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
“한 층 전체가 내 방인가···· 그럭저럭 봐줄만 하군·”
아고라 보드의 출제를 골몰하던 플란은 현재 메르헨 아카데미의 기숙사에 방문한 참이다·
기숙사의 이용이 정식으로 가능해지는 것은 3일 후부터의 일이나 미리 짐을 풀어도 좋다는 안내 방송이 있었기에 들렀다·
한편 그와 복도에서 마주쳐 동행한 베키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야 플란 너는 401호잖아· 그럼 저기 맨 구석 방만 네 방이지·”
“······고작 한 개만 내 방이라고·”
믿을 수 없다는 듯 플란이 중얼거렸다·
“그렇지· 애초에 기숙사 한 층을 통째로 쓰는 학생이 어딨어?”
건네받은 종이를 다시 살펴보니 적혀있는 것은 고작 401호·베키의 말이 옳았다·
플란은 미간을 좁혔다· 한 층을 전체로 사용해도 만족할까말까인데 고작 방 하나로 생활해야한다니·
과연 내부 시설은 어떨지· 후에 꼭 손잡이도 세척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플란은 염동을 이용해 문 손잡이를 돌렸다·
동시에 베키는 옆에서 402호의 문을 손으로 붙잡아 열었다· 허공에서 서로의 시선이 마주친다·
“네가 내 옆방인가·”
“으응· 나 402호야·”
“소란피우지 마라·”
“······갑자기?”
대화는 거기서 끝이다· 플란은 401호 내부를 살폈다·
깔끔하고 넓은 방· 허나 그 뿐이다· 기본에 충실하고 밋밋할뿐인 가구들은 당연히 플란에게 만족스럽지 못했다·
허나 플란에게는 이틀의 여유가 있었다· 오늘 하루 정도는 원하는대로 마나를 소모해도 괜찮겠다는 판단이 섰다·
작은 의자 그저 밋밋한 책상 평범한 나무 테가 둘러져있는 전신 거울 등등을 모조리 바꾼다·
파괴 보조 조작 연성···· 계열을 가리지 않고 플란은 마법을 발동했다·
가구들은 부서지면서 또 붙고 솟아오르지만 동시에 또 깎인다· 분해와 재조립을 반복하며 그의 의지에 따라 모습을 달리했다·
마나의 전량을 소모할 때까지 반복하자 플란이 이전 세계에서 사용했던 가구들의 모습을 얼추 갖추게 되었다·
고풍스러운 테두리를 갖춘 거울 넓어진 책상 좋아하는 문양을 넣은 의자···· 처음과 비교해본다면 경이로운 수준이다·
“어···? 뭐야! 왜 플란 네 방만 이렇게 좋아?!”
분명히 소란을 피우지 말라고 했는데· 베키가 난데없이 플란의 방으로 난입해 외쳤다·
플란은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베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머슥해하며 말을 잇는다·
“나 방 생겨보는게 처음이거든· 남들 방도 똑같이 생겼나 궁금해서 와봤지· 그런데 플란 네 방은 특히 좋네·”
베키는 그녀의 기숙사 방을 떠올렸다·
신나서 이 짐 저 짐 전부 끌어모아서 들여뒀는데 플란의 방과 비교해보니 자신의 방은 온갖 잡동사니를 모아놓은 쓰레기장이나 다름 없었다·
플란에게만 더 좋은 방을 내줄만한 이유가 뭐가 있을까· 베키가 짐작할 수 있는건 역시 하나 뿐이었다·
역시 A등급을 넘어선 규격 외 등급이라는걸까· 베키의 추측이 한층 더 단단해졌다·
“당연하지· 나가라·”
싸늘한 축객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베키의 시선은 플란의 손에 들려있는 트리비아를 향했다·
무수히 많은 기하와 곡선을 그리며 새겨져있는 메모· 보고있자니 마법사로서의 호기심이 절로 동한다·
“그건 뭐야?”
“보면 모르나· 아고라 보드에 낼 문제다·”
그걸 보고 아는게 더 이상할 것 같은데· 베키는 턱밑까지 들어찬 말을 가까스로 삼켰다·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으니까·
“······문제를 낸다고? 굳이? 트릭시를 또 건드려?”
“굳이 누구를 겨냥하는건 아니지· 기량이 되는 자라면 누가 풀어도 상관없다·”
“그럼 또 익명으로 하는거야?”
