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2
사내는 바다를 닮아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파문 하나 일지 않을 만큼 정적이었으나 동시에 그의 존재감은 아득히 넓다·
이 순간만큼은 모두 오로지 한 명을 바라보았다·
생도 제복을 입은 모습이 상상되지 않을 정도로 멋들어진 코트· 벌어진 어깨와 높다란 키는 그 자체로 고압적이지만 걷는 행위에는 오히려 고풍스러움이 담겨있었다·
오늘 많은 사람이 모인 이유 플란이었다·
“····”
정숙 하라는 말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소란을 피우던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입을 다물고 자세를 바로 했다·
밝은 편에 속하는 강의실 조명· 날카로운 눈매와 날렵한 턱선은 그 아래에서 진정 빛을 발한다·
“마법사 플란이다·”
그리고 그가 자신을 소개하는 순간·
흑백의 세계에 색채가 탄생하듯 파문 속에 잠겨있던 강의실의 분위기가 비로소 떠올랐다·
창틈 사이 햇볕이 유난히 선명하던 때였다·
◈
“헙!”
한 소녀의 감탄이 오리엔테이션의 시작을 알렸다·
플란이 그쪽으로 시선을 향하자 소녀는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다들 모였나·”
플란의 붉은 눈동자가 천천히 주변을 훑는다· 시선을 마주한 이들은 하나같이 눈을 피하거나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분반 계획은 없다· 내 강의는 앞으로도 신분 학년 종족을 구분하지 않는다·”
“···!”
곳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워낙 다양한 군상들이 집결했기에 모두 당연하다는 듯 분반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플란은 일련의 반응을 조용히 일갈했다·
“조용·”
고작 두 글자로 소음이라 칭할만한 것들은 사라졌다· 좌중들의 시선이 다시 플란에게로 모였다·
“잡담은 허용하지 않는다· 대신 질문을 받지·”
그러자 곧바로 누군가가 손을 들고서 말했다·
“왜 종족을 구분하지 않겠다는 거야?”
질문자는 남성 엘프였다· 비뚤어진 자세로 앉은 꼴은 영락없는 소년이었지만 느껴지는 기운을 보아하니 나이가 제법 있는 듯했다·
“전부를 챙겨간다는 건 딱 질색인데···· 이거 마법 강의라며 보육 강의가 아니잖아·”
플란은 태연하게 답할 뿐이었다·
“내 수업에는 오로지 두 부류의 학생만 존재한다·”
“두 부류?”
“그래· 데려갈 학생 데려가지 않을 학생·”
플란은 질문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가르칠 마법은 종족이나 나이에 구애받지 않아· 보육이라 여겼다면 단순히 네 착각이다·”
“하·”
질문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론이면 이론 계열이면 계열 발현이면 발현···· 계획은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하는 거 아닌가? 두루뭉술한 말로 둘러대는 건 누구라도 해·”
“추가로 하나 알려주지·”
여전히 담담한 대답에 질문자가 미간을 좁혔다·
“이 오리엔테이션을 포함하여 기준에 미달하는 녀석들은 가차 없이 탈락이다·”
“처음부터 그렇게 말을 하지·”
질문자는 그제야 팔짱을 끼며 납득했다· 어마어마한 자신감이었다·
하지만 아직 플란의 말이 끝나지 않은 채였다·
“너는 예의 미달이다· 나가라·”
“···?”
예상치 못한 한마디·
당사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엘프 남성이 흥분을 억누르지 못한 채 당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나한테 한 말이야? 지금 나보고 나가라고?”
“안 나간다면 내가 내보내지·”
플란의 붉은 눈동자가 그에게로 향한다·
“····”
구부정하던 질문자의 자세가 점점 바로 펴졌다· 그가 목울대를 꿀렁이더니 결국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 나가면 되잖아· 안 들어 이따위 강의····”
그가 씩씩거리면서 빠져나간다· 플란은 그 요란한 퇴장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다음 질문·”
그는 그저 그렇게만 말했다·
◈
“다음 질문·”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리엔테이션에 정확히 1시간을 할애할 생각이었다· 15분이 지난 지금 빠르게 마무리한 뒤 무려 45분의 여유를 만끽할 생각이었으나·
정면·
오로지 엘프들만이 손을 들고 있었다· 마치 다른 엘프가 쫓겨난 사실에 항의라도 하겠다는 듯 말이다·
나는 그중 한 명을 지목했다·
“말해라·”
“아카데미에 무슨 성적으로 입학하셨나요·”
이번 엘프의 말투는 존대에 공손하고 억양은 나긋나긋하다· 얼굴에도 선해 보이는 미소를 장착한 채였다·
“F·”
“F? 가장 높은 등급인가···?”
