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
던전과 관련된 자료를 조사하고 활용 가능한 스크롤들을 살피다보니 이틀따위는 금세 지나갔다·
아카데미 마법학부의 광장· 조편성을 위해 학생들이 한데모여있지만 나는 트리비아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다·
청춘이라면 으레 할 법한 연애고민 동아리 홍보 동기들의 공감을 얻어내는 유머 게시글····
당연하게도 이따위 것들에 흥미를 느껴서 트리비아를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니다·
경매 게시판·
내 이목을 끈 것은 경매 게시판이었다· 이 게시판의 흥미로운점은 경매하는 품목에 어떠한 제한도 없다는 점이었다·
[『문화로 보는 마법』 교재 팝니다· ]
[ 목소리 팝니다· 인생상담 해드려요· ]
[ 안 입는 옷 정리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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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눈에 들어오는 게시글만 하더라도 이런 식이다·
이곳에서는 판매자가 무언가를 팔겠다고 제안하면 필요한 사람들이 경매하듯 값을 매겨 낙찰받는 식으로 거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최근 내게는 금전적인 문제를 해결할 필요성이 주어졌다·
A등급을 배정받게되어 여러가지 감면 혜택을 누리게 되었지만 결국 금전이 필요하다는 점에는 변함없다·
이유는 당연히 가문으로부터 어떠한 지원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스칼렛은 내게 어떠한 지원도 하지 않겠다고 했고 나 역시 흔쾌히 동의했다·
나를 향해 생겨나는 모든 문제들을 오로지 자력으로 해결해나갈 생각이다·
‘당장 경매할 수 있는 것은 이정도인가·’
[ 마법 가르침 경매· ]
고작 일곱글자로 이루어진 게시글을 작성했다· 말 그대로 마법과 관련된 가르침을 준 다음 대가를 받을 생각이다·
과외 경매와는 명백히 다르다· 굳이 상대방을 붙잡고 이해시키려 애쓰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미다·
“야·”
별안간 누군가가가 팔꿈치로 내 팔을 툭 쳤다·
“트리비아 안 집어넣냐? 곧 교수님 오실 텐데 눈치없게·”
과한 화장품 향 분홍색의 머리카락 날카로운 손톱 귀에 가득한 피어싱····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의 이름이 아리아 폰타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상대하기는 귀찮고 트리비아의 볼일도 전부 봤다· 나는 대답 대신 트리비아를 제복 자켓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조 잘 뽑혀야 할 텐데···· 아 긴장되네·”
“그냥 원하는 사람들끼리 조 짜게 해주면 안 되나?”
A등급 새내기들이 잔뜩 모여있는 광장은 꽤 소란스러웠다· 중요한 과제를 앞둔 입장들이니 당연한 수순이다·
“아고라 보드 문제는 아직 풀릴 기미 없나?”
“좀 걸리겠지· 이제 이틀밖에 안 됐는데·”
아리아는 주변 여학생들과 쉴새없이 떠들어댄다· 아니나다를까 아고라 보드에 관한 이야기도 종종 나왔다·
이놈의 아고라 보드 이야기는 어딜가나 들려온다·
“자기만 익명 유지하는거 조금 괘씸하지 않아?”
