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7
아이작이 쓰러진 지 하루 저택은 혼란스럽다·
“····”
저택의 훈련장 트릭시는 복잡미묘한 생각에 잠겼다·
아이작이 사망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으나 그는 의식을 되찾은 직후 트릭시가 아닌 플란을 먼저 찾았다· 그를 방으로 들여보내 달라고 빠르게 요구했다·
“할 이야기가 많은 모양이지·”
심지어 둘의 대화는 길었다· 플란이 아이작의 방에 들어서고도 벌써 반나절이 지났으니까·
정작 딸인 트릭시가 받은 건 축객령이다·
아이작은 트릭시에게 얼굴조차 보이지 말라는 뜻을 하녀를 통해 전했다· ‘녹아내린 화염’을 완성할 때까지는 상종조차 하지 않겠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나는 수단일 뿐일까·”
아이작의 영생을 위한 수단·
편리한 도구·
말을 잘 듣는 인형·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결국 트릭시가 할 수 있는 건 ‘녹아내린 화염’을 발현하기 위해 훈련하는 것뿐이었다·
묘비문을 늦지 않게 해석해야만 아이작이 죽지 않을 테고 그가 살아있어야만 이유도 물을 수 있을 테니·
묘비문을 해석하기 위해서 필요한 건 두가지·
첫째는 해독본이 담긴 마력서 둘째는 녹아내린 화염·
“하아····”
그러나 곧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은 실패뿐이다· 진척하는 것이 눈에 띄면 희망이라도 있을 텐데 모조리 실패했다·
바로 그때였다·
“아가씨!”
하녀가 다급한 목소리로 훈련장에 들어선다·
“아가씨! 트릭시 아가씨!”
“무슨 일이야·”
“누 누가 찾아왔어요·”
“쫓아내·”
트릭시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가주가 쓰러진 상황이기에 프리츠는 현재 손님을 받지 않는다· 외부로부터 완전히 문을 닫아둔 상태였다·
하지만 하녀가 난감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그게···· 찾아온 분이····”
하녀의 표정을 보고 있노라니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설마·
트릭시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
트릭시는 재빠르게 움직여 현장을 방문했다·
대저택·
바꾸어 말해 이곳은 프리츠 가문의 심장·
프리츠의 이름은 마법사들 사이에서 절대 낮지 않다· 그러한 점을 뻔히 알면서도 당당하게 방문할 수 있는 이들은 얼마 없다·
첫 번째는 황실· 그리고 황실이 아니라면····
“누구야·”
“····”
하녀장은 말없이 트릭시의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 행동이야말로 충분한 답이 된다·
누가 찾아왔을지 마음속으로 예상을 굳힌 순간· 저 멀리 정문 쪽으로부터 어수선함이 끼쳐왔다·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현재 프리츠는 손님을 받지 않아서····”
누군가를 필사적으로 붙잡는 하녀들을 보며 트릭시는 얼굴을 굳혔다· 반응을 보아하니 확실하다· 역시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
‘하필 이런 시기에·’
트릭시는 마음을 굳게 먹으면서 심호흡했다· 이런 상황일수록 누구도 아닌 자신이 잘해야 했다·
“내가 맞이할게·”
“아 아가씨께서요?”
트릭시가 정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예상대로 하녀들이 다섯 명을 필사적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가운데의 여성·
트릭시를 닮은 외모· 하지만 새하얀 머리카락· 새하얀 피부· 새하얀 눈동자·
색을 제외한다면 자신과 모든 것이 흡사하다· 트릭시는 그게 누구인지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다들 물러서·”
“트릭시 아가씨!”
하녀들이 그제야 안도한 얼굴로 비켜났다· 그녀들의 몸으로 쳐져 있던 울타리가 사라지자 새하얀 일행은 트릭시를 향해 슬그머니 다가왔다·
“트릭시 아가씨를 뵙습니다· 뭐 인사는 이 정도로 내뱉으면 되는 건가?”