“그렇지·”
“혹시 이름을 밝히더라도 내 이름은 꼭 빼줘· 난 감당이 안 된다 야····”
이번에는 플란의 시선이 베키쪽으로 향했다·
그녀의 손에는 잡다한 종이가 많이 들려있었는데 노란빛을 품어 유난히 눈에 띄는 종이가 한 장 있었다·
“그건 뭐지·”
“이거? 동아리 신청서· 너도 연구동에 가면 받을 수 있어·”
“동아리라···· 노는 곳인가·”
“노는 곳? 으음 즐겁게 학습하는 곳이라고 해야 정확하겠지?”
한창 중얼거리던 베키의 눈동자가 이내 휘둥그레졌다·
“처음 듣는다는 듯한 그 표정은 뭐야? 메르헨 아카데미 마법학부 하면 다들 머릿속에 동아리부터 떠올리는데!”
“처음 듣는다만·”
“마법은 자유롭게 연구할때 가장 빛나는 학문이잖아·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동아리에 모여서 연구하는거야·”
베키는 동아리 신청서가 플란에게도 잘 보이도록 들이밀었다·
소환 동아리 ‘탄생’ 마법 기자 및 홍보 동아리 ‘위치’ 탐험 동아리 ‘바람개비’····
신청서에 빼곡하게 들어차있는 그 모든 활자가 동아리의 간략한 설명과 이름이었다· 베키는 들뜬채로 말을 이어간다·
“이거 봐봐· 학생 수가 많다보니까 동아리 수도 이렇게나 많아· 새내기는 원래 동아리 활동 못하는데 A등급이면 할 수 있거든·”
베키가 체크 표시를 해 둔 것은 얼음 원소 탐구 동아리 ‘프로즌’· 신나서 재잘거리던 베키가 문득 플란에게 묻는다·
“야 플란· 너는 동아리에 관심 없어? 혹시 얼음 원소에 관심 있으면 너도 나랑 같이····”
“관심 없다만·”
자유롭게 탐구할 때 마법이 가장 빛난다는 점에는 어느정도 동의하는 플란이었다·
허나 동아리는 그에게 다소 유치하게 느껴진다· 차라리 제자 몇을 양성하는 느낌이라면 모를까·
“아 으응· 그래·”
빠르게 돌아오는 답변은 서늘하다·
베키는 괜히 머쓱해져서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이번에는 푸른 색의 종이를 플란에게 보여주었다·
“그러고보니 이건 확인했어? 이번 탐험 과제 어떻게 진행될지 개요 나왔잖아·”
“아직·”
“······너무 태평한거 아니야? 그 무서운 바이올렛 교수님이 담당인데·”
베키가 들고있던 종이를 건네받아 플란은 앞으로 진행될 탐험 과제의 개요를 살폈다·
[ 탐험 과제 개요 일람 ]
▶학생들의 모험심과 위기별 상황 대처 능력을 기르고자 함· 하여 조를 편성하여 지정된 던전을 탐험한 뒤 그 성과를 비교할 것·
▶조 인원 : 각 3명·
▶특이사항 : 오픈 스크롤·
“던전이라····”
플란이 미간을 좁혔다·
이전 세계에도 던전은 존재했다· 각종 마물과 왜곡된 마나의 흐름이 산재하는 이공간·
개요에 적혀있는 던전이 이전 세계의 던전과 같다면· 아니 비슷하다면· 그것만으로도 플란에게는 다소 곤란했다·
[ 위기별 상황 대처 능력을 기르고자 함· ]
개요에 적혀있는 그 내용이 핵심이다· 각종 위기에 신속하게 대처해야하기에 많은 마나를 필수로 요한단 말이다·
그의 표정을 보고서 베키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큰일이지? 원래 탐험 과제는 고학년들이 수행하는거야· 그런데 바이올렛 교수님이 그냥 하겠다고 한거래· 완전 제멋대로라니까!”
플란은 개요를 마저 꼼꼼히 살피다가· 묻는다·
“오픈 스크롤은 뭐지·”
“아 그거· 마법 스크롤 지참해도 좋다는거야· 필기 시험으로 치면 오픈 북 테스트랑 똑같은거지·”
“······스크롤 지참이 가능하다고?”
“응· 우리가 새내기라서 그런 조건을 붙였나봐· 정말로 대처능력만을 평가하겠다는 뜻일걸·”
플란이 잠시 턱을 문지른다·
그리고 이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갑자기 왜 웃고 그래?”