“괘씸하긴 한데 솔직히 할 말 없긴 해· 꼬우면 풀어야지·”
“그거야 그렇지· 아무튼 누군지는 몰라도 진짜 대단하네···· 혹시 트릭시도 못푸는거 아니야?·”
“야 야 조용히해· 트릭시왔다·”
아리아의 시선을 좇아 나도 트릭시 쪽으로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트릭시라면 분명···· 술에 취해 제 몸조차 못가누던 주정뱅이·
그러나 시야에 들어오는 소녀는 주정뱅이라는 단어와는 일말의 연관성도 없어보이는 소녀였다·
흐트러진 모습은 조금도 없다· 바라보는 이조차 서늘해질 듯 표정이 심각한 푸른 소녀는 광장 한 구석에섰다·
도화지처럼 흰 얼굴에는 옅은 다크서클이 생겨있는 채였다·
“다들 주목하세요·”
그때 익숙하다면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동시에 커다란 고깔모자를 쓴 교수가 모습을 드러낸다· 바이올렛이었다·
“탐험 과제에 대해서 설명하기 전에 조 편성 결과부터 공개할게요· 철저하게 무작위로 이루어졌으니까 걱정말고·”
오히려 철저하게 무작위라서 더 걱정된다는 듯 주변 녀석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바이올렛이 손가락을 탁 튕기자 눈앞에 마나 보드가 생겨난다· 학생들의 이름이 세 명 단위로 묶여있었다·
여기저기서 희비가 교차하며 탄성이 터졌다· 안도하는 목소리도 있었고 비명에 가까운 것도 있었다·
“삼 분 줄게요· 조원끼리 모여서 서· 서로 인사도 하고·”
웅성거리며 이동하기 시작한 인파· 나는 그제서야 조원들의 이름을 확인했다·
[ 11조 ]
▶트릭시 폰 프리츠
▶마틴 루크
▶플란
내가 어떠한 조에 배정받고 나와 같은 조에 배정받은 학생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생경하다·
심지어 썩 마음에 드는 편성은 아니었다· 주정뱅이를 데리고 다녀야한다는 것이 영 내키지 않는다·
딱히 인사를 나누고싶지도 않았다·
그저 제자리를 지키는 와중 문득 트릭시 쪽이 소란스러웠다·
설마 또 주사를 부리나· 눈동자를 흘끗 굴려서 트릭시 쪽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트릭시가 주사를 부리는 것은 아니었고 웬 남학생이 달라붙어 바쁘게 말을 붙이고 있을 뿐이었다·
“잘부탁해· 나는 마틴 루크· 하하하~ 트릭시가 같은 조라니· 이번 탐험 과제는 너무 쉽겠는데?”
키는 작고 능글맞은 미소는 다소 느끼하다· 아마 저놈이 마틴 루크겠지·
“입 다물어·”
“응···?”
“입· 다물어·”
“아 응· 그래·”
녀석은 입을 꾹 다물면서도 생글생글 웃었다·
주인을 상대하는 강아지처럼 트릭시의 눈치를 살폈다· 반면 내쪽을 향해서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그쯤에서 확신했다· 11조의 편성은 최악이다·
“인사는 그쯤하고· 다들 집중하세요·”
지면을 조작하여 임의로 강단을 만들어낸 바이올렛이 학생들을 내려다보며 섰다·
“이게 스크롤이라는거 모르는 학생은 없죠·”
그녀가 두루마리 하나를 손에 쥐고서 입을 열었다·
“그럼 여기서 질문 이번 과제는 오픈 스크롤이에요· 왜일까요·”
묻는 주체가 바이올렛이라 그런지 전부 대답하길 꺼리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갑자기 바이올렛이 대답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을 뗄 기미가 없길래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어 대답했다·
“학생들 수준이 낮으니까·”
그러자 바이올렛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러고보니 또 습관적으로 반말을 사용했다·
“쟤 뭐라는거야?”
“미쳤나봐· 자기가 뭐라고····”
곁에 서있던 학생들 역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지독한 사실을 뱉었을 뿐이다·
마나를 머금은 종이에 술식을 새겨넣은 스크롤은 초보 마법사에게 있어서 꽤나 유용한 물건이다·
본인 역량으로는 결코 사용하지 못할 마법을 체험하고 마나 고갈이나 마나 정체와 같은 비상시에 활용할 수 있는 대비책이니 분명 그러하다·
그러나 바꾸어 말하자면·
여기 모여있는 학생들은 다양한 마법을 사용할 역량을 결단코 갖추지 못했다· 그렇기에 오픈 스크롤 형식의 과제를 받게되었다는 이야기다·
애초에 나는 스크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스크롤 따위에는 절대로 담기지 못할 마법만의 고유한 영역이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 마법사라고 생각하므로·
“다들 어디봐· 교수 쳐다보세요·”
나를 향해하던 학생들의 경악어린 시선이 바이올렛을 향했다· 교수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묻는다·
“수준이 낮다라· 무슨 이야기일까?”
“스크롤을 활용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수준 낮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스크롤을 활용하지 않고 극복해낸다면 배로 멋진 일이 되겠지·
그런데 그때였다· 누군가가 손을 번쩍 들면서 외쳤다·
“바이올렛 교수님!”
