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1
“····”
에이프릴이 노골적으로 표정을 구겼다·
여러 합의 마법이 충돌하는 일은 없었다· 난전도 없었다· 트릭시가 마법을 고작 한 번 발현하는 것으로 승부는 판가름났다·
구덩이의 한가운데에는 재뉴어리가 박혀있었다·
‘말이 안 되는데·’
재뉴어리가 에이프릴만큼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나름 대수림에서 함께 백염(白炎)을 학습한 인물· 같은 마법사를 상대로 이토록 쉽게 굴할 실력은 아니었다·
바꾸어말해 트릭시에게 패배할 실력이 아니다·
늘 의기양양했던 재뉴어리가 바닥에 박혀있는 모습이 에이프릴의 눈에는 어색하기만 했다·
‘내 지시가 이상했나?’
그렇게 생각하기엔 애매한 구석은 존재했다· ‘화염 채찍’은 재뉴어리가 특히나 자신있어했던 마법이니·
“····”
에이프릴은 우선 입을 다물었다·
우를 범했다면 한 번에 잘라야한다· 괜히 말을 덧붙인였다간 첫 단추가 아닌 나머지 단추까지도 잘못 꿴 꼴이 되어버릴터·
한편 건너편의 트릭시는 제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이겼어·’
재뉴어리는 구덩이에 처박힌채로 김을 모락모락 피워낼 뿐이었다· 하찮은 꼴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친인척·
과거의 트릭시를 늘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이들· 그러나 그 중 한 명이 보란듯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아빠·”
과거의 이전과 현재의 자신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가주가 남겨둔 푸른 영혼을 전승받음으로써 또 한 번 자신은 한계를 뛰어넘게 되었다·
또한 달라진 것은 신체뿐만이 아니었다·
이토록 정순한 힘을 넘겨주기 위해서 아이작은 얼마나 노력했을까· 어떤 마음가짐이었을까···· 그러한 생각들이 소녀의 마음마저도 뒤바꾸었다·
트릭시는 문득 친인척들을 둘러보았다·
당황에 물든 얼굴들·
아빠가 살아있었어도 과연 검증하려 들었을까?
아니 고개를 숙이고 있었겠지· 그것을 생각하자 또다시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이들을 밟아두는 것이 트릭시가 해야할 일일 터·
“트릭시! 진짜 멋있었어!”
“아하하 트릭시 대단하다· 자랑스럽네·”
등 뒤에서는 베키와 루이스의 응원소리가 들려온다·
엄격한 기준을 강요당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응원을 받는다는 것· 트릭시는 아직 그 감각이 어색했다·
대신 에이프릴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나와· 에이프릴·”
당사자인 에이프릴은 그 말을 듣고도 평정심을 지켜냈지만 좌우에 서있는 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저 건방진 게!”
“고작 한 명 검증했다고 유세를 떨다니!”
그들이 대련장의 중심으로 나서려는 찰나의 순간 에이프릴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그들의 발끝 앞에 하얀 화염이 선의 형태로 그어졌다·
“에이프릴?”
주변에서 의아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당연한 일이었다· 에이프릴은 이중에서 가장 강했고 그로 인해 맨 마지막 순서를 배정받았으니까·
“내가 바로할게·”
“바로? 순서가····”
“의미 없어· 너희는 전부 패배할 테니까·”
에이프릴의 시선이 쓰러져있는 재뉴어리에게 향했고 다른 이들의 눈도 자연스레 그것을 뒤쫓았다·
그제야 한 명이 나서서 그의 몸을 회수했다·
“다들 뒤로 물러나·”
에이프릴이 중얼거렸고 모두가 군말없이 따랐다·
에이프릴은 중심부로 걸어나간 뒤 트릭시를 마주했다· 뒤에 있는 마법 학부 대표들의 모습을 훑었다· 특히 플란 쪽을·
“좀 컸네· 트릭시·”
“····”
트릭시는 말을 내뱉지 않았다· 어느때보다도 날카로운 눈동자로 에이프릴을 응시할 뿐이었다·
“칭찬을 해줘도 대답이 없네·”
“입 닥치라고 했잖아·”
“그래? 뭐 그럴게· 근데·”
에이프릴이 턱으로 뒤편의 재뉴어리를 가리켰다·
“재뉴어리를 저렇게 다뤘다는 건 트릭시 너도 똑같은 꼴이 될 걸 각오한 거지? 그렇지?”
