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6
다음날·
프리츠의 영지는 마탑을 건설하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다· 더이상 반대하는 이가 없었기에 박차가 제대로 가해진 것이다·
“좀 어때·”
하인과 함께 돌아다니며 트릭시가 물었다· 아직은 생소하지만 이제는 본인이 가주 역할을 해내야만했다·
“예 아가씨· 부지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했습니다· 플란님께서 하나하나 꼼꼼하게 봐주신 덕분에 금방 착공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렇구나·”
트릭시는 고개를 끄덕인 뒤 일대를 둘러보았다·
우아하고 비옥한 프리츠의 영지· 푸른 화염이 태동한 이곳에 이제 플란의 눈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당연히 이상이 없어야지· 어떤 땅인데·”
“그럼요· 플란님께서도 그래서 더 세심하게 봐주시는 것 같습니다· 최대한 영지가 상하지 않게요·”
의외로 플란은 프리츠를 많이 배려해주었다·
프리츠의 정원을 관광 용도로 사용한다든가 저택을 마탑 내부로 집어넣는다든가····
마탑을 위해 기존의 요소를 싸그리 밀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는 방식· 굳이 일을 번거롭게 하는 데에는 사실 배려를 숨겨두었으리라·
“무슨 생각으로····”
트릭시가 그렇게 중얼거리던 때· 손에 든 종이들을 무심코 만지작거리다보니 트리비아도 만져졌다·
자신의 것이 아닌 플란의 것이었다·
“····”
트릭시는 플란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아니 사실 첫만남은 제대로 기억나지도 않는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처음으로 의식하기 시작했던 시기를 떠올렸다·
아리아와의 결투에서 보여주었던 골렘 조종 그때부터였다· 이후 플란은 매번 놀라운 결과를 트릭시의 눈 앞에 가져다두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트릭시는 전보다는 훨씬 플란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좋든 싫든 첫 입맞춤 상대였고 심지어 트릭시의 눈물까지도 보았으니까·
“음····”
소녀는 검지 끝으로 제 입술을 훑었다·
워낙 놀랐던 탓에 기억이 선명하지는 않지만 그건 굉장히 거칠었고 또 강렬했다· 그리고 가르침씨와 똑같은 향이 났던 것 같다·
트릭시가 플란의 트리비아에 손을 얹은 그때·
“트릭시·”
베키의 목소리에 트릭시가 행동을 정지했다· 마른 침을 한 번 삼킨 뒤 눈을 흘겨서 베키를 바라본다·
“···왜·”
“슬슬 아카데미로 복귀해야지· 너 빼고 다 모였어·”
“가주는 원래 바빠· 그리고 지금 갈 생각이었어·”
트릭시는 최대한 차분하게 대답한 뒤 베키를 지나쳐서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베키는 어깨를 으쓱한 다음 트릭시의 뒤를 쫓는다·
영지의 입구쪽에는 베키의 말마따나 모두가 모여있었다· 플란을 필두로 하여 일행은 걷기 시작했다·
프리츠의 영지 입구쪽은 아주 거대한 복도처럼 설계되어있다· 크게 난 길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로는 높은 벽면이 있으니·
이제는 이곳이 마탑의 입구가 될 것이다·
“가주님! 몸 조심하세요!”
“저희 걱정은 마시구요!”
하녀들이 소리 높여 배웅했다·
반응은 특히나 열렬했다· 트릭시가 검증을 마쳐 가주가 되었고 마탑의 건설 또한 공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음·”
플란은 이러한 것들이 그저 소란에 불과하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는 영지 입구쪽의 벽면에 손을 얹은 뒤 멈추어섰다·
“잠시·”
“음?”
“그러고보니 아직 할 일이 하나 남아있다·”
우두커니 멈추어서서 벽면을 응시하는 모습에 다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베키가 벽을 콩콩 소리가 나게 두드리며 물었다·
“플란· 왜 그래? 뭔가 문제가 있어?”
하지만 플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베키의 옆에 서있던 소녀의 이름을 부를 뿐이었다·
“트릭시·”
“음?”
