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8
에이프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쉽게 이해되지 않아서 몇번이고 생각을 곱씹었다·
트릭시 곁에 약혼자가 서 있는 풍경을 상상해 본 적은 없었다·
가주 아이작이 쓰러져버린 지금 트릭시의 혼인 이야기는 그저 시간을 벌기 위한 헛소리인 줄 알았다· 하지만 보란 듯이 옆에 서 있는 사내는 뭐란 말인가·
‘그것보다도····’
에이프릴이 현재 불쾌감을 느끼는 이유는 단순히 예측이 빗나갔기 때문이 아니다·
약혼자의 모습·
척 보기에도 탄성과 부러움을 자아낼만한 남성이 트릭시의 옆에 서 있다는 것은 꽤 싫은 감각이었다·
“누구시죠?”
에이프릴은 최대한 차분함을 섞어서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돌아오는 반응은 무척이나 냉담했다·
“너야말로 뭐지·”
“····”
에이프릴이 무엇을 물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다는 듯한 반응· 담담한 얼굴· 오만하다고 표현해도 얼추 들어맞을 듯한 태도·
‘허세인가?’
저택에 줄곧 있었던 것이라면 건물을 순식간에 고온으로 달군 에이프릴의 화염을 분명 느꼈을 것이다· 그럼 이러한 태도를 보일 수가 없는데·
아니·
일개 범인이라면 결코 가질 수 없는 태도 그의 날카로운 시선은 당장 무언가라도 베어버릴 듯하다·
오만함이라는 것은 근거를 갖추는 순간 품격으로 변모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어쩌면 에이프릴은 그에게서 품격을 느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에이프릴이 혼란에 빠져있던 그때· 트릭시가 사내를 향해 입술을 떼었다·
“너· 들어가 있어·”
“난방이 영 별로길래 그 말을 하러 나왔을 뿐이다·”
“알았으니까· 플란 이건 내가 해결할 문제야·”
난방이 영 별로라는 표현으로 자신의 화염을 얕잡아보는 것은 그냥 웃어넘길 수 있었다· 본때를 보고 난 뒤에는 그런 말이 나오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신경 쓰이는 것은 사내의 이름이었다·
“플란?”
에이프릴도 이번에는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플란· 플란이면···· 마법 학부의 대표?”
최근 마법 학계에는 태풍이 불어닥쳤다·
검마태제에서 연이어 승리하며 어린 마법사들의 선망과 기대를 받기 시작한 인물· 최근에는 황실에 방문했고 아예 마탑을 짓겠다며 공표한 사내·
응원하는 이들이 생겨나는 만큼 불만을 가진 이들도 생겨났지만 사람들의 관심을 완전히 강탈해버렸다는 것에선 이견이 없을 이·
“플란이라고···?”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한 이름이었지만 활자로만 접했던 것과 실제로 보는 것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존재했다·
이토록 혹독하고 날이 벼려진 사내일 줄은 몰랐다·
···바꾸어 말해 이토록 탐나는 사내일 줄은 몰랐다·
“네가 정말로 플란이야?”
상대방이 고작 1학년이라면 말려드는 것은 좋지 않다· 에이프릴은 일부러 반말로 물었다·
“건방지군·”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에 그녀는 미간을 좁혔다·
“···건방지다고 말한 거야? 나한테?”
“네가 누구인지도 내가 일일이 알아봐야겠나· 자신을 먼저 소개해라·”
“····”
그런데 오묘하게도 에이프릴의 마음속에서 솟아오르는 감정은 분노가 아니었다·
이런 남자를 내 곁에 세워둔다면 어떠할까· 나를 위해서 남에게 독설을 퍼붓게 만든다면 어떠할까····
오히려 흥미가 돋는다· 욕심이 생긴다·
“친인척· 에이프릴이라고 하는데·”
“친인척이라·”
플란이 혀를 쯧 찼다·
“친인척이라는 것들이 배려심은 바닥에 집어 던졌나· 프리츠는 현재 손님을 받지 않는 상태인데·”
“여긴 프리츠야·”
에이프릴의 목소리는 도리어 너그러워졌다·
프리츠 저택에는 단순히 가주 자리를 찾아 방문한 것이었으나 또 다른 탐나는 것을 발견했다는 생각에 반가움까지 느끼는 에이프릴이었다·
“프리츠에서는 프리츠의 규율을 따라야지· 가주님의 몸 상태가 아주 좋지 않은 지금 트릭시를 빠르게 검증해야만 남은 이들도 안심할 수 있지 않겠어?”
