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9
메르헨 아카데미 바이올렛의 집무실·
바이올렛은 실로 오랜만에 밤을 새웠다·
고대 룬어를 연구하다가 꼬박 새웠다면 행복했을 것이나 그건 아니다· 오늘 마법 학부에서 나름대로 중대한 행사가 있을 뿐·
플란의 반·
총장 코네트가 약속했던 그 반의 사전 신청이 바로 오늘이다·
트리비아나 신문을 펼치면 플란과 관련된 이야기가 수도 없이 펼쳐지고 그것에 관한 갑론을박은 수십 수백 개가 존재한다·
‘마법 학부에서 플란을 모르는 이가 없다’라는 말은 더 이상 과언이 아니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바이올렛은 밤을 새울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몰릴 것이 뻔하기에 그 대비를 해야헀던 것이다·
“바이올렛 교수님·”
옆에서 바이올렛을 돕던 여학생이 목소리를 냈다·
좌우가 비스듬한 단발머리 어깨에 보란 듯이 채워져 있는 노란색 완장·
그녀는 마법 학부의 3학년 회장· 에밀리였다·
“분위기를 스윽 보니까 정말 어마어마하게 사람이 몰릴 것 같대요·”
“그렇겠죠· 당연한 거야·”
“그래서 긴급회의에 들어갔다잖아요· 정원을 늘릴지 선별 조건을 만들어야 할지· 여러 가지로·”
명단을 작성하던 바이올렛은 문득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법 학부의 학생들이 파도처럼 이동하고 있었다·
“교수님 기분도 오묘하겠어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자였는데 이제는 직장 동료가 된 셈인가?”
“뭐 그렇네요·”
창밖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설렘이 가득한 것 같지만 확실히 바이올렛의 기분은 조금 오묘했다·
시기나 질투 따위의 열등한 감정은 결코 아니다·
재능 없는 제자라고 생각했던 녀석이 실력을 증명하고 자신의 이름을 내건 반을 꾸리고 바이올렛과 고대 룬어를 연구하게 되었다는 일련의 결과들이 그저 신기할 뿐·
“에밀리·”
“네?”
“그거 아시나요· 플란은 F등급으로 아카데미에 입학했다는 거·”
“트리비아에서 그런 내용을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니 잠깐만· 그게 정말이었어요?”
에밀리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물었다·
“이거 말고도 이야기하자면 많죠· 정말 많아·”
그리 중얼거리는 바이올렛의 얼굴은 감상에 젖은 듯했다· 무언가를 하나하나 되짚는 듯한 표정이었으니·
에밀리가 바이올렛에게 상체를 기울이며 물었다·
“바이올렛 교수님· 그럼 저도 신청이나 한번 해볼까요· 들으면 들을수록 관심이 생겨서요·”
“에밀리 플란이랑 만나본 적은 있고요?”
“그럼요·”
에밀리가 고개를 끄덕인다·
“후배님을 마주친 적이 당연히 있죠· 그때 있잖아요· 혈귀들이 무도회장을 습격했을 때·”
둘은 슬슬 아고라 보드를 향해 출발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목적지였고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이 한가득 모여있었다·
“····”
많은 건 예상했는데 이 정도로 많을 줄은 몰랐다·
몇몇 1학년 여학생들이 바이올렛과 에밀리를 발견하고는 수군거린다· 여기까지는 안 들릴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전부 들렸다·
“네가 가서 물어봐·”
“그건 좀· 바이올렛 교수님도 회장도 무서워· 가위바위보 진 사람이 가서 물어보자·”
“뭘 가위바위보까지···· 됐어· 내가 다녀올게·”
결국 여학생 중 한 명이 마지못해 이쪽으로 다가온다·
“안녕하세요· 저기 오늘 플란 볼 수 있어요?”