“알 것 없다· 이만 나가보도록·”
애초에 대답을 기대하지도 않았던 베키였다· 플란의 방을 빠져나가려는데 문득 하려던 말이 또 하나 생각났다·
“저기 플란·”
베키는 우물쭈물하며 쉽사리 말을 끝맺지 못했다· 허나 전부터 하고싶었던 말이었기에 용기를 냈다·
“모르는 마법 생기면 물어봐도 될까?”
“시간적인 여유가 된다면 알려주지·”
“고마워·”
빠르게 돌아오는 답변이 이번에도 서늘했다만 다행히 내용은 긍정적이었다· 베키는 서둘러 401호를 빠져나왔다·
본인의 방으로 돌아온 베키는 괜히 방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플란의 방을 보고나니 자신의 방이 너무나도 누추해보였던 것이다·
이미 깨끗한 책상을 또 헝겊으로 문질러 닦다가 문득 생각난 플란의 말을 곱씹었다·
“시간적인 여유가 되면 알려준다고····”
생각해보면 조금 이상한 말이었다·
훗날 베키가 어떤 마법을 묻게될지 아직 베키 본인조차도 모른다·
강의 도중 의문을 품게되어 묻게될 수도 있고 언젠가 아고라 보드에 올라오는 난제를 묻게될 수도 있다·
그런데 그저 본인의 시간에 여유만 있다면 알려줄 수 있다는 듯한 그 태도는 뭔가·
“······진짜 뭐지·”
잠시 생각하다가 책상이나 마저 닦았다·
◈
메르헨 아카데미 식당에서 제공하는 저녁의 식사의 질은 뛰어나다· 적어도 아리아 폰타인이 느끼기로는 그랬다·
A등급을 쟁취했으니 이제 매 끼니가 무료다· 거기에 장학금까지 지급받게 되었으니 폰타인 가문에서도 분명 그녀를 자랑스레 여기리라·
식판 위에 먹음직스러운 샐러드를 한가득 담은 후 그녀는 발걸음을 옮겼다·
“아리아!”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서 환한 금발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가 손을 번쩍 들어올린다· 헤일리 루미안이었다·
귀족 가문의 여식· 등급은 A· 공통점이 많은 둘은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이미 많은 여학생들과 합석해 있는 헤일리였지만 그녀의 건너편 자리가 비어있었다· 아리아가 당연하다는 듯 그곳에 착석한다·
그러고보니 다른 편 구석에는 트릭시가 홀로 앉아 조용히 식사중이었다·
그 모습이 겨울날의 호수처럼 차고 잔잔하다· 워낙 유려한 푸른색의 외모· 트릭시는 신입생 환영때까지만 해도 다른 학생들에게 둘러싸여있었다·
허나 그 울타리는 그녀의 싸늘함을 이겨내지 못해 전부 떨어져나갔다· 그래서 지금은 트릭시의 곁에 그 누구도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아리아를 향해 헤일리가 환하게 미소지었다·
“왔니 아리아? 뭐하다 왔어?”
“기숙사에 짐 풀고 남는 시간에는 트리비아만 계속 봤어· 이틀 뒤에 탐험 조 편성되잖아· 작은 정보라도 없을까해서·”
“아~ 맞아· 조원 잘 만나야한다는 말만 가득하더라· 잘 뽑히길 기도하려구·”
“헤일리 너랑 같은 조 되면 진짜 좋겠다·”
“어머 얘가·”
싫지는 않다는 듯 헤일리가 후후후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아리아· 이번 과제 오픈 스크롤인건 아니?”
“응 봤어· 솔직히 오픈 스크롤 해주나마나야· 아니 스크롤 사용해서 상위 마법을 쓰면 뭐해· 우리가 그거 활용을 해봤자 얼마나 할 수 있겠냐고· 거의 모르는 마법들인데·”
“그러게 말이야· 애초에 탐험 과제는 고학년들이 수행하는건데 왜 우리가 하는건지····”
“헤일리 너는 이렇게 말해놓고 잘할거지? 다 알아·”
“무슨 아니야 아니야·”
헤일리가 살가운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그 뒤로도 둘은 A등급을 받은 학생들이 누구누구인지 누구랑 조가 짜여져야 좋을지 등등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아리아가 입을 열었다·
“······플란 걔랑 같은 조만 안 됐으면 좋겠네·”
그 말에 헤일리가 눈을 반짝인다·
“어머 아리아 너도 플란 싫어하니?”