다섯명 중 가운데의 인물이 대충 목례했고 트릭시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다음 순간 허공에서 둘의 시선이 부딪힌다·
“네· 에이프릴 아가씨·”
자신을 새하얗게 물들인 듯한 여인의 이름은 에이프릴· 관계상으로는 사촌 언니였다·
‘외삼촌의 첫째 딸····’
사실 우스운 일이다· 버젓이 멀쩡하게 돌아가는 가문에 친인척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할 수 있다니·
하지만 가문 명이 ‘프리츠’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오로지 화염의 힘으로 계급과 권력이 정해지는 이 가문에서 백염(白炎)을 다루는 에이프릴은 결코 무시할 수가 없는 존재다·
그런 여자가 이 시기에 대뜸 저택을 찾은 것이다·
‘일부러겠지·’
이게 우연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철저하게 계산된 필연이겠지·
침묵을 먼저 깬 것은 트릭시였다·
“오랜만에 뵙네요· 제가 사전에 전해 들은 이야기가 전혀 없어서 대접이 미흡할까 봐 염려가 커요·”
물론 발언에 담긴 본 뜻은 프리츠의 뜻을 무시하고 뻔뻔히 들어온 것을 질타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정작 에이프릴은 별 반응이 없었다·
“그런 건 걱정하지 마· 마음에 들지 않을 땐 그냥 싸그리 태워버리면 되니까·”
“지금 싸그리 태운다고 말씀하신 건가요·”
“어·”
트릭시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에이프릴은 자꾸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시선의 목적지는 분명 아이작의 침실일 터 트릭시는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우선 응접실에서 말씀 나누시죠· 다과를 준비····”
“가주님 아파서 쓰러지셨다며·”
자기 말을 토막내는 에이프릴의 태도에 트릭시는 감정을 잘 조절해야만 했다·
‘어떻게 알아낸 거지?’
아이작이 쓰러진 지는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벌써 그러한 사실을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에이프릴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이 가문의 동태를 얼마나 주시해왔는지를 동시에 보여주었다·
“대답해봐 트릭시· 아니야?”
에이프릴이 재촉했다·
“가주님께서는 현재 조금 피로하세요·”
“조금 피로한 수준이 아닌 것 같은데· 명색이 딸이면서 아빠한테 관심이 너무 없는 거 아니야?”
트집을 잡거나 비아냥대는 말에도 트릭시는 동요하지 않았다·
흥분하는 순간 말려들게 되겠지· 우선 상대방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해야만 했다·
“슬슬 검증이나 한 번 할까 했는데· 가주님께서 편찮으시다고 하니까 내가 다 속상하네· ”
검증이라는 말에 트릭시의 눈썹이 떨렸다·
“검증?”
“그래·”
에이프릴이 히죽거렸다·
“트릭시 너 마법 학부 재학 중이잖아· 나름대로 천재 소리 들으면서 다녔다며·”
“네·”
“내가 갑자기 걱정이 되더라고· 차기 가주라는 애가 아카데미에 남자나 만나러 쏘다닌 건지 마법을 배우러 다닌 건지 한 번 검증해보고 싶어져서·”
트릭시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프리츠 가문의 검증은 단순하다· 두 술자가 화염으로 결투를 치른 다음 승리한 쪽을 ‘검증이 되었다’라고 표현할 뿐이니까·
다만 검증은 무지 중요하다·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검증된 이가 가주의 자리를 물려받으니·
‘아빠가 건강할 때는 얼굴 한 번 안 비추더니·’
몇 년 전 에이프릴은 아이작을 상대로 패배한 뒤 수련을 하겠다며 대륙 중심의 대수림으로 떠났었다·
···그렇게 들었었는데 지금 딱 맞게 나타난다고?
‘거짓말쟁이·’
이런 시기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렸던 게 틀림없다·
“다음에 해요· 가주님께서는 현재 피로하셔서 검증에 응할 수 없어요· 또한 저는 남자를 만나기 위해 어딘가를 쏘다닌 적도 없고요·”
“우와···· 안 본 사이에 엄청나게 영악해졌네· 트릭시·”
에이프릴이 정색했다·
“나는 가주님이 아니라 널 검증해보겠다는 거야· 너 혼인한다면서·”
트릭시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것까지도 파악했다고?’
