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6
“····”
방금 내가 살핀 것은 굉장히 거대한 꽃봉오리로 내용에는 고대 룬어가 혼재해있었다·
고대 룬어가 있다는 사실에 내가 그토록 놀란 것은 아니다· 다만····
“플란 루이스·”
그런데 그때· 여전히 흙바닥에 누워있던 상태인 베키가 나와 루이스를 불렀다·
“영생(永生)이라는 거 정말로 존재하는 걸까?”
“아하하·”
웃음소리의 주인은 루이스· 그가 제 몸집만 한 책봉오리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대답했다·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이라니···· 아무래도 믿기는 힘들지· 베키 갑자기 그건 왜?”
“트릭시 어머니의 묘비문 말이야· 해독에 성공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길래 궁금해져서·”
“뭐···· 아이작님께서도 혹시나 하는 심정에 부탁하신 거겠지· 죽음을 앞두게 되면 살 수 있는 방법을 하나라도 더 찾아보는 게 인간이잖아·”
정리에 착수한 이후 아이작으로부터 직접 듣기로 그가 정원의 정리를 부탁한 이유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였다·
트릭시의 어머니· 미아의 묘비문에는 고대 룬어의 술식이 적혀있다는 모양이고 그 술식은 프리츠의 인물에게 영생을 가져다준다는 소문이다·
묘비문 해석을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정원에 있을 고대 룬어 해독서·
둘째 현재 푸른 화염을 보유한 트릭시가 ‘녹아내린 화염’의 발현에 성공하는 것· 그것이 현재 트릭시가 정원에 없는 이유였다·
“난 정말 모르겠네···· 진짜로 모르겠어····”
베키는 계속 중얼거리며 깍지를 낀 손으로 자기 뒤통수를 받쳤다· 흙바닥은 이미 그녀의 침대인 듯했다·
“영생이라는 게 정말로 존재한다면 트릭시에게 넘겨줄 수도 있는 거잖아· 딸이 아무리 좋아도 일단 본인이 우선이라는 건가?”
“음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자· 트릭시가 아직 가주 역할을 해내기에는 미숙해서 그런 걸 수도 있잖아· 오래 살아야 곁에서 오래 도와주지·”
“그거야 그렇지· 그런데 나는 마음에 걸리는 게 한 두 가지가 아니란 말이지····”
베키가 천천히 모로 돌아누웠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이번에는 나에게로 향한다·
“저기 플란· 너는 어떻게 생각해? 안 이상해?”
“흙바닥에 눕는 게 보통은 아니지·”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
베키가 흠흠 헛기침한 뒤에 말을 잇는다·
“정말로 순수하게 영생이 목표라면 정원의 책을 전부 정리시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돼· 그렇지 않아? 이거 나만 이상하게 생각해?”
“너답지 않은 발언이군·”
“무슨 뜻이야?”
“나름대로 일리가 있었다·”
“···야·”
아이작은 당장 지금 쓰러져 사망해도 이상하지 않은 몸 상태였다· 그가 정녕 영생을 바란다기엔 부탁에 다소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정원에서 해독서만을 빠르게 찾아달라·
정원의 책을 전부 꼼꼼히 정리해달라·
둘 사이에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작은 모든 마력서를 꼼꼼히 정리해달라며 몇 번이고 강조했다·
하지만 의문이 있다고 한들·
“너무 신경 쓸 것 없다·”
나는 책봉오리 하나를 탁 소리가 나게 덮었다·
책봉오리를 덮는 방법은 쉽다· 줄기를 툭 치면 식물은 화들짝 놀라서 피워냈던 책 꽃을 닫아버리니·
“우리의 목표는 마탑 건설이고 너희는 그저 학습과 정리에만 임하면 된다·”
나는 평소와 같이 말했다·
“그저 그뿐이다· 알았나·”
◈
프리츠 가문의 저택· 가주 아이작 폰 프리츠의 방·
화염 가문의 중심부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이곳에서는 아주 냉랭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아빠·”
고작 두 글자를 내뱉은 후 트릭시는 호흡이 가빠져서 숨을 몇번이고 골라야만 했다· 그러나 생각을 아무리 정리해도 자신을 둘러싸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트릭시·”
그때 아이작의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평소 다를 바 없는 무표정을 하고 있었고 머지않아 책상 위로 종이 한 장을 올려둔다· 혼인 신고서였다·
“도장을 찍어라·”
아이작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자신을 좋아해 주는 하녀들이 평소처럼 호들갑을 떨었겠거니 하고 넘기려 하였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상황이 이러하다· 아버지가 자신을 향해 혼인 신고서를 들이밀고 있었다·
플란·
트릭시·
종이에 적혀있는 두 대상의 이름은 이러했다·
“후우·”
트릭시는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며 심신을 가다듬었다· 자신이 지금 처해있는 상황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조금 엉뚱하고 어이없는 현실·
종이를 태워버린 다음 질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트릭시는 이러한 마음들을 기어코 참아내고서 물었다·
“이거 진심이야?”
