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2
정신을 겨우 차린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상황을 파악한 재뉴어리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다래졌다·
승자와 패자가 명확히 갈렸다·
승자는 트릭시 폰 프리츠·
그녀가 백염(白炎)을 다루는 에이프릴을 상대로 승리를 거머쥔 것이다· 즉 가주의 자리에 올라서게 되었다·
“말도 안 돼····”
승부가 명확하게 판가름나긴 했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였다· 에이프릴의 실력은 이름 높았고 화염을 다루는 이들 사이에서 명성이 결코 낮지 않았다·
애초에 에이프릴이 왜 아카데미가 아닌 대수림으로 향했는가· 저택으로 언제 복귀하더라도 검증에서 승리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패배했다· 푸른 화염의 트릭시에게·
“····”
재뉴어리는 문득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쓰러진 에이프릴을 바라보는 친인척들은 전부 충격을 집어먹은 상태였다· 어디를 바라보는지도 모르겠는 눈을 하나같이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만 떠나지 그래·”
그때 서늘한 음색이 귓전을 때렸다· 플란이었다·
“굳이 더 해봐야만 검증이 되겠나·”
“····”
말뜻을 뒤늦게 이해한 재뉴어리가 이를 악물었다·
드는 생각은 많았지만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무엇을 말해도 힘이 실리지 않으리라·
에이프릴은 패배했다·
논란의 여지도 변명의 여지도 없는 결과였다·
눈 앞이 아찔하다· 검증에 실패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하얀 화염의 위상이 얼마나 추락할지를 감히 예상할 수조차 알 수 없었다·
“····”
재뉴어리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시선이 전투불능 상태인 트릭시에게로 향한다·
조금 치사해도 아직 방법은 남아있었다· 이쪽은 머릿수가 많으니 저 상태의 트릭시에게 연달아 도전한다면····
그런데 그때·
“포기해라·”
플란의 목소리가 귓전에 내리꽂혔다·
“···?”
재뉴어리의 시선이 플란에게로 향한다·
칠흑같이 검은 앞머리 사이로 자신을 붉은 눈동자로 응시하는 플란의 모습이 보였다·
“뻔히 보이는 그 생각을 버리란 말이다·”
“···!”
재뉴어리의 얼굴 위로 숨길 수 없는 충격이 번졌다·
‘내 생각을 읽은건가?’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눈빛이 유독 특이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플란의 태도에는 잘 적응되지가 않는다·
재뉴어리는 있는대로 둘러댔다·
“내가 무슨 생각을 했다고····”
“말했을 텐데 뻔하다고·”
“···!”
플란이 한 걸음 다가오자 재뉴어리가 몸을 움찔 떨었다· 너무나도 오만한 태도였지만 문제는 그게 결코 오만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자 자꾸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에이프릴이 내걸었던 조건을 기억하나·”
“뭐?
“이후부터는 나를 상대해야 할 거다· 나를 비롯한 대표들이 참여해도 상관 없다고 내뱉지 않았나·”
플란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간다·
“자신 없다면 검증을 이어가려는 생각은 버려라·”
“····”
재뉴어리는 어떠한 대답도 돌려줄 수 없었다· 그 침묵 자체가 대답이 되었다는 듯 플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시간이 지나서 플란이 뒤돌아섰을 때쯤 용기가 뒤늦게 솟아오른 재뉴어리가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그렇게 여유부리는 것도 지금 뿐이야· 하얀 화염이 어떤 가문들이랑 엮여있는 지 알아? 그걸 알면···!”
“달라질 것은 없다·”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로 돌아오는 대답·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플란의 태도에 재뉴어리는 입이 바싹 말랐다·
“그 가문이 클라우드 가문이어도? 평범한 가문이 아니라 무려 기사 가문 클라우드인데?”
“····”
플란이 그제서야 조용히 뒤돌아섰다·
그리고 눈을 마주한 재뉴어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방금까지의 모습이 상냥하게 느껴질 정도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니 포식자를 마주한 듯 본능적으로 다리가 후들거렸다·
“꺼져라·”
“····”
재뉴어리의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그는 말 없이 플란을 응시하다가 조용히 에이프릴을 들쳐업고선 자리를 피했다· 나머지 친인척들도 눈치를 살피더니 그 뒤를 따른다·
이후 상황은 일사천리로 정리되었다· 팽팽하던 긴장감이 사라지니 하녀들도 본격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이다·
“클라우드 가문이라·”
그리고 플란은 문득 중얼거렸다·
하얀 화염 클라우드 기사 가문·
둘 사이의 연관성을 알아볼 필요성이 생겼다·
◈
이틀 후·
트릭시는 그제야 눈꺼풀을 밀어올릴 수 있었다·
이곳은 어디인가 자신은 현재 살아있는 상태가 맞는가· 정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따위 생각들이었다·
“···으·”
하지만 죽었다기에는 전신의 고통이 너무나도 선명하다· 이 아픔이야말로 스스로가 살아있다는 증거 아닌가·
“아 아가씨!”
불현듯 들려온 목소리에 트릭시는 놀랐다· 하녀들이 방에 빼곡히 들이차서는 하나같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트릭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그러나 이내 떠올랐다·
에이프릴을 비롯한 친인척들이 요구한 검증· 목에 일격을 허용했음에도 자신은 꿋꿋하게 승리를 거머쥐었다·
“나···· 의외로 살아있네·”
트릭시가 겨우겨우 중얼거렸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감각에 아직은 정신이 몽롱하기만 하다·
하녀장이 트릭시의 손을 덥석 쥐고서 말했다·
“그럼요· 약혼자분께서 힘을 써주셨어요·”
“약혼자···?”
