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7
나는 준비를 마친 후 기숙사 밖으로 나섰다· 이유는 당연히 여명 나비 채집에 함께할 동료들을 선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고보니 여명 나비 채집을 경쟁하는 이 행사에도 드디어 이름이 붙었다· ‘수접제(狩蝶祭)’· 내용에 충실하고도 단순한 이름이었다·
“아 후배님!”
그런데 나서자마자 누군가가 격양된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그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좌우 길이가 비스듬하게 정돈된 갈색의 단발머리· ‘회장’이라고 큼지막하게 적힌 채 어깨에 붙어있는 완장· 어디선가 마주한 적 있는 여학생이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채였다·
“이런 식으로 만나는 건 두 번째네 후배님·”
그녀가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조용히 그녀의 가슴에 붙어있는 명찰을 살폈다·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서였다·
에밀리·
그래 그런 이름이었다· 혈귀가 습격해왔던 당시 나는 이 소녀를 무도회장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다·
“후배님도 레헬른 언덕으로 떠난다며 둘째 황녀님께서 주관하는···· 이름이 뭐였더라? 메모해뒀는데·”
에밀리가 자신의 메모장을 뒤적거렸다· 한 손에는 메모장 다른 손에는 펜· 그녀는 늘상 이런 모습을 하고있는 듯 하다·
“아 그래· 수접제!”
메모해둔 정보를 찾아낸 에밀리가 활짝 웃었다·
“제법 긴장되겠는데? 기사와 마법사간의 구도로 갈 거라는 추측도 있고 아니면 기사와 마법사가 한 조를 이룬다는 소문도 있고· 몰리는 관심이 워낙 크니까·”
“바쁘다· 용건이 뭐지·”
“···선배한테 까칠하긴· 네가 바쁘다는 것도 뻔히 알아· 하지만·”
그녀가 메모장의 한 페이지를 뜯어서 내게 내밀었다·
적혀있는 내용이 내 시간을 차지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기를 바라며 나는 조용히 그것을 받아들었다·
적혀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최근 마법계에 화제를 불러일으킨 플란에게 메르헨 아카데미는 많은 마법사 생도들이 식견을 교환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바· 우선 정원에 제한을 두지 않기로···· (후략)]
내 시선이 가장 아랫줄에 닿은 것을 확인했는지 에밀리가 재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축하해· 인기 많은 거· 덕분에 아카데미에서는 우선 정원을 없앴어· 오리엔테이션을 먼저 해보고 결정하라는 의미야·”
“오리엔테이션이라·”
“사실 대다수의 강의가 오리엔테이션을 포함하고 있으니 이것 자체가 신기한 일은 아니지·”
“나를 찾아온 이유가 따로 있다는 거로군·”
“그래· 맞아· 사실····”
에밀리가 펜의 머리 부분으로 옆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 오리엔테이션이 당장 오후에 있거든· 하필 수접제 직전이야 일정 어때? 가능하겠어?”
내가 침묵하자 그녀는 몇 마디를 덧붙였다·
“알지? 오리엔테이션은 가볍게만 해도 되는 거· 만약 한다면 1분만 해도 전혀 상관없어· 그러니까····”
“에밀리·”
하지만 나는 일정보다도 다른 부분이 신경쓰였다·
“신입학부생· 이게 거슬리는군·”
“신입학부생? 음?”
에밀리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합격은 원래 일찍 통보해주잖아· 그래야 멀리 사는 녀석들이 이사도 오고 이런저런 준비도 하지·”
고개를 저었다· 묻고싶은 건 그게 아니었으니·
“내 오리엔테이션에 참여한다는 건가·”
“그렇지? 네 강의는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니까 사실 신입생들이 제일 중요한 거지· 덕분에 일정이 좀 기형적으로 잡히긴 했지만····”
에밀리가 내 눈앞에서 펜을 흔들어보였다·
“어쨌든 어떻게 할래? 나는 뭐 강요하려고 찾아온 거 아니야· 부담갖지 말고 오리엔테이션 할 건지 말 건지만 대답해주면 돼·”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눈코뜰새 없이 바쁜 것은 사실이지만 무려 내년부터 신입생으로 다니는 녀석들도 참여하는 것이라 하니· 결코 거절할 수가 없는 제안이었다·
“하지·”
“어? 정말? 좋아·”
에밀리가 사선으로 멘 조그만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잡다한 것들을 꺼내놓는다· 강의실 열쇠 출석부···· 오리엔테이션을 위해 필요한 그런 것들 말이다·
“그러나·”
하지만 나는 그것들을 받지 않았다·
“강의실은 필요없다·”
“···?”
