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1
오리엔테이션의 때가 다가왔다·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쉬지 않고 움직이며 와중에도 바쁘게 떠든다·
그러한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차분했으나 마이에브는 잠시도 가만있질 못하고 돌아다녔다· 이 종이 저 종이를 뒤섞어가며 정리하는 모습이 꽤 정신없다·
문득 마이에브가 제 이마를 짚었다·
“···하아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건지·”
그녀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이내 다시 바쁘게 움직이면서 물었다·
“주인 긴장 안 되시나요·”
“전혀·”
“이번에는 하는 편이 좋을지도 몰라요·”
마이에브가 책상 위로 종이들을 두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목판 위가 그것들로 빼곡히 채워진다·
“어디보자 우선 수접제가 코앞이죠·”
“그래·”
“주인의 전력을 파악하기 위해서 혹은 조그만 흠이라도 잡아내기 위해 방문하는 놈들이 있을 거에요·”
그다지 놀라운 소식은 아니었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데 그 인원이 전부 내게 우호적이라는 건 몽상에 가까울 터· 하여 그러한 기대는 애초부터 하지도 않았다·
“내년부터 아카데미를 다닐 신입생들···· 어린 애들은 신경도 안 쓰이실 테고 진짜 문제는 이 부분이네요·”
마이에브의 검지 끝이 어딘가를 가리킨다·
내가 이전에 작성해둔 강의 계획서에서 ‘학생의 종족을 가리지 않는다·’라고 적혀있는 항목이었다·
“학생의 종족을 가리지 않는다뇨· 주인 상식적으로 이건 좀 아니잖아요·”
“상식에서 벗어났다는 건 좋은 일이지·”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이었다·
“그래서 너는 뭐가 문제인건가·”
“다양한 종족이 모이면 무조건 싸워요· 무조건·”
마이에브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혈귀가 인간의 마법에 관심이 있을리는 없고 수인들은 온순한 편이니까 괜찮다 쳐도····”
그녀의 검지 끝이 옮겨지더니 연두색으로 칠해져있는 명단을 가리킨다·
“엘프· 얘네가 끼어있으면 무조건이에요·”
“엘프라고 했나·”
“네· 쓸데없이 마법만 잘하고 자존심은 더럽게 강하고 또 오래 살기는 엄청 오래 사는 이놈들이요·”
마이에브의 말을 들어보건대 혈귀도 엘프를 반기지는 않는 모양이다·
나는 마이에브에게 물었다·
“보통 엘프들은 인간을 어떻게 여기지·”
“엘프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래도 인간은 하찮죠· 엘프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겠다· 애초에 장수종의 눈엔 그렇잖아요·”
“하찮다라·”
사실 이전세계에서는 엘프와 인간들의 사이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종족별로 특색에 맞는 업적을 남겼기 대문이다·
나 역시 엘프를 미워하지 않았다· 장수종이라는 이점을 활용하여 오히려 상당수의 조수들을 엘프로 두었을 정도니·
“아 아니· 저는 물론 주인님을 존경하고요·”
별 생각없이 중얼거린 말에 마이에브가 해명을 했다·
“뭐 장수종과 단명종의 시선은 다를 수밖에 없지·”
“네· 시간 감각이 아예 다르니까요·”
마이에브가 고개를 끄덕인다·
외모의 차이도 차이지만 엘프와 인간 사이 가장 큰 차이점은 역시 수명(壽命)이다·
엘프의 삶은 기본적으로 여유롭다· 아니 그들은 스스로의 삶이 여유롭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다·
인간은 재능을 따지지만 엘프는 그렇지 않다·
능력에 부족함이 있다면 몇 십년을 들여서라도 채운다· 모든 분야를 그저 시간으로 찍어 누르는 게 장수종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개념이다·
마이에브가 쯧 소리가 나게 혀를 찼다·
“주인은 나이도 어린 편이잖아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괜히 시비를 걸 게 분명해요·”
“재미있겠군·”
하지만 여전히 나는 종족을 가릴 생각이 없다·
단명종이 시간의 압박에 내몰려 만들어낸 역작 장수종이 여유에 젖어 내놓을 수 잇는 연구· 이토록 고유한 맛들이 자연스레 어우러지길 바라기에·
“네 뭐· 그렇게 대답하실 줄 알았어요·”
그렇게 우리의 대화는 끝이 났다·
그런데 어느 순간·
“엘 파말 파자이·”
마이에브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한 번을 중얼거리는 것도 아니고 같은 말을 반복한다·
“에르 파말 파자이?”