예상치 못한 부름에 트릭시가 눈을 깜빡였다·
아니 이상한 일이었다· 원래는 예상치 못한 부름이 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가 이런 반응을 보인 적은 없었는데·
몸의 이상 반응을 기묘해하며 트릭시가 물었다·
“왜·”
“트릭시뿐만이 아니다· 너희도 듣도록·”
플란의 시선이 하녀장을 비롯한 하인들에게로 향했다· 당연히 그들의 고개도 모로 기울어졌다·
“영지를 제공한 너희에겐 보상이 있어야겠지·”
“보상?”
많은 이들이 그 단어를 뒤따라 중얼거렸다·
“그래· 트릭시 녹아내린 화염을 발현해라·”
“녹아내린 화염?”
“그래·”
플란에게 이유를 묻고싶었지만 표정이 너무나도 진지해서 트릭시는 일단 잠자코 그렇게 했다·
이내 손바닥위로 푸른 불꽃 하나가 생겨난다· 액체처럼 흐물거리는 기묘한 화염이었다·
“우와·”
“예쁘다····”
하녀들이 일제히 감탄을 터뜨렸다·
푸른 화염을 늘 접하고 살아가는 프리츠· 그렇기에 그들은 더더욱 영롱해진 푸른 불꽃의 가치를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트릭시 대단하네·”
“그러게· 이거 예쁘긴 하다·”
루이스와 베키도 무심코 중얼거렸다· 플란은 그러한 와중 조용히 벽면 위로 손을 얹으며 읊조렸다·
“이곳은 마탑의 입구가 되겠지·”
동시에 그의 주변에서 마나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예리하게 튀던 기운들은 곧 한순간에 부드러운 형태로 갈무리된다·
“트릭시 너는 푸른 화염을 계속 발현하도록·”
그리고 다음 순간·
온 벽면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스스스스─
소리는 온화하지만 벽면에는 거대한 조각칼이 닿은 듯 엄청난 음각(陰刻)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파여나간 석재들은 그 자리에서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
“앞으로 이곳을 방문하는 모든 이들이 프리츠가 마탑 건설에 앞장섰음을 여실히 알게 될 것이다·”
플란의 마법은 「조각」에서 멈추지 않았다·
응용·
플란은 트릭시의 손 끝에서 피어난 ‘녹아내린 화염’을 벽면에 물감처럼 덧입히기 시작했다·
파인 대지에 물이 고이듯 파인 벽면에 푸른 화염이 고이는 광경이란 감탄을 도무지 참을 수가 없는 장관이었다·
재스민·
벽면에 새겨진 것은 수 없이 많은 꽃· 프리츠를 상징하는 가화(家花) 재스민· 고작 음각으로 표현되었던 그것이 푸른 잎사귀를 가지게 된다·
녹아내린 화염으로 한 잎 두 잎·
푸르게 타오르는 재스민이 개화하는 과정을 모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그저 지켜보았다· 밋밋하기 그지없었던 입구의 벽면은 이제 재스민 밭이 되었다·
“와····”
누구랄 것 없이 감탄사를 토했다·
마법을 배우지 않은 하녀들은 아름다움에 전율했고 마법을 배운 이들은 높다란 수준에 몸을 떨었다·
플란이 다시 한 번 읊조렸다·
“가주·”
트릭시에게 향해있는 시선· 그러나 플란은 이번에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응·”
트릭시 폰 프리츠·
이 영지의 가주가 대답하자 플란은 턱으로 벽면의 푸른 재스민들을 가리켰다·
“불어보도록·”
“불라고? 입으로?”
“그래· 가볍게·”
트릭시는 이번에도 그렇게 했다· 벽면에 새겨진 예술품이 워낙 고급스러워서 거절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후·”
케이크 위에 꽂힌 초를 불듯 트릭시가 벽면에 새겨진 푸른 재스민들을 입으로 가볍게 불었다·
화아아아아아─
그러자 푸른 밭이 일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환상을 넘어 이상향에 가까운 풍경을 펼치며 타오르는 꽃잎들은 자신들의 미모를 한껏 흩날린다·
화아아─
산들바람이 푸른 정원을 쓰다듬은 듯한 풍경이 이내 잦아들고· 플란은 다 되었다는 듯 돌아섰다·
“이만 가보도록 하지·”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누구도 반응하지 못하다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언제든지 오세요!”