“그래· 플란과 너를 혼인시켜둘 생각이다·”
“안 해·”
“아니 해야만 한다·”
원래 아이작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억양도 없다·
그러나 트릭시가 목소리에 단호함을 섞을 때마다 그의 음색 역시 배로 단호해지고 있었다·
허공에서 둘의 날카로운 시선 대치는 계속되었다· 아이작도 트릭시도 서로의 눈빛에 담겨있는 것이 오로지 진심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침묵을 먼저 깬 것은 트릭시였다·
“아빠 건강이 나쁜 건 알아· 녹아내린 화염을 발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수도 있어· 하지만·”
다음 말이 쉽사리 내뱉어지지 않아서 트릭시는 침을 꿀꺽 삼킨 다음에야 말을 매듭지었다·
“혼인은 도대체 뭐 하자는 거야·”
“딸아 예전부터 친인척들은 내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너도 그걸 모르지는 않겠지·”
“알아·”
“그래서 혼인시키는 거다· 플란이 네 배우자가 된다면 그들도 당분간은 경거망동하지 못할 터·”
트릭시는 대답할 수 없었다· 아이작의 말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작 그게 이유야?”
플란의 마법 기량이 아주 뛰어나다는 것 정도는 트릭시도 잘 이해하고 있다· 다만 혼인이 무기로써 활용된다면 보통 가문의 힘을 휘두르기 위해서이지 않나·
플란에게는 어떠한 가문도 없다· 바꾸어 말해 정쟁(政爭)의 요소로 활용할만한 것이 없단 말이다·
아니 애초에 그따위 것들은 전부 필요 없었다·
“난 그런 식으로 혼인하는 거· 싫어·”
첫째 자신은 혼인을 결코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
부부가 된다는 것은 무릇 단 한 사람의 상대를 위해서 남은 사람 모두를 단념해야 하는 행위·
둘째 가문의 일에 남의 힘을 빌리고 싶지 않았다·
“내 힘으로 어련히 할게· 프리츠의 일이잖아·”
“네 힘이 너무나도 미약하다· 역량 밖의 일이야·”
“아빠·”
트릭시가 아이작을 다시 한번 불렀다· 소녀는 어느샌가 목소리를 떨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묻겠는데 나는 아빠에게 있어서 뭐야·”
“딸아·”
아이작 역시 억양 없는 말투로 자기 딸을 부른다· 그러나 트릭시는 이미 몸 전체를 떨고 있었다·
“나는 아빠에게 있어서 그냥 수단일 뿐이야?”
아이작은 말없이 자신을 바라볼 뿐이다·
“왜 대답을 못해·”
아무리 재촉해도 그는 어떠한 대답도 돌려주는 법이 없다·
“마탑의 건설을 허가한 건 고작 그런 이유야? 그저 영생하고 싶어질 뿐이고 나를 혼인으로 팔아넘겨서 시간을 벌고 싶을 뿐이냐고· 대답해·”
자신의 목소리를 제외하면 남은 것은 정적뿐·
“안 해· 혼인은 절대로 안 할 거야·”
소녀는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섰다·
아버지를 향해있었던 존경에는 분노가 뒤섞였고 몸 전체로 퍼진 진동은 쉽사리 진정되질 않는다·
쿵─!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둔탁한 소리·
주먹으로 책상이라도 내려친 걸까· 이제는 그런 행동까지도 보인단 말인가· 트릭시는 발걸음을 멈춘 뒤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렇게 화내도 소용없어· 절대로 안 해·”
하지만 동시에 느껴지는 위화감·
5초 정도 지나서였을까 트릭시는 그것의 정체를 알아냈다· 그동안 방에서 느꼈던 인기척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다·
트릭시는 미간을 좁히고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그러나 곧 고개를 갸웃하며 몸을 완전히 돌려야만 했다· 의자에 앉아있었던 아빠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다·
“아빠·”
아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트릭시는 이내 아이작이 어디에 있는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바닥에 나무토막처럼 쓰러져있었다·
“···!”
트릭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곧바로 뛰어가서 아이 지금까지의 상태를 빠르게 살폈다·
“아빠 아빠·”
양손으로 어깨를 흔들며 같은 말만을 반복했다·
“아빠···?”
머릿속이 새하얘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귓가에 대고 아무리 말을 붙여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어깨를 있는 힘껏 흔들어보아도 마찬가지였다·
프리츠 가문의 가주이자 트릭시의 아버지·
아이작 폰 프리츠·
그의 의식이 돌아오질 않는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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