하도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는 바람에 내 시선이 자연스레 그쪽으로 향했다·
“자꾸 무엇을 중얼거리나·”
“엘프어요·”
대답을 들은 뒤 도리어 의문이 커졌다· 적어도 내가 아는 엘프어에는 그런 말이 없었으니까·
마이에브는 나름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슬슬 엘프어도 익혀야죠· 본격적으로 교류가 시작되면 저도 엘프로 위장할 일이 있을 테니까·”
“부지런한 자세는 칭찬하지·”
“그러고보니 주인님은 엘프어 아시잖아요· 에르 파말 파자이· 알아들어요?”
아마도 그녀가 연습하는 것은 ‘엘 마르 파자·’ 인간으로치면 ‘안녕하세요·’를 연습하는 듯 했다·
나는 그 말을 다른 말로 바로잡아 주었다·
“마이에브·”
“네 주인·”
“엘 파르마 파자· 이렇게 발음해라·”
“엘 파르마 파자···· 아 확실히 쉽네· 이렇게 발음하는 거였구나·”
의문을 해소했다는 듯 마이에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이에브는 그 뒤로도 부지런히 연습했다·
“엘 파르마 파자이· 엘 파르마····”
나는 그녀를 뒤로하고서 기숙사를 떴다·
엘 파르마 파자이·
‘나는 노예입니다’라는 의미였다·
◈
강의실이 온통 소란으로 가득했다·
가운데의 단상을 중심으로 하여 동그란 계단이 끝도 없이 늘어진 이곳은 무려 다섯 개의 강의실을 합쳐 만들어낸 공간이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내년이면 신입생이 될 합격자들은 눈을 반짝였고 이미 재학중인 마법사 생도들도 너나할 것 없이 몰려들었다·
“혹시 여기 자리 있을까요?”
“아뇨·”
“아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넓어진 강의실과 많은 인원 여기저기서 섞이는 말소리가 어지러이 뒤섞인다· 그래도 소란에는 설렘과 기대가 스며들어 있었다·
하지만 천천히 강의실의 구역이 나뉘기 시작했다·
인간 귀족들이 앉기 시작한 곳에는 자연스레 귀족들이 자리하기 시작했고 평민들은 평민들끼리 무리를 지었다·
수인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익숙한 이들끼리 무리를 짓는 것엔 종족과 나이를 따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습성은 엘프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엘프가 나란히 턱을 괴고서 대화를 나누었다·
“인간들은 좋겠다· 겨우 이 정도로도 놀라면서 소란을 피울 수 있어서·”
“그럴만도하지· 너무 짧게 살고 죽어버리니까·”
그때 또다른 엘프가 끼어들었다·
“플란은 실제로 꽤 대단한 편이라고 하던데? 대수림에서 보기에도 제법 흥미로운 논문이었대·”
“대단하든 말든···· 너 그거 알아?”
“뭔데?”
“그 인간 대수림 근처에도 와본적 없대·”
그 말을 듣자마자 엘프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비웃음에 가까운 무언가였다·
“그건 좀 심각하네·”
“둥지를 벗어난 적 없으니 아기새나 다름없지·”
엘프들에게 대수림은 마법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이름난 마법사들도 그곳에 방문하기를 원한다· 세계수의 마나가 농후한 그곳의 위명이 워낙 높은 탓이다·
그런 그들에게 마탑은 기껏해야 인간들 사이에서 으스댈 수 있는 무언가에 불과했다·
“처음에는 인간들 특유의 호들갑인줄 알았는데 그렇다 쳐도 도를 넘었어· 세계수를 능가할 마탑이라니·”
“바로 그거지· 아무리 어려도 아무리 세상 물정을 몰라도 내뱉어서는 안 되는 말이 있는 법이야·”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
누군가의 의문형에 다들 비슷한 생각을 품었다·
그들은 오랜 세월을 살며 ‘화제의 인물’이라 칭해지는 인간을 수도 없이 마주쳤다· 그리고 대부분이 실상 별 볼일 없었다·
이번에도 그렇겠지· 제아무리 잘났더라도 결국 인간의 태생을 지닌 학생이지 않나·
“아주 가볍게 인사 정도만 해볼까?”
“그러자·”
그러나 그때까지도 조용히 침묵을 지키는 여인이 한 명 있었다·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하던 엘프들이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페리엔 넌 어떻게 생각해?”
그 부름은 도화선이 되어 다른 엘프들도 하나 둘 페리엔을 향해서 고개를 돌린다·
“그러네· 페리엔 생각도 궁금하다·”
“우리중엔 네가 제일 대단하잖아·”
‘페리엔’이라 불린 엘프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연둣빛 웨이브진 머리카락이 한 쪽 눈을 가린 탓이었다·
페리엔이 탁하고 푸른 눈동자를 천천히 깜빡인다· 그녀는 어떠한 응답도 하지 않은 채 입에 문 곰방대를 질겅일 뿐이었다·
“·····”
그녀가 침묵으로 일관하던 그때·
강의실의 문이 어떠한 소리도 없이 열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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