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3
프리츠 가문의 저택 트릭시의 방·
‘방’이라고 부르기엔 어폐가 느껴질 정도로 넓은 공간에서 부녀는 오랜만에 만남을 가졌다·
내부에서는 향긋한 차향이 퍼져나가는 중이었지만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까지도 훈훈하지는 못했다·
“딸아· 저택을 밀어버린다고 했느냐·”
프리츠 가문의 가주· 아이작 폰 프리츠·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무덤덤하고 그렇기에 대하기가 더더욱 어려웠다·
“쿨럭─!”
아이작이 기침을 거세게 토해냈다·
트릭시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비단 대화 주제가 껄끄럽기 때문에 피한 것은 아니었다· 눈에 띄게 노쇠해져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직시한다는 것이 소녀에게는 아직 어렵고 힘든 일이었을 뿐·
“용케도 그런 소리를 하는 녀석을 데려왔구나·”
“····”
트릭시는 여전히 아버지의 표정을 읽어낼 수가 없었다· 말투에는 억양이 없고 얼굴 위로는 감정이랄 것이 없었으니·
“이 영지에 무엇이 있는지는 뻔히 알 텐데·”
“알아·”
트릭시에게 ‘푸른 화염’을 물려준 장본인 어머니의 숨결이 잔뜩 묻어있는 곳· 그것이 바로 비옥한 프리츠의 영지였다·
트릭시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빠가 반대할 것도 나는 알고 있었어·”
“뻔히 알면서도 그리했단 말이지·”
아이작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면서도 기어코 여기까지 데려온 데에는 이유가 있을 테지· 나는 그 이유가 듣고 싶구나·”
“갖고 싶은 물건이 있었어·”
“금화로는 해결할 수 없었단 말이냐·”
트릭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책상 위로 벨트 하나를 조심스레 올려놓는다·
“응· 정말 갖고 싶은 물건이었는데 이걸 받는 대가로 여기까지 데려오게 된 거야· 어차피 아빠가 거절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딸아·”
그 두글자를 내뱉은 후 아이작은 트릭시의 얼굴을 잠시간 지긋이 바라보았다·
“···너는 또 아비에게 거짓말을 하는구나·”
결국 트릭시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아버지는 자기 말에 속는 법이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늘· 단 한 번도·
“내 딸에게는 전혀 다른 목적이 있는 것 같은데· 이 아비가 틀리게 본 것이냐·”
소녀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역시 진실을 고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빠·”
“할 말이 있다면 하려무나·”
“엄마의 뜻을 이어받기 위해서 나는 반드시 대마법사의 경지까지 올라갈 거야· 그래야만 해·”
트릭시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간다·
“하지만 인정하기 싫어도 나는 플란과 다니면서 마법적인 성취를 여럿 이룰 수 있었어·”
천재를 연기하는 바보·
과거의 트릭시를 설명했던 수식어· 허나 소녀는 플란 덕분에 ‘천재로 보여야만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의 트릭시는 새로운 도전에도 기꺼이 눈을 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만약 마탑이 지어지게 된다면 내 경지는 지금보다도 훨씬 높아지게 될 거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단 말이지·”
이해한다는 듯 아이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고민하고 있구나· 대마법사라는 경지를 향해서 그저 나아갈지 이 영지를 지켜낼지·”
“응·”
“기특한 고민이지만 칭찬해줄 수는 없구나·”
아이작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억양이 없다· 하지만 트릭시는 아버지의 음성이 조금 더 단호해진 것 같다고 느꼈다·
“결국 스스로 결정을 내리지 못했기에 나를 속일 생각까지 했다는 것 아니더냐·”
“이런 건 배우지 않았어· 그래서 몰라·”
“배우지 않은 것조차 해낼 수 있는 것· 가주에게 필요한 것은 미래조차 뛰어넘을 수 있는 직관이다·”
“직관····”
트릭시는 두 글자를 멍하니 중얼거렸다·
배운 것들만을 완벽히 해내 왔던 소녀에게 있어서 예측되지 않는 미래조차 뛰어넘을 도약은 아직 너무나도 어려운 것이었다·
“나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만약 시기가 조금 더 늦어서 네가 내 의견을 물어볼 수 없었더라면 어쩔 뻔했느냐?”
