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0
거처 내부에서는 소리라는 개념이 사라진 듯했다· 스칼렛은 몇 번 정도 입술을 달싹였지만 무언가 소리를 내지는 못했다·
플란은 여전히 여유롭다· 독서에 열중하는 그의 기품이 근처의 분위기마저도 고풍스럽게 물들여갔다·
사그락 사그락·
다시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하며 플란이 물었다·
“아직 할 말이 남은 건가·”
스칼렛은 심호흡했다·
합격을 목표하여 여기까지 왔고 현재 불합격을 통보받았으니 할 말이라면 당연히 남아있었다·
“이유가 궁금하다· 세 번 모두 성공하지 않았나·”
“그래·”
플란은 스칼렛의 말을 깔끔하게 인정했다· 그러나 그렇기에 이어지는 말은 더없이 충격적이었다·
“그게 네가 불합격을 통보받은 이유다·”
스칼렛은 도무지 플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세 번 모두 성공했음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불합격을 주는 것이 모순이라고만 느껴졌다·
“도합 세 번의 과제를 통해 어떻게든 네 흠결을 찾아내려했으나 찾을 수 없었다· 완벽했지·”
“····”
“너는 이미 완성형이다 스칼렛· 내 계획에서 멀어·”
한 마디 한 마디를 추가로 들을 때마다 의문이 배로 커진다· 그녀는 애써 물었다·
“무슨 계획인지는 몰라도 우승이 목표 아니었나·”
“정확히는 둘째 황녀를 마탑으로 데려오는 것이 목표지· 평범한 우승으로는 그리하지 못할 것이다·”
이번에도 그는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우승을 구상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따위 것은 아무래도 좋다· 다만 그것을 위해 자신이 배제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스칼렛은 너무나도 뼈아팠다·
멍하니 플란을 바라보았다· 땀으로 범벅되었던 몸은 어느덧 서늘하게 말라가고 있었다·
“스칼렛 너는 훌륭하다·”
그리고 문득 던져지는 한 마디·
“누구보다도 신속했고 기척을 훌륭하게 숨겼으며 여명 나비를 목격한 것 역시 너였기에 가능했다·”
말투에 비꼬는 기색은 없다·
플란은 진심으로 스칼렛을 칭찬하고 있었다· 그것을 여실히 느끼고 있음에도 스칼렛은 자기 몸과 마음이 끝없는 늪으로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애초에 나는 여명 나비를 잡을 생각이 없다·”
그러자 스칼렛이 주먹을 꽉 쥐었다·
무슨 계획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마음먹는다면 그 계획에 맞추어 참여할 수 있을 터다·
“그럼····”
“하지만 스칼렛·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자기 말이 매듭지어지지 못하고 툭 잘린다·
“너는 나와 함께하며 얻을 것이 없어· 하나도·”
머리가 멍해졌다·
플란의 눈동자가 자신을 담는다· 그에 비친 자기 눈동자는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
시야가 어지럽게 뒤흔들린다· 호흡이 가빠서 몇 번이고 심호흡해야만 했다·
“설명은 이만하면 됐나·”
스칼렛은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몸이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않았고 그건 입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거처에는 한동안 정적이 감돌았다· 몸에서 떨어진 땀방울 때문에 스칼렛은 발치에는 마치 웅덩이가 생겨있는 것처럼 보였다·
플란은 결국 다시 책을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책장이 한 서른 개 넘어갈 때까지도 스칼렛은 발에 못이 박힌 듯 움직이지 못했다·
결국 플란이 침묵을 먼저 깼다·
“이해가 느리지는 않을 텐데·”
사실상 축객령·
“···그래· 이해했다·”
스칼렛은 그제야 반문하듯 쏘아붙였다·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처연한 몰골이었다·
“나는 전부 완벽하게 해냈다·”
“····”
“그런데도 네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
플란과 함께하는 순간을 상상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클라우드 가문의 위협에 기분 나빠하면서도 같이 시간을 보낼 구실을 찾았다며 기뻐했다·
그러나 결과는 이토록 잔혹했다·
과거의 자신은 나약해서 플란에게 민폐가 되었는데 이제는 잘 성장했기 때문에 플란과 함께할 수 없었다·
그에게 인정받았지만 기뻐할 수만은 없다· 오히려 자신의 마음이 무너지는 듯했다·
그런데도 스칼렛은 최대한 태연한 척을 했다· 고개를 푹 숙였다· 눈가가 촉촉해진 것 같아서·
“키안을 알고 있나·”
스칼렛은 말을 돌렸다·
“기억이 잘 안 나는 군·”
“베르켈에서 사망한 청운의 단장 생도·”
“기억이 났다· 한데 왜·”
“녀석의 남매가 이번 수접제에 참여한다· 조원들의 구성이 조금 수상해·”
스칼렛이 품속에서 명단을 꺼냈다· 완전히 구겨져 있었지만 내용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로 그것을 플란에게 내밀었다·
“서류상으로는 이상이 없지만 아카데미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녀석들이다· 위조되었을 확률이 높아·”
“그런가·”
“그러니까····”
내가 곁에서 호위를 하고 싶다·
그 말을 차마 내뱉을 수가 없었다· 정적이 길어진다· 어느덧 창밖으로 쏟아지는 햇볕의 각도가 서서히 기울어지고 있는 채였다·
오지랖·
결국 오지랖일 뿐이었다· 플란은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신은 이렇게 정보를 전달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터다·