옆에서 듣던 트릭시가 미간을 좁혔다·
하나하나 따져 묻고 싶었지만 그런다 한들 의미는 없으리라· 에이프릴은 검증을 위해서 어떤 구실도 어떤 명분도 마구잡이로 만들어 낼 테니까·
즉 이미 검증은 피할 수 없었다·
에이프릴이 트릭시에게 증표 하나를 건넨다· 프리츠의 문양 재스민이 새겨진 금속 장식품이었다·
“검증은 이틀 뒤야 트릭시· 오늘은 그만 물러갈게·”
“사흘 뒤로 하지·”
말을 툭 자르고 들어오는 음색의 주인은 플란·
트릭시가 놀라하며 플란을 살짝 뒤로 불러냈다· 그리고 에이프릴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로 작게 속삭인다·
“너· 무슨 생각으로 이래·”
“이틀은 부족하다· 하지만 삼일이면 충분해·”
“충분하다고···? 아니 애초에 남편 연기는 뭐고·”
“가주와의 거래일 뿐이다·”
플란은 그렇게만 대답할 뿐이었다·
에이프릴이 그런 두 명을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플란이 다시 앞으로 나섰다·
“둘이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해? 부부라 이거야?”
“네가 알 바 아니다·”
“자꾸 대답을 건방지게 하는데···· 뭐 좋아·”
에이프릴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증을 하루 미루는 대신 나도 조건을 붙일게· 총 두 가지인데 어떻게 생각해 플란?”
“우선 들어보지·”
그러자 에이프릴이 검지손가락을 펼친다·
“첫째 트릭시가 검증에 실패하면 대표 자리에 나를 넣어줘·”
그리고 연이어 중지를 펼친다·
“둘째 너희가 부부라는 걸 이 자리에서 증명해·”
“증명?”
“그래· 이게 연극인지 아닌지는 나도 알아야지·”
에이프릴이 스스로 팔짱을 끼고서 히죽거린다·
“입맞춤을 해봐· 내가 보는 앞에서·”
정적이 내려앉았다· 모두가 동작을 멈춘다·
에이프릴의 두 번째 조건은 그만큼 터무니없었다· 트릭시가 곧바로 표정을 구기며 되물었다·
“본인이 얼마나 어이없는 요구를 하고 있는지 알아?”
“어이가 없긴 왜 없어· 가문도 없는 남자한테 시집을 간다니 이상하잖아· 이거 다 연극 아니····”
에이프릴의 말이 채 끝맺어지기도 전에·
억센 힘이 트릭시의 허리를 붙들었다· 다음 순간에는 턱을 붙잡힌다· 동시에 코 끝으로 훅 끼쳐오는 고급스러운 향·
“···?”
순간 눈을 부릅뜬 트릭시는 움찔 몸을 떨면서 상황을 이해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아무 소리도 없이· 그저 꽃이 낙화하듯·
무언가가 트릭시의 입술 위로 얹어졌다·
트릭시는 한 박자 늦게 몸을 떨었다·
“─!”
···생애 첫 키스였다·
◈
이틀 후·
세간은 매우 시끄럽다· 오로라가 신규 마탑의 건설을 승인했으며 또 전폭적으로 지원한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물론 각자의 반응은 천차만별이다·
응원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편에서는 그것을 불편해하고 꺼리는 이들도 존재했다·
그리고 현재 황궁 내부의 자유 토론장·
“마탑을 새로 짓는다고? 정신이 나간 거 아니야?”
“그동안 기사들이 해낸 게 얼마인데 마법사들은 겨우 이 조그만 성과가지고 지원까지 받는 겁니까····”
현재 이곳에서는 현재 ‘불편하고 꺼려하는’ 귀족 가문의 기사들이 모여 열띤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간의 권력구조가 굳어지게 된 원인은 단순했다·
마법사들이 모여 문명의 기틀을 잡으면 기사들은 강력한 무위를 활용하여 세상을 보호해왔다·
혈귀 마인 정체불명의 무언가···· 대륙에는 인류의 역사를 위협할 만한 존재가 넘치기에 자연스레 기사들이 권력의 윗부분을 점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걘 도대체 뭐 하는 놈이야? 플란 그놈 말이야·”
“플란 그 자식만 없었어도····”
최근 권력 구조의 기반이 뿌리째로 흔들리고 있었으니 원인은 단 한 명의 마법사· 플란이었다·
고유능력을 뛰어넘은 듯 보이는 마법의 활용 그리고 혈귀와 같은 외부 세력을 자신의 힘으로 처리하는 면모·
마법사가 더 이상 기사에게 의존하고 굽힐 필요가 없다는 가능성과 희망을 플란이 마법사들의 마음 언저리에 심어버리고야 만 것이다·
“다음 검마태제가 언제지? 속행해야 돼·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밟아놓아야 후환이 없지·”
“그렇게 급하게 나설 일이 아니라니까·”
유례가 없던 일이었기에 기사들의 반응은 갈렸다·
이들은 자기 생각에 따라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뉘게 되었고 이후 황궁의 자유 토론장이 불타오르는 것 또한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럼 이렇게 보고만 있자는 말인가! 화재도 초기에 진압해야 피해가 적은 법!”