잡다한 것들을 건네던 에밀리의 손이 멈칫했다· 나의 시선이 아고라보드로 향했고 회장의 눈도 자연스레 그쪽으로 향한다·
요즈음 마법 학부의 성과 덕분인지 아고라 보드도 대인기다· 빈 구석 없이 문제로 가득 메워져있다는 점만 보아도 그러했다·
나는 그것을 잠시간 말없이 살폈다·
“잠시 메모지와 펜좀 빌리지·”
“응?”
에밀리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펜과 메모지를 내밀었다· 나는 아고라보드에 시선을 둔 채로 술식을 필기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에밀리의 메모장이 술식으로 가득 메워진다·
문제의 양이 아득하여 시간이 꽤 걸리긴 했지만 결코 오답을 찾는 일은 없었다· 정답만을 도출해낸 뒤 나는 메모지를 덮었다·
딱─!
각 문제의 정답을 입력하고 손가락을 튕기자 아고라보드가 새 것처럼 깔끔해졌다·
“···!”
에밀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의 펜이 닳아가는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표정이 완전히 사라졌다·
“저거 저거를 한 번에 다 푼거야?”
“그래·”
“무슨····”
에밀리가 그렇게 묻는 사이 나는 아고라 보드에 새로운 내용을 적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굉장히 고급스럽고 굉장히 어려운 무언가를 추구해했을 것 같으나···· 이번에는 굉장히 평범한 난이도의 문제를 냈다· 소위 정석이라 불릴만큼 평범하고 깔끔한 문제 말이다·
필기를 마친 뒤 에밀리에게 시선을 두었다·
“오리엔테이션은 이 문제로 대체한다· 풀어내는 놈만이 내 강의를 들을 자격이 있다 일러라·”
“····”
에밀리가 세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게 해····”
“그럼 이만·”
나는 표정이 멍해진 에밀리를 뒤로 했다·
◈
대륙에서 가장 고귀하다 인정받은 핏줄이 지내는 공간 황궁· 이 장소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가 된다·
정원은 하루 24시간을 4개로 쪼개어 6시간마다 계절이 바뀌고 황궁의 동서남북은 각 대륙 동서남북의 인상깊은 건축 양식을 그대로 본땄다·
그렇기에 ‘외부로 나가지 않고도 세계를 경험한다·’는 오로라의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닌 것이다·
그토록 찬란한 공간 중 하나인 황녀의 내실에서 둘째 황녀 오로라는 호위기사 반과 대화중이었다·
“황녀님 수접제의 명단에 다소 이상한 부분이 발견되었습니다·”
“이상한 부분이라 말했느냐·”
권좌에 앉은 오로라가 턱을 괸 채로 대답했다·
“그래서는 안 될 터인데· 다른 누구도 아니고 이 몸이 직접 주관하는 것이니·”
“한 번 직접 확인해보시는 편이 좋을 듯 합니다· 올라온 보고들을 이미 정리해두었습니다·”
오로라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반은 이미 몇 차례나 갈무리된 정보들을 조심스레 올렸다·
정보들을 살핀 후 오로라는 웃음을 터뜨렸다·
“확실히 이상하다· 그러나 또한 재미있구나·”
황녀의 시선은 특정 조의 명단에 머물러있었다· 클라우드 가문의 여식 엘피스의 조였다· 반이 짐작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수접제는 참여자를 공개적으로 모집하는 대신 아카데미 재학생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엘피스의 조원들이 다소 특이합니다· 서류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는 학생이지만 실제 재학중인 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전부 누군지 모른다는 반응입니다·”
“그래· 바로 그 점이니라·”
오로라가 즐겁다는듯 웃음을 터뜨렸다·
“반 이건 나를 만만하게 본것이냐·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냐· 네 생각은 어떠하지·”
“그 부분 역시 조사해보았습니다·”
반이 가볍게 고개를 숙인 후 말을 잇는다·
“클라우드 가주의 아들이 토벌제에서 사망했습니다· 아마 플란을 향한 악감정일 것이라 사료됩니다·”
“사망이라 나약한 놈이로구만· 어쨌든 나는 무엇을 해야겠느냐· 네 의견을 한 번 말해보거라·”
반이 차분하게 대답을 시작했다·
“철저하게 조사하라 명해주십시오· 만일 서류를 위조한 것이라면 응당 그에 따른 처벌을····”
“틀렸다·”
오로라는 반의 말을 툭 잘라낸 뒤 건네받은 자료를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훑었다·
“····”
그리고 약 삼분간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얼마 후 결정을 내렸다는 듯 눈을 떴다·
“그냥 놔두어야지· 그게 옳다·”
“예?”