함께한다는 것은 욕심인 것이다····
결국 플란이 먼저 입술을 떼었다· 그것도 아주 너무나도 대수롭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처럼·
“뭐 염두에 두지·”
그는 그렇게만 말할 뿐이었다·
“그래·”
플란이 스칼렛쪽으로 시선을 보내자 스칼렛은 도리어 고개를 푹 숙였다· 플란은 그 기현상에 굳이 의문을 품지 않았다·
스칼렛은 말없이 돌아섰다·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로 거처의 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플란이 조용히 한마디를 덧붙였다·
“고생했다·”
그러자 스칼렛의 발걸음이 우뚝 멎었다·
“····”
그녀는 플란에게 등을 보인 채로 가만히 서 있다가·
“네가 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뒤 떠나버렸다·
◈
다음 날 아침·
조원 선발은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나는 트릭시와 유시아를 선발했고 아이반과 자네트는 탈락시키는 대신 후에 함께 훈련할 것을 약조했다·
나는 기숙사로 복귀하자마자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글로 작성하기 시작했다·
‘평범한 우승이라·’
안 될 일이다· 오로라의 성격상 평범한 우승으로는 수긍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나는 ‘나비’가 아닌 ‘황녀’를 잡을 계획을 고안하는 중이다·
“완드·”
그러다 문득 떠오른 것을 중얼거렸다·
─완드를 제작해 드리지요·
코네트가 약속했던 완드를 지금까지 주문 제작 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때가 된 것 같다· 이번 행사는 재학생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에 완벽히 해야 할 터·
“나쁘지 않다·”
공개 모집의 기준이 크게 뒤바뀐 만큼 준비 기간도 늘어났다· 완드를 구비하기에는 충분할 것이라 판단을 내린 그 순간·
“주인·”
기숙사 한편에 걸려있던 그림 화중세계(畵中世界)로부터 마이에브가 튀어나왔다·
“오셨었나요· 제가 지금 막 일어나서·”
“그래·”
그녀가 곧바로 무언가를 내민다·
“황실에서 또 뭐가 왔어요· 한 번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요약했나·”
“요약해서 드리는 거예요·”
마이에브가 자신만만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건넨 자료를 보자마자 미간을 좁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 조 정원을 4명으로 늘린다· ]
[ 레헬른 언덕의 위험성을 고려한다· ]
[ 각 조마다 의무적으로 수도 기사를 배치한다· ]
레헬른 언덕이 험지라는 것을 고려하면 그리 놀라운 변경은 아니었다·
“수도 기사라·”
수도 기사라면 이미 일정한 경지에 올라 오로지 검성(劍聖)의 위치만을 남겨둔 이들이다· 그러나 내가 미간을 좁히게 만든 것은 바로 그 아랫줄이었다·
[ 스칼렛 유디트 ]
“····”
내 조에 배정된 수도 기사의 이름이었다·
“주인· 새로 만들어본 차에요· 한 번 드셔보세요·”
마이에브는 눈치도 없이 새로 차를 내밀었다· 척 보기에도 부글부글 끓어 기포가 올라오는 이상한 액체였다·
“너는 눈치가 없나·”
“죄송합니다· 이래 보여도 맛있는데·”
마이에브가 머쓱한 표정으로 그것을 들이켰다·
나는 내 조에 의무적으로 추가된 수도 기사의 이름을 두 번 정도 다시 살폈다· 그러나 역시 바라본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상관없나·”
이내 태연하게 머리를 쓸어넘겼다·
생각해보면 별일 아니었다· 나는 계획대로 나비가 아닌 황녀를 잡으면 그만이니·
똑똑─
그런데 웬 노크가 울렸다· 나는 그냥 염동으로 문을 열어버렸다·
비스듬하게 다듬어진 갈색의 단발과 어깨에 채워져 ‘회장’이라고 적혀있는 완장·
에밀리였다·
그녀는 평소처럼 한 손에는 메모장을 들고 다른 손에는 펜을 들고 있었다· 그러나 왜인지 자기 발 끝만 바라보고 있는 채였다·
“후배님~ 갑자기 미안해· 잠시 괜찮아?”
억양에는 조금도 떨림이 없지만 시선은 어째서인지 나를 마주 보지 못한다·
“괜찮다· 들어오도록·”
“아 고마워· 남자가 지내는 공간은 처음이라····”
에밀리가 조심스레 기숙사 안으로 들어왔다· 어쩐지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지만 말만큼은 당차게 내뱉는다·
“후배님 조원 선발을 마쳤다며?”
“그래·”
에밀리가 바쁘게 메모를 계속하며 말을 잇는다·
“축하해· 이제야 다른 이야기를 해볼 수 있겠네·”
“용건이 뭐지·”
“당연히 오리엔테이션이야! 아무래도 한 번 더 해야할 것 같거든· 후배님 아고라 보드에 문제 냈던 거 기억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지· 아주 쉬운 문제였다만·”
“그래· 그 덕분에·”
에밀리가 창가를 향해서 걷더니 커튼을 휙 걷었다· 그리고 이것 좀 보라는 듯 턱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드러나는 풍경·
사람들이 잔뜩 몰려있었다·
“저게 전부 네 강의 때문에 모였다고 하면 믿겨져?”
펜을 귀 위에 걸친 뒤 에밀리는 말하면서도 어이가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한동안 유심히 인파를 살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이거밖에 안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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