냉랭한 말이었지만 주변은 오히려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에이프릴의 열기에 트릭시도 괜히 마른침을 한 번 삼켰다·
덥다·
화염을 늘 가까이하는 트릭시임에도 불구하고 그 열기가 꽤나 불쾌하다고 느껴질 정도다·
에이프릴은 방금 막 전투를 치렀던 재뉴어리와는 아예 다른 강함을 소유했다· 머리가 아닌 몸이 그리 인식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트릭시·”
목소리의 주인은 플란· 서늘한 음색이 트릭시의 귓전을 두드렸다·
“상대방을 잘 봐라·”
“····”
“그리고 분노에 잡아먹히지 말도록·”
추상적인 말이고 그로 인해 아직은 이해할 수 없는 첫마디· 그러나 두 번째 마디는 반박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후우·”
트릭시는 조용히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골랐다· 그래 감정에 잡아먹혀서는 되려던 것도 안 될 것이다· 그 감정이 분노라면 특히나·
마침내 남색빛 눈동자가 한결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플란의 조언은 짧고 투박했지만 효과가 있었다·
모든 소리가 잦아든다·
서로 가만히 서서 대치하고 있을 뿐이나 어느덧 대련장에는 아지랑이가 한가득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에이프릴이 말없이 트릭시를 바라본다·
트릭시의 얼굴에는 어떠한 잡념도 없었다· 두려움을 떨쳐낸 듯 했고 동시에 엄청난 집중력이 느껴진다·
아니 독기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에이프릴은 순간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미아 폰 프리츠?’
유년기에 본 적이 있는 푸른 화염의 창시자· 화염 원소의 극의에 다다랐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혹독한 겨울을 닮아있었던 여자·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고개를 저었다·
에이프릴은 여전히 자신이 질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이 상황을 굳이 따지자면 궁지에 몰린 생쥐가 감히 고양이를 물어뜯으려는 꼴이 우스울 뿐이다·
우드득·
백염(白炎)의 기운을 서서히 끌어올린다· 화염을 발현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지반이 우그러진다·
우드드드득·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소리 역시 커지기 시작했다· 승부가 곧 시작된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듯 말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트릭시가 딱 한 번 눈을 깜빡인 그 찰나·
에이프릴의 모습이 통째로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를 대체한 화염개들이 지면을 박찼다·
총 여섯 마리· 개의 형상을 띄고 개처럼 움직인 것 부터가 상대방을 속이기 위한 노림수다·
화르르르륵!
그것은 검의 모습으로 또 한 번 변형되더니 이미 트릭시의 미간까지 다다라있었다·
그때쯤 다시 떠진 트릭시의 눈은 깊은 호수였다·
화악─!
푸른 화염이 무려 다섯 개를 상쇄해냈다· 그러나 등 뒤에서 날아오는 것까지도 쳐낼 수는 없었다·
트릭시는 그래서 있는 힘껏 몸을 숙였다·
화륵!
그러나 에이프릴은 공중에 떠있는 화염검을 ‘중첩 발현’시킨다· 궤적이 말도 안 되게 꺾이는 것도 당연하다는 듯 가능해지는 것이다·
또다시 날아드는 여섯 개의 백염검·
“후읍·”
숨을 들이마신 다음 트릭시는 발 밑에 폭발을 일으켰다·
위험 부담을 자신이 끌어안는 무식한 방법이었지만 폭발의 반동으로 튀어오른 몸은 백염검 전부를 피해낼 수 있었다·
카가각─!