여학생들이 모여 수군거리고 있다는 점에서 예상하긴 했지만 역시는 역시 역시였다· 플란은 요새 특정 여학생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신청도 신청이지만 이 1학년 여학생들은 플란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기다리는 모양이다·
“담당 교수님이셨죠? 오는지 안 오는지만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멀리서만 슬쩍 보고 가려는데····”
그 애정의 크기는 알만하나 잘못 찾아왔다· 바이올렛이 한숨을 푹 내쉬고서 말했다·
“저도 모르겠네요· 종잡을 수가 없는 학생이라·”
나름대로 차분하게 설명해주는데 여학생들의 시선이 바이올렛에게 향해있질 않다· 어깨 너머의 무언가를 보고 있지 않나·
고개를 슬쩍 돌려보니 기사가 있었다·
여학생들이 곧바로 수군거린다·
“어? 저거····”
“자네트?”
“맞네 자네트· 천축 아니야?”
장미가 사람의 형태로 피어난 듯한 형태의 기사· 자네트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그 등장에 멀리 서 있는 학생들도 수군거리며 이쪽을 바라본다·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자네트였다·
“저기·”
“여긴 무슨 일인가요· 기사 학부생이·”
“나쁜 일로 온 건 아니에요·”
다행히 시비를 걸로 온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주변에서 쏟아지는 날카로운 시선들이 불편하다는 듯 자네트는 혀를 쯧 찼다·
“그····”
“그?”
“그러니까·”
“네·”
자네트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자기 머리를 긁적거렸다· 바이올렛이 미간을 좁혔을 때쯤 여기사가 다시 입을 연다·
“···신청은 어디에서 하나요·”
가만히 듣다가 뜬금없는 말에 움찔했다·
그걸 네가 왜 신청해?
“그냥 신청서만 제출하면 끝이에요·”
그렇게 대답하자마자 자네트가 검을 찔러넣듯 바이올렛의 품속으로 신청서를 구겨 넣었다· 그리고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간다·
곁에 서 있던 에밀리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제가 뭘 보고 뭘 들었는지 모르겠네요·”
“동감이에요·”
그 뒤로는 정말 바쁜 일들이 이어졌다·
플란이 오늘 방문하냐고 묻는 학생들 신청하는 학생들 본인 합격할 것 같냐고 묻는 학생들···· 에밀리와 바이올렛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렸다·
어느덧 해가 저물어가고 집무실로 복귀하려는 순간·
“길 좀 물어도 되겠습니까?”
이번에도 누군가가 둘을 붙잡는다· 돌아보니 금색 머리카락을 지닌 여기사가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이반?”
바이올렛이 먼저 여기사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검마태제 1종목에서 플란과 맞붙었던 인물 기사 학부 1학년 사이에서 초신성이라고 불리는 여기사·
아이반 로즈였다·
“예· 아이반입니다·”
아이반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잇는다· 바이올렛과 에밀리의 고개가 저절로 기울어졌다·
에밀리가 물었다·
“기사 학부 후배님 여기는 무슨 일이야?”
“아 신청하러 왔소·”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아까 천축의 자네트가 방문한 것도 그렇고 오늘따라 의외의 일을 빈번하게 겪는 느낌이다·
눈만 깜빡이던 에밀리는 문득 궁금해졌다·
경황이 없어 자네트에게는 미처 물을 수 없었던 질문을 이 순박한 미소의 기사에게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왜 신청하는 거야?”
“아· 이유 말이오?”
아이반이 방긋 웃었다·
“별거 없소· 내가 플란 공을 좋아할 뿐·”
◈
하루가 꼬박 지나 프리츠 가문의 저택·
마침내 검증의 날이 다가왔다·
친인척 에이프릴이 내놓은 3일· 끝이 없을 것 같았던 마력서 정리도 슬슬 결말을 맞이했다· 바꾸어 말해 묘비문을 해석할 준비가 되었다·
프리츠 정원의 마력서는 전부 정리되었고 루이스와 베키는 그것을 아예 학습하기에 이르렀다· 트릭시 역시 ‘녹아내린 화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냈다·
묘비 문을 해석하기 위한 두 가지 조건·
첫째 정원에서 해독서를 찾아낼 것·
둘째 녹아내린 화염을 발현할 것·
이 두 가지 요건이 모조리 갖추어지게 된 것이다·
“힘들어 죽겠네· 이걸로 된 거지?”