표정을 잔뜩 구긴 분홍색 머리카락의 소녀· 손의 주인은 아리아 폰타인이었다· 그녀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플란이 저런 말을 하는 건 너무 건방지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주제를 모르는 것 같은데요!”
바이올렛은 태연자약하게 서있는 나와 분개해있는 아리아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입꼬리를 미묘하게 말아올리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아리아 학생은 이번 시험이 왜 오픈 스크롤일 것 같아요?”
“스크롤 기술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이제 마법사들도 시대의 흐름에 발을 맞춰야합니다· 스크롤을 활용 숙련도를 높여 순발력을 키우는건 당연한 일입니다·”
아리아가 흘끗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곁눈질하며 말을 이었다·
“스크롤을 활용한다고 해서 마법사의 수준을 낮게 본다? 구시대적인 마법사들이나 할 법한 생각입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지 몰라도 너무 모르는거 아닌가요?”
바이올렛의 입꼬리가 점점 더 올라간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다시 내게 묻는다·
“플란 학생 그렇다는데요?”
나는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슬슬 상대해주는 것이 지겨웠기 때문이다·
“아리아 학생에게 대답을 들려줘야죠?”
그러나 바이올렛이 나를 재촉했다·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입술을 떼었다·
“발전을 멈추겠다는 소리로 들립니다· 스크롤에 없는 마법은 평생 못쓰겠네요·”
“뭐라고···!”
아리아의 이마에 핏줄이 세로로 섰다·
“너 미쳤냐? 결국 너도 이번 테스트에서 스크롤 활용할거잖아· 도대체 뭔데 아까부터 혼자만 특별한 척이야!”
“아리아 학생· 진정· 진정·”
바이올렛이 웃으면서 아리아를 진정시켰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미소를 숨길 생각이 없었다·
“플란 학생· 아리아의 말이 아예 틀리지는 않았어요· 이번 테스트에 참여할거면서 자꾸 그런 태도를 고수하면 조금 어폐가 있겠지· 플란은 이번 테스트에 참여 안 할거에요?”
“참여하겠습니다·”
그러자 아리아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럼 입 다물고 얌전히 참여하든가! 왜 나서서 까부는거야?”
“스크롤 활용 없이 참여하겠습니다·”
“······!”
시간이 멈춘 듯 내려앉는 정적·
아리아의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말이 툭 잘렸다· 바이올렛 역시 조금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바이올렛이 내게 되물었다·
“오픈 스크롤 테스트인데 스크롤 없이 참여하겠다는 건가요?”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올렛이 이제는 아예 소리내서 웃음을 터뜨렸다·
“본인 말을 지키려는 태도는 좋은데···· 높은 성적 받아낼 자신도 있어요? 잘 생각해야돼· 조원이 둘이나 있잖아·”
“있습니다·”
“그래요· 좋아·”
그녀가 학생들을 한 차례 둘러보면서 말을 잇는다·
“페널티를 자처했으니 보상도 있긴 해야겠지· 만약 플란이가장 높은 성적을 받는다면 11조는 다음 필기시험 면제· 이렇게 하려는데 이의 있는 학생?”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경악어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던 학생들의 눈빛은 이미 조롱과 비웃음 섞인 시선으로 변모해있었다·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하는걸로·”
탁 소리가 나게 바이올렛이 손바닥을 한 번 튕겼다·
그러자 넓은 광장에 고깔모자를 쓴 허수아비가 일정한 간격으로 생겨나고 학생들의 명찰에는 숫자가 새겨진다·
“제대로 스크롤을 사용하는지 직접 한 명씩 살필게요· 나머지는 본인 순번 기다리면서 자습 시작·”
바이올렛의 말에 학생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진다·
그때까지도 노골적인 시선 하나가 나를 향하고 있었는데 당연히 아리아 폰타인의 시선이었다·
그녀가 나를 응시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 역시 한 번 코웃음쳐주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야· 플란·”
아니 옮기려 했는데 아리아의 목소리가 나를 붙잡는다· 나는 고개만 슬쩍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 이따 나 좀 보자·”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잠시 고민했다· 아리아가 나를 재촉한다·
“이따 나 좀 보자고· 대답 안 해?”
뭐라고 대답할지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결국 못참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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