그러나 에이프릴의 화염 운용 역시 상상 이상이었다·
화염검이 독수리의 형상으로 뒤바뀌더니 트릭시를 곧바로 스쳤다· 잘린 옷자락의 끝부분이 허공에서 흩날린다·
위로 뛰어올라보니 모든 것이 보였다·
자신의 추락을 바라는 친인척들의 눈빛도 두 손을 꼭 모으고 응원하는 바보같은 베키도·
···그리고 플란 역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대방을 잘 봐라·
동시에 불현듯 떠오르는 그의 한 마디· 트릭시의 눈동자가 저절로 굴러서 백염으로 향했다·
‘저것도 결국 화염의 운용·’
단순히 넋을 놓고 감상하는 것과는 다르다· 막상 집중해서 살피려하니 눈에 새롭게 띄는 것들이 있었다·
화염 조형술·
화염을 정교하게 조형하여 소환수처럼 조절하는 묘리· 그 수가 5개에 달하는 것은 가히 엄청난 완성도라고 할 수 있겠다·
‘소환’계열이라는 착각이 들만큼 완벽한 운용· 그리고 상대에게 반응할 틈을 주지 않는 강화·
“어때? 대수림에서 배워온건데· 엄청나지?”
에이프릴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채로 외친다· 알 수 없는 곳에서 목소리만이 들려온다·
아직도 허공에 떠있는 트릭시를 향해 총 여덟개의 화염이 형상을 매초마다 바꿔가며 달려든다·
‘자유자재로 변형시킨다는 점·’
상황에 따라 상대방을 구워삶을 수 있는 유연함· 그리고 한 번 물리면 놓지 않는 연계·
쐐액─!
새하얗게 타오르는 독수리가 트릭시의 볼을 스친다· 직격했더라면 승부는 바로 끝이었을 것이다·
‘강해·’
늘 남들을 깔보아도 좋을 만큼·
늘 자신의 화염에 자신감을 가져도 될만큼·
늘 트릭시를 경멸해도 될 만큼·
하지만·
‘그렇더라도·’
트릭시는 피가 터질 정도로 입술을 짓씹는다·
머릿속에 그려내는 설계만으로는 부족하다· 허공에서 몸이 뒤집힌 채지만 기어코 인을 맺기 시작했다·
“가주 자리만큼은 내가 허락 안 해·”
그 자리만큼은 결단코 양보하지 않는다·
나를 경멸해도 좋다·
나를 짓밟아도 좋다·
노력과 천재성 전부를 부정해도 좋다·
반쪽짜리에 불과하다 폄하해도 좋다·
다만·
자신은 마법사다· 더 나아가 지금은 아빠의 뜻을 물려받은 한 명의 차기 가주였다·
그래 일단 ‘가주’일 수만 있다면 상관없다· 앞의 수식어로는 어떠한 모욕이 붙어도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화륵─!
이윽고 허공에서 푸른 화염이 파도처럼 발현된다· 날아드는 하얀 독수리들을 전부 덮어버렸다·
그러나 트릭시는 역공에 나서기 전 움찔했다·
푹─!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백염검 하나가 트릭시의 어깻죽지를 꿰뚫은 것이다·
“윽····”
어깨를 관통당한 즉시 어마어마한 고통이 밀려왔으니 엄청난 위력의 일격에 당했다는 것을 몸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스스스─
그리고 다음 순간 트릭시의 어깨에 박힌 백염검이 기이하게 뒤틀리며 형상을 달리했다·
위협적으로 혀를 날름거리는 그것은 독사였다·
“독사 모양 조형하는 거 나도 잘하거든·”
어디선가 들려오는 에이프릴의 목소리에 트릭시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어깨에서 피어나 독사의 모습으로 뒤바뀐 백염이 아가리를 쩌억 벌렸다·
“트릭시 트릭시!”
“안 돼!”