“보고만 있자는 말이 아닙니다· 질타받지 않을 명분이 필요하다는 말 아닙니까! 명분이!”
건설적인 토론이 오가야 할 이곳에서는 현재 초조함과 분노만이 점철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다들 그만두게·”
클라우드 가문의 가주·
동시에 청운의 단장 생도 키안의 아버지 고유 능력 ‘연기’의 소유자· 콘라드가 감정 하나 섞이지 않은 목소리를 짙게 깔았다·
정적이 내려앉고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한다·
콘라드는 조용히 시가를 만지작거릴 뿐이다· 그의 눈가 밑에는 주름 대신 십자가 모양의 흉터가 있었다·
“하지만! 콘라드님!”
누군가가 용기를 내어 외쳤다·
“그간 기사들이 해 온 것이 훨씬 많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마법 학부가 어마어마한 투자를 받게 생겼습니다! 계속 이렇게 보고만 있으실 겁니까!”
“나는 플란으로 인해 아들을 잃었네·”
그 한마디에 토론장이 숙연해진다·
사실 콘라드의 아들 키안은 마인이 되기를 선택했다가 목숨을 잃었으나 그러한 내막을 아는 기사는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보기에 콘라드는 아들이 죽음을 겪고도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는 기사일 뿐이었고 콘라드 또한 그러한 점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또한 우리들이 이렇게 떠들고 있다는 것을 알면 황녀께서도 실망하시겠지· 그렇지 않은가?”
비로소 차분함을 찾게 된 자유 토론장· 콘라드가 책상 위로 두루마리 하나를 펼쳐놓는다·
황실로부터 내려온 공문· 레헬른 언덕에서 여명 나비의 채집을 두고서 경쟁한다는 내용이었다·
“모두 이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했는가·”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우선 대답하고 보았다· 콘라드는 냉철한 시선을 그에게 던질 뿐이었다·
“그런 것치고는 열띤 토론을 벌이더군·”
“····”
지적당한 기사가 고개를 푹 숙인 뒤에야 콘라드는 말을 이었다·
“우리는 늘 기사답게 행동하면 되네· 보다시피 황궁에서는 참가자를 공개적으로 모집하고 있지·”
“그렇다면····”
“그래· 검마태제의 한 종목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다지 복잡하지도 않아· 능력 좋은 기사들이 출전해서 승리하면 돼· 그저 그뿐인 이야기다·”
딱히 틀린 구석이 없었기에 기사들은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았다· 아니 있더라도 해서는 안 됐다·
상대가 무려 클라우드의 가주 콘라드였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그리 알고····”
“또 뵙겠습니다·”
열띤 토론을 벌이던 기사들이 하나둘 현장을 떠나기 시작했고 콘라드는 그제야 시가를 입에 물고서 불을 붙였다·
마침내 콘라드와 그의 딸만이 남게 되었을 때·
“아빠·”
딸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만약 그곳에서도 기사들이 플란을 꺾어놓지 못하면 어떡하시게요· 최근 벌어지는 일이 일이다 보니 이제는 걱정이 더 커요·”
“네가 무엇을 염려하는지는 나도 잘 안다·”
“네· 그렇게 되면 마법사들이 아주 고소해하겠죠· 슬슬 기사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생겨날 거고요·”
“엘피스·”
사내는 조용히 딸의 이름을 읊조렸다·
“네 아빠·”
“너는 여전히 나를 모르는 게냐·”
콘라드가 싸늘하게 일갈한다· 십자 흉터 위에서 번뜩이는 날카로운 시선을 엘피스는 감히 받아낼 수가 없었다·
엘피스가 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이번 행사는 재학생을 상대로만 공개모집을 한다지· 네 곁에 몇몇 녀석들을 학생처럼 심어주마· 걱정할 것 없다· 전부 제대로 훈련받은 녀석들이니·”
“그럼 저는 무엇을····”
“엘피스· 너는 딱 하나만 기억하거라·”
콘라드가 엘피스의 허리춤에 있는 검을 툭 쳤다·
“네 남동생은 플란때문에 죽었다·”
“····”
“그냥 죽인 것도 아니고 시체에 농락까지 했다· 너는 오로지 그 사실 하나만 기억하면 돼·”
“정말 정말인가요? 키안에게 그렇게 몹쓸 짓을····”
“그래· 내 눈으로 확인했다·”
잠시 정적이 흐른다·
엘피스는 주먹을 꽉 쥔 뒤 마침내 결단을 내린 듯·
“···네· 기억할게요·”
씹어뱉듯 읊조렸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업로드 후 10분간 19금 회차로 되어있었습니다·
···키스는 19인 줄 알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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