“걔를 누가 좋아하겠어· 말투도 건방지고 수상하게 재시험쳐서 A등급 받았는데·”
그 말에 헤일리는 눈을 깜빡거렸다·
플란의 말투가 건방지다고? 어릴적부터 늘 주변을 다정하게 대하던 녀석이었는데· 적어도 헤일리가 알기로는 그랬다·
“그건 그래· 부정행위는 없었다고 교수님이 말씀하시긴 했는데 F등급으로 입학한 애가 갑자기 A등급을 받는다는게 영 이상해·”
아리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F등급? F등급이라고? 플란 걔 F등급으로 입학했어?”
“응· 몰랐나보구나·”
“전혀 몰랐어· 그러고보니 걔 헤일리 너한테는 고백도 했었다며· 그건 뭐 어떻게 됐던거야?”
다소 민감한 주제라 주변 여학생들이 슬그머니 헤일리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는데 헤일리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대답했다·
“그냥···· 별로 안 내켜서 거절했어· 만약 연애한다면 마법 잘 쓰는 남자랑 하고싶었거든·”
“그건 다 그렇지· 근데 평민이 자기 주제를 몰라도 한참 모르네· 지금처럼 평민 계집애랑 끼리끼리 놀 것이지· 안 그래?”
아리아의 말에 다른 여학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단 한 명 헤일리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플란이···· 평민?”
“응· 플란 평민 맞잖아·”
헤일리의 말에 아리아가 고개를 끄덕인다· 주변 여학생들과 웃으면서 말을 이어간다·
“평민 주제에 내 눈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대꾸하더라니까· 제정신이 아니야·”
“플란이 왜 평민이니?”
“이름에 성이 없으니까 평민이지· 왜 그래 헤일리?”
순수한 의문을 담아 향해오는 시선· 헤일리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 아 그렇지· 으응· 맞아·”
하지만 머리속 한 구석에서는 의문이 피어올랐다·
플란이 신분을 숨겼을까? 도대체 왜?
유디트의 이름은 드높다· 그 간단한 사실만 밝히면 적어도 플란 앞에서 대놓고 하대하는 학생은 없을 텐데·
“어? 나 알았다!”
그런데 그 때 포크를 움직이던 아리아의 움직임이 우뚝 멈추었다·
“헤일리 플란 걔 아직도 너 좋아하는거 아니야?”
“뭐라구?”
“아니 그렇잖아· 아직도 너 좋아하니까 수상한짓 해가면서 아득바득 A등급 받은거 아니겠어? 어떻게든 마음 돌리려고·”
“에이···· 어 그런가?”
그런데 그때였다· 먼저 식사를 마치고 트리비아를 만지작거리던 다른 여학생이 외쳤다·
“아고라 보드에 문제 올라왔나봐!”
식기를 움직이던 손들이 전부 멎는다· 다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트리비아의 화제 게시판 페이지를 펼쳤다·
여학생의 말은 사실이었다· 최상단에는 아고라 보드에 새로 적혔다는 문제가 옮겨적어진 게시글이 있었다·
“미쳤다 난이도 뭐야·”
“벌써부터 모르겠는데·”
문제를 확인한 학생들로부터 저마다 감탄사가 하나씩은 튀어나왔다· 척 보기에도 새내기인 자신들이 접근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그래도 계열은 알겠다· 원소 다룬거네·”
“딱 봐도 조화인데 이건·”
“환혹 아니야?”
“······우리도 나름 A등급인데 의견이 다 갈리네·”
다들 혀를 내두르고서 트리비아를 덮는다· 식사 도중 이런걸 보니 정말로 체할 것 같은 느낌이다·
“속이 더부룩해졌어·”
“같은 마법사인데 왜 이렇게 다르냐··· 진짜 벽느껴지네·”
그때 아리아가 문제로부터 다른 무언가를 발견해냈다·
“그러고보니까 이거 이번에도 익명인데?”
익명· 그러고보니 그랬다·
여학생들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간다· 그녀들의 시선이 저 구석 테이블에 홀로 앉아있는 트릭시를 향했다·
트릭시의 표정은 좋지 못하다· 그녀는 포크가 펜이라도 되는 것처럼 접시 위에 무언가를 끄적인다·
그러기를 한참·
끄적거리고 또 끄적거리며 몇 번 한숨을 내쉬다가·
콰앙ㅡ!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