽은 모양이로구나·”
오로라가 조용히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궁정 마법사들이 제게로 올 줄 알았습니다·”
“····”
잠시 정적이 흘렀다·
“방금 뭐라고 했느냐·”
“마법 토론은 상석(上席)을 기준으로 모이는 것이니 당연히 제게로 올 줄 알았습니다·”
피식 웃음을 터뜨리는 오로라였다·
“너는 말을 참 재미있게 하는구나· 궁정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네가 상석일 자신이 있다는 말이냐·”
“예·”
“너의 그 확신은 가상하다· 진취적인 태도 역시 높이 사니라· 그러나· 이 내가 보기에는 말이다·”
이어지는 목소리는 차분하지만 또 서늘하다·
“너는 아직 고작 학생에 불과한 것 아닌가·”
둘째 황녀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싸늘하게 얼어붙은 냉소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다·
“나는 황궁을 벗어난 적 없이 세계를 깨우쳤고 황궁을 벗어나지 않고도 대륙을 다루고 있느니라·”
오로라는 천천히 권좌로부터 내려왔다·
투영된 플란의 모습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선다·
“대륙은 넓고 천재는 수도 없이 많다· 너는 네가 정점에 서리라고 과연 확신할 수 있느냐· 그 정도가 아니라면 나는 납득할 수가 없도다·”
“확신합니다·”
“정말이지 정신이 나간 녀석이로구나·”
오로라의 표정이 애매모호하게 굳었다· 동시에 황녀의 내실에는 정적이 내려앉는다·
“····”
생각을 정리하는 것인지 감정을 추스르는 것인지 오로라가 눈을 여러 차례 깜빡였다· 아마 둘 다일 것이다·
“너는 세상을 너무 만만하게 본다·”
“만만해질 때까지 증명해왔을 뿐·”
“그래? 그 증명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너보다 어린 나이에 훨씬 많은 업적을 이룬 녀석들도 내 밑에는 즐비해 있느니라·”
“제 한계가 훤히 보이신다면·”
플란의 목소리는 거의 오로라의 목소리를 잘라내다시피 했다· 황녀가 눈썹을 꿈틀거린다·
“황녀님께서는 저에게 왜 관심을 가지시는지·”
잠시 공간이 고요해졌다·
오로라는 잠시 할 말을 잃어버린 채로 눈앞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아직 플란의 한계를 알 수 없긴 했다· 이유는 불명이지만 자기 능력이 통하질 않았으니까·
가만히 선 오로라를 상대로 플란은 조금도 주눅 들지 않은 채 자기 말을 이어간다·
“아직 이 세계의 마법은 형편없습니다·”
“···이 세계?”
오로라는 ‘이 세계’라는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이 세계 이 세계라· 무언가 이물감이 느껴졌지만 우선은 흘려 넘겼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까·
“저는 기어코 세상의 중심에 마법을 두겠습니다·”
마침내 오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그렇게까지 자신이 있다면····”
마침내 오로라가 검지 하나를 쭉 펼쳤다· 그것을 자신의 눈가에 얹는다·
“나는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수밖에 없겠구나· 네놈의 미래는 건방지게도 통 보이질 않으니·”
그녀는 자신의 권좌 옆으로 펼쳐져 있는 지도의 어느 한 부분을 가리켰다· 레헬른 언덕· 최근 오로라가 결계를 약화해둔 지역이었다·
“레헬른 언덕에는 ‘여명 나비’라는 것이 있다·”
오로라가 반쯤 눈을 감았다·
“혈귀들을 헤치고 다른 이들과 경쟁하면서 너는 여명 나비를 잡아 올 수 있겠느냐·”
동이 틀 무렵의 희미한 빛을 날개에 담은 신묘한 생물 여명 나비·
살짝만 건드려도 빛을 잃어버린다는 특성도 특성이지만 날갯짓 한 번으로 ‘순간 이동’을 사용한다는 것이야말로 녀석이 까다로운 이유였다·
어느 곳으로 순간 이동했는지를 모르니 당연히 쫓을 수도 없다· 따라서 얼핏 스쳐 가듯 보았다는 사람은 꽤 많아도 길게 관찰해보거나 채집해본 사람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여명 나비는 이 주일 뒤부터 활동을 시작한다지 그때부터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주겠느니라· 동료는 네 알아서 총 네 명을 꾸려라·”
“황녀님·”
“안 되느니라·”
오로라는 플란의 말을 한 차례 끊었다·
“이는 제안이 아니라 명령이다· 결과로써 나를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어제 황궁을 방문하지 않은 죄를 엄중하게 물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플란의 선명한 음색이 오로라의 귓전으로 스며들었다·
동시에 그의 모습이 안개처럼 흐려지기 시작했다· 모습을 투과하는 수정구를 유지해 두는 데에도 슬슬 한계가 찾아온 모양이었다·
“여명 나비는 제가 잡아둘 것입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음성·
“다만 증명에 성공했을 때·”
그리고 확신처럼 이어지는 말·
“토론은 마탑에서 합니다· 황녀께서도 황궁이 아닌 마탑에서 마법을 전수하십시오·”
“이건 내기가 아닌 명령이라 말했을 터인데·”
“어차피 곧 그리될 것입니다·”
의미심장한 말을 끝으로 이내 플란의 형체는 조금의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건방지다·”
고요만이 남은 공간· 오로라는 권좌에 앉은 채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꺾이기까지는 앞으로 3주인가····”
플란이 꺾이게 되는 것은 사실상 기정사실이었다·
여명 나비의 환심을 사서 불러들이는 것은 불가능에 근접한 무언가고 그것을 순간 이동으로 뒤쫓아 다니는 것은 불가능 그 자체이니·
그런데 그때·
“황녀님·”
호위 기사 반이 조심스레 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정중하게 예를 갖춘다·
“기사들이 도착한 모양입니다· 슬슬 수정구를 발동시키도록 하겠습니다·”
“···?”
