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4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나는 방금 들은 두 글자를 다시 한번 읊조렸다·
“혼인?”
“그래· 혼인·”
아이작은 내 생각이 틀리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그는 내가 트릭시와 법률적인 부부 관계가 되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잠시 생각했으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하지·”
담담하게 대답을 내뱉었다· 서류에 도장을 찍는 일 따위에 어려움이 있지는 않고 고작 혼인 따위가 내 족쇄가 될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역시 자네라면 쉽게 수락할 줄 알았네·”
아이작의 얼굴에는 여전히 어떠한 표정이 없다· 목소리에도 억양이 존재하지 않았으나 그에게 진중함이 한층 더 깃들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플란 눈동자를 보면 알 수 있지· 자네에게 결혼은 서류상의 계약 이상도 이하도 아닐걸세·”
“실제로 결혼이라는 게 그러하지·”
“그래· 하지만 내가 말하는 결혼은 좀 다르네·”
아이작이 지팡이로 툭 소리가 나게 노면을 두드렸다· 그러자 옆의 커다란 꽃봉오리가 즉시 반응한다·
꽃잎 대신 두꺼운 책 표지가 꽃잎의 형상을 이루고 있는 그 신묘한 식물은 꽃봉오리를 활짝 벌리며 안에 머금고 있던 서류들을 뱉어냈다·
“자네를 향한 조사를 마쳤다네· 작은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건만 오히려 알면 알수록 호기심이 되레 커지더군·”
“그건 당신만 알고 있는 것인가·”
“당신이라 그런 호칭에는 익숙지가 않구만·”
아이작이 수염을 몇 번 쓰다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보는 나만 알고 있네· 딸아이에게는 굳이 말하지 않았지·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렇군· 이제 궁금한 게 있다면 나에게 직접 묻지 그래·”
“그래 플란· 나는 자네가 지닌 것들이 프리츠의 무기가 되길 바란다네· 유디트의 이름값 고유 능력 회로 자네의 확신과 마법 실력·”
“프리츠의 무기라····”
“생각해보게· 작열과 푸른 화염이 합쳐지면 무엇이 태어날까· 고결하지 않은가? 나는 그 상상만으로도 전율한다네·”
퉁─
그가 지팡이로 노면을 한 번 더 두드린다·
“그러나·”
바닥에 마구잡이로 쏟아져 있던 자료들이 다시 꽃봉오리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아니 ‘책봉오리’라고 표현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자네도 알다시피 서류상의 부부에게 그런 결과를 기대하기는 힘들다네· 따라서 나는 한 가지를 더 묻는 수밖에 없겠어·”
“듣지 않아도 알 것 같군·”
“그래 플란· 뻔한 질문일세· 자네는 내 딸아이를 진정 아내라고 여기며 살아갈 수 있겠나?”
역시 예상했던 질문 그대로였다·
어떠한 억양도 없이 아이작은 말을 이어간다·
“자네가 언젠가 사랑이라 불리는 마법을 익힐 수 있냐고 묻는 것일세·”
사랑·
고작 두 글자에 순간 관자놀이가 아팠다· 동시에 심장이 욱신거린다·
─카플란!
귀에 웬 목소리가 들렸다· 다시는 들을 수 없을 오로지 기억 속에 잠들어있는 목소리·
“····”
나는 사랑을 모른다·
아니 사랑을 알아서도 안 된다·
“불가하다·”
“그런가· 역시 그렇구만·”
아이작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 역시 그리 대답할 줄 알았다네· 그럼 혼인은 짧은 시간 동안 위장으로 하세· 또한 나는 한 가지 조건을 추가로 붙일 것이야·”
“무엇이지·”
그가 턱으로 자신의 뒤편을 가리킨다· 가히 마력서들의 숲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그 광경을·
“한 권도 빠짐없이 이 정원의 마력서들을 정리해주게·”
“이 세계에서도 이걸 마력서라 부르는가·”
“이 세계···· 자네 이 세계라는 말을 참 좋아하는구만· 과연 이 순간에도 호기심이 커져·”
아이작의 안면 근육이 정말 미세하게 움직였다· 아마 웃음인 듯했다·
“아무튼 다시 본론일세· 많은 이들이 내가 정원을 조성해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아·”
“그저 정리하지 못했을 뿐인가·”
“그렇다네· 마력서는 주기적으로 내용이 바뀌기는 데다가 여러 언어가 뒤섞여있어· 결국 해독에 실패한 것들이 여기 모여있을 뿐이지·”
나는 마력서 중 하나를 먼저 살폈다· 정원을 정리하는 데에 소요할 기간을 가늠하기 위해서였다·
“역시 까다롭군·”
마력서는 기본적으로 ‘읽는 이’를 위한 활자가 아니다· 술식은 온통 뒤틀려있는 것은 기본이거니와 한 글자 한 글자가 각기 다른 언어로 적혀있는 일도 흔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것들을 두고 흥미롭다고 칭한다·
‘녀석들을 훈련하기에도 좋겠어·’
이는 베키 루이스 그리고 트릭시에게도 아주 훌륭한 경험치가 되어줄 터·
“한 달·”
또한 기간 역시 한 달이면 충분할 듯했다·
“···한 달?”
아이작의 얼굴 근육이 눈에 띄게 움직였다· 줄곧 무표정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이는 아주 큰 변화였다·
“최소 연 단위를 예상했는데 한 달로 되겠나?”