“예뻐요─!”
처음의 열렬한 반응보다도 더욱 커다란 배웅이 쏟아졌다· 베키와 루이스는 굉장히 흐뭇한 표정으로 플란의 곁으로 따라붙었다·
트릭시가 들으라는 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처음이야·”
“무엇이·”
“하녀들이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 저렇게까지 환호하는 거 살면서 처음으로 본다고·”
“그런가·”
무미건조한 반응에 트릭시는 그러려니했다· 하지만 얼굴에는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맞다·”
트릭시가 플란에게 트리비아를 내밀었다·
“이거 가져가·”
“내용은 살펴보았나·”
“아니· 전혀·”
아직 확인해보지 못했지만 벽면에 새겨진 재스민 밭을 보고나니 확인하려던 생각도 사라졌다·
“하지만 괜찮아·”
트릭시가 엷게 웃었다·
“나 스스로 좀 더 고민해볼래·”
◈
드디어 복귀한 아카데미의 기숙사·
목욕을 마친 나는 의자에 앉아 차를 보고를 받았다· 여전히 열심히 일하는 마이에브로부터였다·
[ 레헬른 언덕 ]
[ 여명 나비의 등장을 맞이하여 나 오로라는···· ]
둘째 황녀 오로라가 주관하는 경쟁이 있기까지 어느덧 이틀의 시간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주인·”
마이에브가 침묵을 깼다· 그녀는 물컵에 짐승의 혈액을 담아서는 나름 고급스러운 척 홀짝이고 있었다·
“이번에도 긴장은 안 하세요?”
“물론이다·”
“대단하네요· 우승을 못하면 황궁에서 지내야하는데· 사실상 끌려가는 거잖아요·”
“우승하면 취할 이득만 생각한다· 나는·”
만일 우승을 거머쥔다면 둘째 황녀 오로라가 직접 내 마탑에 방문하여 마법을 배우게 되니 그로 인해 얻을 부차적인 이익은 굉장히 크다고 할 수 있겠다·
마탑의 입지를 보다 공고히 하고 다양한 마법 학파들의 불만과 분란을 종식시키는 등···· 역시 나는 우승을 거머쥘 생각이다·
“···하긴 주인은 그런 인간이었죠·”
마이에브가 고개를 끄덕이며 혈액을 홀짝였다· 그리고 물컵을 내려놓더니 종이 여러장을 내밀었다·
그게 무엇인지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이건 신청자 명단인가·”
마이에브에게 물었다·
여명 나비 수집까지 고작 이틀이 남은 지금· 나는 아직도 동료를 정하지 않았다·
“귀찮군· 최소 두 명을 데려가야 한다는 건·”
“그래도 슬슬 정하셔야죠· 규칙이 그렇다는데·”
마이에브의 말대로 오로라는 최소 세 명 이상이 한 조로 참여할 것을 당부했다· 바꾸어말해 이제는 나도 두 명을 선별해야만 한다·
“좋다· 우선 명단을 한 번 보지·”
“네· 그러세요·”
나는 고개를 돌려 마이에브를 한 번 바라보았다· 껄렁하게 앉아있었던 마이에브의 자세가 곧바로 펴진다·
“···저 원래 말투가 이렇잖아요· 주의할게요·”
나는 그제서야 명단을 위에서 아래로 훑었다· 그리고 이내 천천히 미간을 좁혔다·
“기사?”
마법사가 아니라 기사임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신청을 넣은 이가 있었다· 우선 기사 학부의 1학년 아이반 로즈가 그러했다·
그러나 현재 가장 신경쓰이는 것은 그게 아니었다·
“이해할 수가 없군·”
나도 모르게 순수한 의문을 담아 중얼거렸다·
[ 스칼렛 유디트 ]
명단에는 분명 그러한 이름이 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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