“그랬으면····”
트릭시가 미간을 좁혔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하아·”
아이작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이것에도 억양이 없어 한숨인지 날숨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아마 한숨일 것이었다·
“딸아·”
트릭시는 아버지의 시선을 받으며 대답했다·
“응·”
“너는 아직 갈 길이 너무나도 멀구나· 가주를 맡기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해· 이번 건은 내가 플란을 직접 만나보고 결정을 내리마·”
“그렇게 해·”
“다만·”
아이작이 여윈 손으로 트릭시의 손을 잡았다·
“너는 프리츠의 가훈만 꼭 기억하고 있거라·”
“가훈·”
“그래 가훈·”
트릭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불을 붙이려면 자신부터 지펴라·”
그것을 작게 중얼거리면서·
◈
프리츠 가문의 응접실·
“소문의 주인공들을 내가 직접 보게 되다니·”
모습을 드러낸 아이작이 내뱉은 첫마디에 옆에 서 있던 루이스와 베키가 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마법사 베키입니다!”
“루이스입니다·”
가주는 괘념치 말라는 듯 가볍게 손을 저었다·
“편하게 머무르게나· 딸아이와 함께 다니는 대표들인데 응당 환대해주는 것이 도리겠지·”
“허억 감사합니다!”
베키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나는 아이작의 모습을 천천히 살폈다·
장발로 기른 남색 빛 머리카락과 수염· 비쩍 마른 몸이었지만 흠잡을 곳 없는 기운은 그가 여전히 훌륭한 마법사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다만 유난히 눈에 띄는 특징이 있었으니·
‘인형 같군·’
아이작의 목소리에는 고저가 없으며 또한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그저 인간을 흉내 내는 인형이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그러한 생각을 하는 사이에도 그의 시선은 나에게만 향해있었고 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마법사· 플란이다·”
아이작은 내 인사를 듣고 아주 옅은 반응을 보였다· 아마 나름대로 웃음을 터뜨린 듯했다·
베키가 까치발을 들고서 내게 귓속말했다·
“야 플란! 좀 더 그 정중함이라는 게 있잖아!”
“이만하면 정중하다·”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당연하게도 베키가 포기하는 것이 빨랐다·
쿨럭─!
그때· 아이작이 몸이 크게 흔들릴 정도로 기침을 토해냈다· 척 보기에도 상황이 심각해서 순간 분위기가 미묘해졌다·
“실례했네· 내가 몸이 조금 안 좋아· 이해하게·”
조금 안 좋은 수준이 아닌 것 같았으나 그는 우리를 나름대로 안심시킨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전해 들었고 계획서도 살폈네 이 저택을 없애고 마탑을 짓겠다고 했는가?”
“그래·”
“하루아침에 그런 말을 듣게 되니 경황이 없구먼 잠시 단둘이서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와 단둘이서 대화하는 것이 가장 빠를 것이기에 오히려 이쪽에서도 바라던 바였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베키가 입 모양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외치고 있었다·
‘잘 하 고 와!’
나와 아이작은 한동안 저택의 외부를 걸었다·
그는 지팡이로 바닥을 짚어가며 천천히 나아갔지만 나는 굳이 답답해하지 않았다· 날씨도 풍경도 제법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하늘은 물감으로 칠한 듯 푸르고 불어오는 바람은 제법 상냥하다· 누구라도 소풍의 유혹에 시달릴법한 쾌적한 날이었다·
아니 그들은 이미 소풍 중인 듯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어머? 신문에서 봤던 분이다!”
“우리 곰돌이 공주님 잘 부탁해요!”