“더 짧다면 짧을 거다· 길지는 않겠어·”
“놀랍구만· 자네의 행적을 보고 기대를 품은 건 사실이지만 이 정도를 말할 줄은 몰랐어·”
나는 조용히 차를 한 모금했다· 사실 칭찬보다는 이 차의 고급스러운 맛이 더 마음에 들었기에·
“티가 날지 모르겠지만 나는 많이 놀란 것이라네· 특히 자네가 최근에 발표한 입체 논문이 굉장히 혁신적이었지·”
“본론 외의 이야기는 됐다·”
나는 그저 떠오른 의문점을 묻고 싶었다·
“아이작· 마력서를 해독과 위장 혼인 사이에는 어떠한 연관성도 없는 것 같다만·”
“크게 있네·”
허공에서 우리의 시선이 마주친다·
“하지만 아직은 묻지 말아주게나· 플란·”
잠시 정적이 내려앉은 프리츠의 정원·
어느 때보다도 진중한 남색 빛 눈동자가 나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그곳에 담겨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은 모른다·
하지만 몰라도 상관없다·
“그래·”
미련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탑을 지을 수만 있다면 별 상관도 없으니·”
◈
그로부터 일주일·
유디트의 저택 검술 훈련장·
“윽!”
스칼렛은 검을 휘두르던 손을 강제로 멈춘 다음 팔을 붙잡았다· 습관적으로 사용하려 했던 고유 능력 ‘잔불’· 이것을 사용하지 않기 위함이다·
“···의존해서는 안 돼·”
그녀가 요새 추구하는 것은 순수한 검술·
그간 자기 삶은 ‘잔불’이라는 명칭의 고유 능력으로 설명되었으나 지금부터는 고유한 삶을 자신의 검로에 담아볼 셈이었다·
이러한 노력 또한 반성이라면 반성이고 속죄라면 속죄일 터·
“아가씨·”
그때 하녀장 카타리나가 수건을 들고서 등장했다· 스칼렛은 다른 한 손으로 그것을 받아 땀범벅이 된 몸을 차근차근 닦아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나서 스칼렛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플란이 현재 프리츠의 영지에 있다고?”
“네· 확실할 거예요· 불과 2시간 전에 정보를 갱신해서 받았는데도 변함없었으니까요·”
카타리나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어 대답했다· 애초에 그녀는 스칼렛에게 거짓을 고하지도 않을 터였다·
“아가씨· 요즘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에요?”
“아니야·”
“아니긴요 식사와 수면 시간을 제외하면 검만 휘두르시잖아요· 제가 다 걱정되어서 그래요·”
스칼렛은 묵묵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자신이 엿보았던 과거가 여전히 생생하다·
플란이 감내해야 했던 것과 이겨내야만 했던 고생을 생각한다면 현재 자신을 갈고닦는 노력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때 다른 하녀 몇몇이 다가왔다· 진지한 표정으로 카타리나에게 무언가를 속삭인다·
“플란 도련님이 왜···· 어?”
그 이름을 들은 순간·
플란 사내의 이름을 들은 순간· 스칼렛은 형언할 수 없이 오묘한 감각을 느꼈다·
“무슨 일이지·”
스칼렛이 침묵을 깨고서 물었다· 카타리나는 목울대를 꿀렁이며 이쪽을 바라본다·
여기사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플란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서 주저할 것 없다· 하물며 녀석을 차별하지도 말고·”
“아 예· 아가씨····”
하지만 카타리나의 반응이 영 시원찮았다· 그러니까 하녀장에게는 또 다른 문제가 있는 듯했다·
“굳이 뜸 들일 것 없을 텐데·”
“····”
카타리나의 침묵 앞에서 스칼렛은 생각했다· 왜인지 다음 말을 듣기가 꺼려진다고·
불길함에 가까운 그 예감은 전류가 되어 그녀의 몸을 구석구석 훑었다· 기사의 직감이란 것이었고 그 이전에 자신의 직감이기도 했다·
결국 스칼렛은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조급함이 분노의 형태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냥 말을 하란 말이다·”
“그게 도련님께서····”
카타리나가 말끝을 늘리는 매초 스칼렛의 심장은 조이는 듯했다·
“플란이 왜·”
“프리츠 가문에는 여식이 있지 않습니까·”
“프리츠 가문의 여식···· 푸른 화염?”
“네· 트릭시 맞아요·”
스칼렛도 이름과 얼굴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애초에 검마태제 경기에서 플란과 함께 대표로 나온 여학생이었으니까·
“트릭시가 왜·”
“···얘야 그거 줘봐·”
카타리나가 옆에 있는 하녀로부터 무언가를 전달받았다· 스칼렛은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종이를 거의 낚아채다시피 했다·
“····”
그리고 종이를 본 스칼렛의 표정이 멍해졌다·
충격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거대했다· 머릿속이 아예 통째로 새하얘질 만큼·
한참 후 스칼렛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플란이···· 혼인···?”
손아귀에 힘이 풀려 검과 수건은 바닥에 떨어지고 그녀는 바람을 맞은 허수아비처럼 휘청였다·
“이게 무슨 소리냐·”
스칼렛이 카타리나의 얼굴을 직시했다·
“플란이 플란이···· 왜 혼인하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펄럭─
손에서 벗어난 종이가 허공을 날았다· 그러나 여기에 있는 이들 중 누구도 그것 따위에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왜···?”
자신도 모르게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래 지금은 검을 휘두를때가 아니다· 당장 자세한 사실관계를 확인 해야만····
아니 아니다·
어디론가 향하려던 발걸음이 멈칫했다·
어떠한 과거가 있었다고 한들 현재의 자신은 플란의 누나· 플란은 자신의 동생·
나는 플란의 누나 플란은 나의 동생 나는 플란의 누나 플란은 나의 동생·
나는 플란의····
플란의····
“····”
가슴이 욱신거렸다·
심장이 퍼즐처럼 조각나는 듯 아릿한 감각·
이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히 헤아릴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어쩌면 여전히·
···그렇게 멍하니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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