언제부터 관찰하고 있었고 또 어디에 자기 눈과 귀를 숨겨놓은 것인가· 못내 당황스러웠다·
“그건····”
“트릭시 긴장했어? 긴장 풀어·”
에이프릴이 웃으면서 트릭시의 어깨를 두드렸다·
“실력을 증명하면 그걸로 끝이잖아· 검증에 성공하면 트릭시 너는 가주가 되고 남편이랑 오순도순 살고· 별로 안 어렵네· 안 그래?”
트릭시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은 아직 에이프릴의 화염을 이길 수 없다·
결국 내뱉을 수 있는 말은 정해져 있었다·
“애초에 거짓이에요· 저는 혼인 안 해요·”
“하하─·”
에이프릴이 웃음을 터뜨렸다·
“트릭시· 너 정말 이럴래?”
“사실만을 말한 거에요·”
“그렇구나·”
제자리에 서서 고개를 두어번 끄덕인 에이프릴이 천천히 다가온다· 트릭시의 어깨에 자기 턱을 얹고서 아주 조용히 속삭인다·
“야·”
서늘한 음색·
“···이 미친년아· 돌았어? 가주가 쓰러져있는 동안 네가 혼인을 핑계로 시간을 벌겠다는 걸 내가 모를 것 같았냐고·”
에이프릴은 사람 좋아 보이게 웃으며 뒤로 두어걸음 물러난다·
“나도 모르게 험한 말을 해버렸나? 사과할게·”
“괜찮아요·”
“그래· 괜찮아야지· 근데 내가 알기로는 지금 이 저택에 마법 학부 대표들도 있을 텐데····”
에이프릴이 혀를 쯧 찼다·
“친구가 이딴 취급을 당하는데도 나오질 않네· 하나같이 겁쟁이들 뿐인가 봐?”
“에이프릴 씨·”
“아냐· 이해해· 또 칭찬해· 원래 겁쟁이가 오래 살아남는 법이거든· 그런데·”
에이프릴이 저택의 벽면에 손을 얹었다·
“···내가 겁쟁이들을 좀 싫어할 뿐이지·”
벽면에 얹어진 손이 하얗게 빛나고 동시에 저택 전체가 급속도로 고온에 달아올랐다·
아예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정도였다·
“···!”
트릭시가 그 손을 강제로 떼어내려 하자 에이프릴이 한 박자 더 빠르게 자기 손을 스스로 거두었다·
“트릭시 그냥 장난이야 장난· 안부 인사 정도?”
“···다시는 그러지 마세요·”
“다시 그러면 어떡할 건데· 그나저나 최소한의 자존심도 없나? 이런 상황에서도 끝까지 안 나와?”
바로 그때·
뚜벅─
귀를 꿰뚫는 것처럼 선명한 구두 소리·
뚜벅─ 뚜벅─
일정한 박자를 지키는 그 걸음걸이가 공간의 무게추를 확 기울게 만드는 듯했다·
뚜벅─ 뚜벅─
고급스러움을 담아 코끝에서 아른거리는 향· 저 멀리에서 장신의 사내가 이곳을 향해 걷고 있었다·
그의 주변만이 다른 세계인 듯했다· 그 아우라는 주변으로 번져나가 이전의 분위기를 절삭했다·
프리츠 저택의 고급스러운 샹들리에·
그 빛을 받아내며 걸어오는 사내의 얼굴에서는 붉은색의 눈동자가 일렁인다· 콧대와 턱선은 종이를 베어낼 것처럼 더없이 날렵하다·
남들의 시선을 당연하다는 듯이 강탈해버린 그 사내는 충분히 ‘귀하다’라고 칭할 만 하다·
그는 트릭시의 옆에 나란히 섰다·
푸른 소녀를 굽어다 보며 자상한 음색을 내뱉는다·
“오래 기다렸나·”
아주 짧은 한마디였지만 곤경에 빠져있는 트릭시를 건져내기에는 너무나도 적절한 발언·
“····”
에이프릴은 할 말을 잃은 채로 사내의 모습을 살폈다· ‘해체’라고 표현해야 할 만큼 남자의 한구석 한 구석을 면밀히 뜯어본다·
이내 에이프릴의 목울대가 꿀렁인다·
그녀는 플란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눈을 아예 깜빡이지도 못하다가·
“····”
에이프릴은 그렇게 어느 순간·
조용히 귀 뒤로 제 옆머리를 쓸어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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