나를 마주치면 눈부터 내리고 보는 유디트의 하녀들과는 확연하게 다르다· 각자의 업무에 충실히 하는 와중에도 그들은 소풍을 만끽하듯 분위기가 밝았다·
영지민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아이작을 마주하는 이들은 전부 밝게 인사했고 그 미소에는 거짓이 없었다·
문득 아이작이 중얼거렸다·
“적응이 필요할 걸세· 다들 생기가 넘치거든·”
“좋은 곳이군·”
“그래· 좋은 곳이지· 좋은 곳····”
그 말을 중얼거리는 아이작의 눈이 깊었다·
그렇게 아이작의 뒤를 쫓아서 한참이나 걷다 보니 마침내 거대한 정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언덕’이라고 표현해야만 어폐가 없을 정도의 크기였다·
“흥미롭군·”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이었다·
그 정원의 비범함은 단지 넓이에 국한되지 않았다· 거대한 식물 줄기의 끝에 꽃이 아닌 책이 피어있는 모습· 서적의 꽃봉오리가 모여 정원을 이루고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서 신비였다·
“책이 마력을 담고 있는가 훌륭하다·”
“역시 바로 알아보는구만· 대부분은 그저 감탄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말이지·”
활자는 그저 활자일 뿐이다·
활자로 적힌 술식 또한 그저 술식일 뿐이지만 그 힘이 굉장하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것이 어딘가에 적히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스스로 마력을 품고 발현하게 되는 것이다·
마력서·
이전 세계에서는 이러한 책들을 그리 칭했다· 구하기 힘들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한데 그것이 지금 무려 정원의 형태로 펼쳐져 있었다· 한 명의 마법사로서 흥미가 크게 동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모으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만·”
“나는 프리츠일세· 흔하지 않은 걸 흔해 보일 때까지 모을 정도는 돼· 한데 프리츠의 정원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는 겐가?”
“전혀·”
“이상하구만· 이 세계의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아주 유명할 것이라 스스로 자부했거늘·”
정원의 한 가운데에는 아주 커다란 책이 의자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는 먼저 자리에 앉은 다음 건너편에 내가 앉도록 권한다·
“마법 학부의 대표들을 눈으로 직접 보니 기특하더군· 나이에 비해서 느껴지는 마력이 훌륭하고 또 예의도 발라서 풋풋한 맛이 있어·”
“나름대로 엄선한 원석들이니까·”
“하지만 얼굴이 기억나냐고 묻는다면 아니네·”
아이작이 지팡이로 지면을 한 번 두드리자 꽃봉오리 모양의 책 하나가 열리더니 찻잔과 주전자를 뱉어낸다·
그는 염동으로 주전자를 기울였고 이내 두 개의 찻잔이 가득 채워진다·
“플란 자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기 때문이야· 보자마자 감탄했네· 한잔하겠나?”
감탄한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억양이 전혀 없으니 듣는 귀가 어색하다· 나는 조용히 그가 내미는 찻잔을 받아들었다·
“과연 변화의 중심이라는 것인지 말은 짧아도 품격은 가장 있더군· 옆에 서 있던 두 명이 어린아이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네·”
“뭐 됐다·”
나는 차를 한모금했다·
입안에 감도는 향취가 썩 고급스러웠다· 트릭시가 으레 향수로 뿌리고 다녔던 그 향이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갔으면 한다만·”
“그래· 그러지·”
아이작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품속으로부터 둥그렇게 말린 종이 하나를 꺼내 펼친다·
“자네가 준 계획서는 꼼꼼히 살펴보았다네· 이 영지가 마탑을 세우기에는 가장 적절하다지·”
“그래·”
“토짓값을 배로 쳐주겠다는 것도 프리츠의 인물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환경에서 지내게 해주겠다는 것도 확인했네만····”
아이작이 다시 종이를 돌돌 말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도 존재하는 법이네· 이런 일을 재물만으로 해결할 수는 없어·”
“그 답변이 거절처럼 들리지는 않는군·”
나는 찻잔을 내려놓고서 말을 이었다·
“다른 것을 원한다면 제시해라· 마탑을 짓기 위해서이니 나 또한 많은 것들을 고려하지·”
“그래· 그럼 한 가지만 제시하겠네·”
아이작 역시 찻잔을 내려놓는다·
그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트릭시를 평생 책임져 주었으면 하네·”
조금은 미묘하고 또 조금은 의미심장한 발언에 정원에서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적어도 스스로 마법의 길을 찾아 나설 수 있을 때까지는 키워줄 생각이다·”
“그런 뜻이 아니네· 플란·”
그의 얼굴에서는 트릭시의 것과 닮은 남색 빛 눈동자가 일렁인다·
그는 나와 시선을 마주한 채 자신이 지금 내뱉는 것들이 진심이라는 것을 아주 필사적으로 내보이고 있었다·
문득 재스민 향이 짙어졌다고 느낀 순간·
“트릭시와 혼인한다면 나 또한 허락하겠네·”
그는 그렇게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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