베키가 기지개를 켜면서 중얼거렸다·
3일 사이에 베키도 생각하는 폭이 꽤 넓어졌다· 너무나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무려 일백권에 달하는 마력서를 동시에 학습까지 했으니·
“···그래·”
트릭시는 낮게 대답했다· 와중에도 플란을 향해서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시선조차 주지 않는다·
첫 키스·
무려 첫 키스였다·
쑥스러워서 볼 수가 없었다·
“트릭시· 어서 해봐!”
베키가 소리쳤고 트릭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트릭시가 숨을 들이마시고서 묘비문에 손을 얹는다·
그 어느때보다도 마나를 정교하게 운영하기 위해서 집중한다· 머릿속에 마법의 밑바탕을 그려낸 다음 올바른 계열을 선택하여 회로를 엮는다·
수(水) 화(火)·
녹아내린 화염이 요구하는 원소는 무려 두 가지·
그러나 지금의 자신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가문의 이름값이 그녀를 짓누르고 병상에 누워있는 아버지가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검증의 존재가 목을 양 손으로 쥐고 옥죄어도····
그 무게조차 오히려 원동력으로 치환할 수 있기에 트릭시는 있는 힘을 다해서 집중했다·
쿠구구구구─
트릭시의 어머니· 미아 폰 프리츠의 묘비가 푸르게 달아오른다· 주변과 공명하며 웅장한 소리를 내뱉고 오묘한 기류까지도 흐르기 시작했다·
“읏···!”
묘비가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부서지더니 푸른 영혼 같은 것을 내뱉는다· 한동안 주변을 헤매던 그것이 이내 트릭시의 몸속으로 완전히 흡수되었다·
플란이 곁에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완벽했다·
묘비문의 해독 트릭시가 녹아내린 화염을 발현한 것· 군더더기나 실수라고 칭할만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모두의 고개가 기울어진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른 무언가가 없었으니까·
침묵을 깬 것은 베키였다·
“이게 끝이야? 가주님은 영생하게 된 거고?”
“그러게· 뭔가 대단한 게 있을 줄 알았는데·”
“실패한 거 아니야?”
“아하하 그렇다기엔 플란이 됐다고 말했잖아·”
베키와 루이스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트릭시는 멍하니 자기 손을 쥐었다 폈다 해 보일 뿐이었다·
“··· 달라졌어·”
소녀는 다만 그렇게 중얼거렸다·
확연하게 달라졌다·
신체 내부 마나의 흐름 마법의 밑바탕을 그려낼 수 있는 설계도의 넓이 계산 효율····
마법사라면 으레 신경써야 할 모든 분야의 요소들이 말도 안 되게 상승했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아니 확연하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하다·
···아예 다른 사람이 된 수준이다·
딱─!
트릭시가 손가락을 튕겼다·
검지 손가락 위로 푸른 불꽃이 피어오른다·
평소라면 단순히 불꽃 하나가 발현되었을 테지만 그것은 단순히 피어오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실제 ‘꽃’이라는 표현이 어울릴만큼 흐드러졌다·
“오?”
“우와·”
곁에 있던 루이스와 베키가 저도 모르게 감탄을 토해낼 정도였다· 둘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트릭시의 검지에서 잠시도 눈을 떼질 못했다·
그토록 아름다운 기예이자 위력이었다·
베키의 입이 떠억 벌어졌다·
“와···· 엄청나다· 묘비문 해독해서 이렇게 된 거야?”
“····”
트릭시는 초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베키는 의뭉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그 얼굴 위에도 창백함이 번지기 시작했다·
“잠깐 잠깐만· 이게 끝이야? 가주님의 건강은?”
“이거···· 아니야·”
“으응?”
“관계가 없어· 영생이랑은 전혀 관계가 없다고·”
트릭시가 초조한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눈동자의 진동은 이내 어깨로 번져나갔고 조금 뒤에는 트릭시가 아예 전신을 떨었다·
“뭐?”
“뭐라고?”
베키와 루이스가 동시에 외쳤다· 루이스의 얼굴 위에도 흔치 않은 당혹감이 물들어있었다·
“···이럴 때가 아니야·”
트릭시가 비틀거렸다·
“아빠· 아빠한테 가봐야해·”
뭐라고 할 틈조차 없이 트릭시가 지면을 박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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