“플란님 말이에요! 아가씨 저희가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아세요? 피를 너무 많이 흘리셔서 정말···· 정말로····”
그때를 떠올리기도 싫다는 듯 하녀장의 눈가에는 벌써부터 눈물이 글썽거렸다·
“으음····”
트릭시는 주기적으로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몸이 고열로 달아오르고 있었기에 아직 할 수 있는 행동은 고작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아빠는·”
“가주님께서는····”
하녀장이 시선을 피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것만으로도 대답이 되었다· 역시 이게 현실인 것이다·
“됐어·”
트릭시는 허무하게 내뱉었다· 이제는 어떤 수단을 갈구한다고 해도 두번 다시 아버지와 재회할 수 없으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그런데 그때였다·
벌컥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트릭시의 귓가에 들렸다· 다음엔 하녀들이 줄줄이 인사하는 소리가 이어진다·
“아가씨· 약혼자분께서 오셨어요·”
하녀장이 트릭시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저희는 잠시 자리를 비울게요·”
그 말을 끝으로 굉장히 많은 발소리가 겹쳤다·
자신의 방이 이렇게나 고요했던가· 여전히 천장만을 바라보고 있지만 문득 방이 더 넓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몸은 좀 괜찮나·”
그리고 익숙한 음색이 귓가를 물들였다·
동시에 익숙한 향이 자신의 코 끝에 아른거린다· 트릭시가 그토록 애정하는 가르침씨의 향이었기에 트릭시는 기를 쓰고서 고개를 돌렸다·
“····”
그러나 역시 플란이었다·
그저 플란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가르침씨가 겹쳐 떠오른다· 고열로 달아오르는 몸은 판단력을 현저하게 낮추기도 했고 가르침 씨가 보고싶다는 이유도 있었다·
“괜찮지 않아 보이는군·”
그렇게 중얼거리며 플란이 트릭시의 목에 손가락을 얹었다· 고열로 인해 헐떡이는 트릭시에게 플란은 조용히 자신의 마력을 흘려넣었다·
트릭시는 가까스로 입술을 떼었다·
“또···· 내 몸에 멋대로 손을····”
“입 열지 마라· 오래걸리니까·”
“····”
어차피 더이상 말 할 기운도 없었다· 트릭시는 자신의 몸을 치유하는 플란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인정하기 싫어도 플란과 가르침 씨에게는 공통 분모가 많은 듯 했다· 트리비아의 말투도 지금 생각해보니 플란의 말투와 비슷하지 않은가·
그런 식으로 생각을 펴나가는 사이 몸의 상태는 조금씩 나아졌다· 침묵을 먼저 깬 것은 플란이었다·
“고생했다·”
그저 담담할 뿐인 한마디· 그러나 평소보다는 아주 살짝 따뜻한 것 같은 음색·
“가주가 되었고 마법적인 성장도 이루었군·”
“····”
“원하는 게 있다면 하나 들어주지·”
“아빠가 보고싶어·”
이루어지지 않을 걸 알면서도 내뱉은 소원·
“다른 소원을 말해라· 트릭시·”
자신을 내려다보는 플란의 얼굴· 왜인지 조금 따뜻해진 것 같은 표정·
소녀는 천천히 손을 들어올려 플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럼 하나만 물을게·”
고열로 인해 거의 다 녹아내린 얼굴로 반쯤 감은 눈으로 다 뭉개진 발음으로 트릭시는 힘겹게 말을 잇는다·
“가르침씨는 누구야·”
“가르침씨라·”
플란이 협탁 위에 자신의 트리비아를 올려두었다·
그 다음 손으로 트릭시의 눈꺼풀을 천천히 감겨주었다·
“푹 자고 일어나면 알게 될 거다·”
◈
이후 무려 일주일이 지났다·
루이스와 베키는 수련을 이어가고 트릭시는 여전히 깨어나고 잠들기만을 반복한다·
당연한 수순이다· 고온으로 벼려진 백염에 목을 물렸으니 냉정하게 보자면 살아있는 것이 기적이라 보아야 옳다·
그래도 내일쯤이면 정신을 차리겠지·
“이쪽도 슬슬 막바지인가·”
그리고 현재·
나는 트릭시의 어머니 푸른 화염의 창시자· 미아 폰 프리츠의 묘 앞에서 일주일에 가깝도록 골몰하는 중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모두가 묘비의 해독이 끝났다고 생각하지만 착각이다· 이 잔해에는 아직 단 하나의 술식이 남아있었다·
마력서를 해독하는 과정에서 내게 위화감을 안겨주었던 바로 그것이었고 드디어 해결을 목전에 두게 되었다·
“역시로군·”
이 술식에도 고대 룬어의 묘리가 담겨있다· 미아 역시 고대 룬어의 마법이 한 차원 달랐음을 이해한 마법사였던 듯 하다·
그러나 이 술식을 바라본 나의 감상은·
“···유치하다고 해야할지·”
고작 이러하다·
탁·
고대 룬어가 뒤섞인 마력서를 소리가 나게 덮었다· 그리고 푸른 화염을 전승한 트릭시를 떠올렸다·
아직 내 눈에는 그저 미약한 불꽃에 불과하나 전부 다듬어졌을 때쯤엔 모든 이들이 청염(靑炎)에 감탄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다소 유치하더라도·
“고생한 너에게 선물 정도로는 괜찮겠지·”
작은 상이다· 트릭시·
나는 조용히 묘비의 잔해 위로 손을 얹었다·
트릭시가 깨어나면 보여줄 것이 하나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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