베키와 루이스가 창백해진 얼굴로 외쳤다·
“···!”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트릭시의 눈동자는 더더욱 푸른 빛을 더했다·
집중한 뒤 발을 옮긴다·
달음박질쳐서 보이지 않는 에이프릴을 찾아낸다·
콰득!
그때 온 몸의 털이 곤두설듯한 소리와 함께 독사 형상의 화염이 트릭시의 목을 깨물었다· 트릭시가 곧바로 한 차례 피를 토해냈다·
소녀가 비틀거렸다· 목에는 핏줄이 보랏빛으로 섰다·
“끝났어·”
에이프릴이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
트릭시가 몸을 휙 돌리더니 에이프릴의 목을 손으로 콱 쥐었다·
“윽!”
목을 잡힌 에이프릴이 눈을 부릅떴다·
‘어떻게?’
극한의 고온으로 달아오른 백염· 아지랑이를 활용하여 자신의 모습을 신기루처럼 숨겼다· 고작 푸른 화염따위가 그것을 극복해냈을 리 없는데·
꽈아악─
트릭시는 손아귀에 더더욱 힘을 준다·
허공에서 둘의 시선이 부딪혔다·
하지만 에이프릴의 목을 쥔 트릭시의 입가에는 피가 가득했고 얼굴은 이미 창백하기 그지 없었다·
“하···”
그런데 웬걸 트릭시도 코웃음을 치는 것 아닌가·
“에이프릴·”
쿨럭─!
트릭시가 피를 또 한번 토해내고는 말을 잇는다·
“프리츠의 가훈이 뭔 줄 알아?”
“가훈?”
“그래·”
트릭시가 손아귀에 더더욱 힘을 준다·
농밀하고 푸른 화마가 트릭시의 눈동자 속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이글거리고 있는 채였다·
“불을 지피려면 자신부터 태워라·”
“불을 지피려면 자신부터 태워라·”
둘은 같은 말은 동시에 중얼거렸다·
하지만 표정은 정반대였다· 에이프릴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이었고 트릭시는 오히려 미묘한 미소를 짓고있었다·
“그래· 지금부터는·”
트릭시가 핏물을 토해가며 중얼거렸다·
“···너랑 나랑 죽을 때까지 한 번 타보는거야·”
찰나의 순간·
오묘한 전조를 느낀 에이프릴이 멈칫했다·
쿠구구구─
뭐라고 표현할 수도 없을만큼 거대한 화염이 트릭시의 몸을 둘러싸고 푸른 색채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화륵·
시작은 약소한 불꽃이 옮겨붙은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에이프릴의 얼굴에는 되레 낭패감이 어렸다·
이것이 엄청난 것의 전조라는 걸 본능이 느낀 것이다·
다음 순간·
화아아아악─!
트릭시와 에이프릴의 몸이 동시에 화염으로 휘감겼다· 흰색과 푸른색이 온통 뒤섞이며 한동안 주도권을 잡기 위한 싸움을 벌였다·
그러나 이내 위로 올라서는 것은 푸른 화염이었다·
재스민의 형태로 피어나는 화염·
프리츠 가문의 상징·
‘미아···?’
미아 폰 프리츠·
그녀의 푸른 화염을 견식하는 듯한 느낌이었기에 에이프릴은 순간 저도 모르게 그녀를 떠올렸다·
탁!
어느 순간 불꽃이 자취를 감추었을 때·
두 다리로 지면을 딛고 서있는 것은 한 명 뿐이었다·
트릭시 폰 프리츠·
그녀의 발치에 에이프릴이 쓰러져 있었다·
가주의 자리를 노렸던 그 오만한 친인척은 이젠 누구의 시선으로 보더라도 전투불능 상태가 되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듯 했다·
“하아 하아 하아····”
트릭시가 몇 번이고 숨을 골랐다·
“쿨럭─·”
피를 토해내면서도 그녀에게는 할 말이 있는 듯 했다·
“기억해·”
푸른 화염의 주인이 씹어뱉듯 읊조렸다·
“지금부터는 내가 가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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