오로라는 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수정구는 계속 발동되어 있던 것 아니었느냐·”
“예?”
그러나 반의 얼굴도 황녀와 똑같아진다· 그 역시 오로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
“····”
잠시 흐르는 정적·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반이었다·
“아직 수정구를 발동하지 않았습니다· 기사들이 대상과 조우한 것이 확인되어 이제 막 플란의 모습을 투영하려 했습니다만····”
오로라는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미간을 좁힌 채 현재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잠시 고민할 뿐이었다·
“···!”
그리고 이해에 다다르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순간이동···· 순간이동을 한 것인가···?”
중얼거리는 오로라의 목소리에는 흔치 않게 당황이 묻어있었다·
◈
도서관을 나서자마자 바이올렛을 마주쳤다·
우연히 마주친 것은 아니고 바이올렛이 여태까지 나를 찾아다닌 듯했다·
“아 플란·”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방울을 닦아내며 바이올렛이 나를 바라보았다·
이전과 비교하면 얼굴에는 생기가 넘친다· 당장 그녀의 얼굴에서 더 이상 다크서클을 찾아볼 수 없는 것만 보아도 그랬다·
“····”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할 말이 있으면 그냥 하라는 뜻이었다·
“아 다른 게 아니라· 고대 룬어 연구를 같이 하기로 했었잖아요· 그것 때문에·”
바이올렛은 조금 급해 보이기도 했고 들떠 보이기도 했다· 아마 둘 다일 것이다· 원하는 것을 대놓고 연구할 수 있게 되었을 때의 기쁨은 더없이 클 테니까·
“이것들은 제가 최근에 혼자서 또 연구해본 것들인데···· 아 아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내 정신 좀 봐·”
그녀는 꽤 정신이 없어 보였다· 서류 뭉치를 한가득 끌어안고 있었고 품이 넓은 로브는 바닥에 질질 끌리고 있었으니까·
“엇!”
그러다 어느 순간 바닥까지 늘어진 로브 끝자락을 실수로 밟고는 넘어져 버린다·
요란하게 팔을 허우적거리던 바이올렛이 양손으로 다급하게 내 몸을 짚는다·
그녀의 머리에 쓰여 있던 고깔모자는 바닥으로 흘러내렸고 허공에 비둘기처럼 흩날리는 종이들은 내가 염동으로 붙잡아주었다·
“아 미안해요· 내가 마음이 너무 급해···· 악!”
바이올렛의 정수리에 있던 개구리가 그녀의 얼굴 위로 찰싹 달라붙었다·
“모자 내 모자가···!”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서 개구리를 바이올렛의 정수리 위로 다시 올려두었다· 위에 고깔모자를 씌워준 것은 덤이었다·
“고 고마워요· 정신이 없네· 정신이·”
“차분하게 결론만 부탁드립니다·”
“아 그게·”
바이올렛이 가쁜 숨을 고르면서 손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문질러 닦는다·
“마법 학부에 고대 룬어 연구실이 하나밖에 없는데 슬슬 청소를 해야 할 것 같거든요·”
마법 학부에 있는 고대 룬어 연구실·
그 장소라면 나도 알고 있었다· 하도 낡아서·
“슬슬 손을 볼 때가 되긴 했군·”
“문제는 청소하는 과정에서 마법을 사용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가뜩이나 넓은 공간인데·”
이유는 대충 짐작이 간다·
아마 쌓여있는 고대 룬어들이나 아직 활용해보지 못한 장비들 탓일 테지· 청소를 위해 사용한 마법이 고대 룬어와 뒤엉켜 이상 현상이 발생하기라도 하면 크게 곤란해질 터·
“알아서 하겠습니다·”
하지만 내가 나선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나는 이미 이전 세계에서부터 고대 룬어에 관한 연구를 해왔었으니 30초도 지나기 전에 청소를 끝마칠 자신이 있었다·
“뭐래 떠넘기려고 이야기 꺼낸 거 아니에요· 같이 쓰게 될 연구실인데 같이 해·”
“필요 없습니다·”
“이러면 제가 학생에게 청소를 일임시킨 무책임한 교수 같잖아요· 그런 거 질색이야·”
그러나 바이올렛이 생각보다 끈질겼다· 학생을 위해주는 마음은 좋은 것이겠으나 나는 이러한 반응이 그저 귀찮았다·
그때·
“····”
문득 내 시선이 어딘가에 고정되었다·
한 명의 행인이 유유히 걸어가는 것일 뿐이지만 나는 본능처럼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건 덥수룩한 차림의 청소부였다·
“···왜요? 아 청소부들도 부를까요?”
내 시선을 뒤쫓은 바이올렛이 물었지만 나의 시선과 사고는 오로지 청소부에게 향해있었다·
전이(轉移)·
“····”
보면 볼수록 확실하다· 내가 이 세계로 전이되어 지금의 몸을 가졌을 당시 마주친 인물·
내게 화장실 청소를 시킨 인물·
양 세계를 통틀어 그가 유일하다·
내 머리를 때린 건 그가 유일하다·
“···청소는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나는 청소부에게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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