반이 당황스럽다는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만일 서류가 위조된 것이라면 필히 불상사가 생길겁니다· 무려 황녀님께서 직접 주관하신 행사인데····”
“반·”
그러나 오로라는 호위 기사의 이름을 부를 뿐이다·
“예· 황녀님·”
“선두를 자처하는 놈들은 일평생 원망을 떠안는다· 이건 시작에 불과할 터인데 플란이 고작 이 정도로 죽을 놈이라면 차라리 죽는 편이 옳지 않겠느냐·”
“····”
“어려운 말이 아닐진대·”
오로라가 늘어져있던 자세를 폈다· 둘째 황녀는 비로소 권좌에 올바른 자세로 앉게 되었다·
“바꾸어 묻겠다· 이 놈이 만약 우승을 해서 내가 친히 마탑까지 당도했는데 그때가서 화를 입으면 나는 얼마나 우스운 여자가 되겠느냐?”
그녀가 반을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내 권위가 얼마나 처박히겠냔 말이다·”
“이해했습니다· 황녀님·”
반은 하는 수 없이 머리를 숙였다·
오로라는 흥 코웃음을 쳤다· 동시에 꼿꼿하게 펴져있던 오로라의 자세가 다시 거만하게 늘어진다·
“한데 플란 이 놈은 아직도 동료를 선별하지 않은건가?”
“예·수접제 직전쯤에나 정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뭐 그럴 놈이지· 그럴 놈이야·”
반이 종이 몇 장을 추가로 내밀었다·
“플란의 동료를 자처한 이들의 명단이라면 있습니다· 이것도 한 번 살펴보시겠습니까·”
“보시겠습니까· 보시겠습니까···· 스스로 요약해서 말할 수는 없겠느냐· 응?”
“···황녀님 저는 호위 기사입니다·”
반이 입을 삐죽 내밀면서 대답하자 오로라는 픽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의 호위 기사를 놀려먹는 것은 여전히 즐거운 취미였다·
오로라의 눈이 문득 어느 한 곳에서 멈추었다· 멈출 수밖에 없는 시선을 확 잡아끄는 이름이었다·
“흥미롭긴 하다· 이 녀석이 명단에 있다니·”
불현듯 오로라의 눈동자가 초승달 모양으로 빛났다·
“재미있는 생각이 났느니라·”
오로라가 재밌는 걸 떠올렸다고 할 때마다 괜히 등골이 서늘해지는 반이었다· 어쩐지 다음 말을 듣기가 두려워서 반은 오로라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 녀석이 플란의 동료가 되도록 지정해라·”
“예?”
“명령이다· 그 편이 재미있지 않겠느냐·”
“황녀님 규정에 어긋납니다·”
반이 오로라를 만류했다·
“이 자는 이름 높은 기사입니다· 수접제의 요건에는 재학생만을 대상으로 한다 명시되어있어····”
“그러니까 요건부터 통째로 바꾸어야지·”
오로라가 씨익 웃었다·
“모집 기간을 삼일 늘린다· 재학생만 모집한다는 기준은 아예 없애버리거라· 이렇게하면 모든 문제가 단번에 해결되는구나·”
그녀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플란의 조에 이름 높은 기사가 참여하는 것도 속내를 알 수 없는 이들이 정체를 감추고 몰래 참여하려는 것도 기준을 바꾸면 한 번에 해결이 되니까·
하지만 역시 반은 염려스럽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황녀님 판이 굉장히 커집니다·”
“키우려고 하는 짓이다· 모르겠느냐· 판의 크기와 재미는 비례하는 법이니라·”
오로라는 플란의 이름을 검지 끝으로 문지른 직후 다른 이름을 문질렀다·
스칼렛 유디트·
플란의 남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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