그녀가 눈꼬리를 살짝 올리며 동료와 눈을 마주친다·
이해가 어렵진 않았다· 강의실에서 쫓겨나지 않은 채로 항의하기 위해 이러한 태도를 고수하는 듯했다·
다시 질문이 이어졌다·
“유명한 마법사는 좀 아세요? 누구로부터 영감을 얻으실까· 클레르 테리즈 크리스티····”
“전부 모르는 이름이군·”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할 필요도 없었다·
또한 영감은 오로지 마법으로부터 얻는다·
“크리스티를 모를 수가 있나?”
“기초 이론을 정립한 사람인데·”
몇몇 이들이 수군거렸다·
다른 엘프들도 하나둘 손을 들었다· 마치 범인을 취조하듯 날 선 질문을 의도적으로 이어간다·
“현재 인간들의 마법을 정립했다고 일컬어지는 레미르의 저서 「변화」는 저도 좋아하거든요· 혹시라도 관련된 내용이 앞으로의 강의에 있을까요?”
“읽지 않았다·”
막상 읽어보면 뻔히 아는 내용일 테지만 이미 알고 있는 정보가 담겨있을 것이 뻔해 굳이 손대지 않았다·
“···그러시구나·”
엘프의 얼굴에서 순간 헛웃음이 새었다·
“제가 강의에서 탈락하지 않으려면 이것저것 열심히 학습해야겠네요· 이론은 어떤 식으로 하시나요? 비법이 있으시다면 좀 알려주시죠·”
“딱히 하지 않는다·”
솔직한 답변을 몇 번 내뱉고 나니 강의실 내부가 아까와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얼어붙었다·
수인을 비롯한 다른 종족들은 얼굴에 살짝 의구심을 띄워 올렸고 내게 무언가를 기대하던 인간 마법사들의 얼굴은 다소 창백해졌다·
결국 엘프 중 한 명이 너스레를 떨었다·
“흠~ 마법 한 번 보고 싶은데·”
혼잣말 같지만 충분히 주변에 들릴만한 목소리·
그 대사에 숨겨져 있는 의도는 명백했다·
모든 종을 아우르는 강의실 중심에 네가 서는 것이 진정 옳겠느냐· 자격의 증명을 바라는 발언이었다·
‘마법이라·’
반기지 못 할 일은 아니었다· 나 역시 한 번의 발현으로 증명하는 편이 백 마디 말보다는 쉬웠으니까·
그러나 대뜸 아무 마법이나 사용할 생각은 없었다· 모든 발현에는 주제나 중심이 있어야 하는 법이니·
마침 떠오른 생각이 있었기에 나는 마이에브가 건네준 자료들을 살펴보았다· 요주의 인물로 표기된 명단 중에서 별표가 몇 개나 쳐져 있는 이름이 있었다·
“페리엔·”
그 이름을 소리 내 부르자 그것만으로도 엘프 진영의 분위기가 다소 냉각되는 것이 보였다· 나는 신청서 중에서 페리엔의 것을 찾아냈다·
[이름] 페리엔
[신청 사유] ─
[전공 계열] ─
[목표] ─
[특기] ─
그녀의 것은 이름을 제외하면 공란이었다·
그러나 나는 페리엔이는 이름이 묘하게 익숙했고 이내 그 이유를 알아챘다· 일전에 베키에게 요약을 맡겼던 「바람 원소의 응용」의 저자와 이름이 동일했다·
“「바람 원소의 응용」 저자인가·”
“맞아요· 얼마 안 된 건데 바로 아시네·”
엘프들의 얼굴에 의기양양한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잠시간 저서의 내용들을 머릿속에 되짚었다·
이 과정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진 않았다·
“페리엔은 너희 중 누구지·”
그러나 당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앞 옆 뒤에 앉은 엘프들이 눈으로 페리엔을 가리킬 뿐·
나는 페리엔의 모습을 살폈다·
한쪽 눈을 가리며 웨이브 진 머리카락 탁하게 푸른 빛의 눈동자· 입에는 웬 곰방대를 물고 있는 엘프였다·
“네 논문은 잘 읽어보았다·”
“페리엔을 몰라요? 되게 유명한데·”
옆에서 누군가가 끼어들어 답했다·
“심도 있는 연구였다· 바람 원소를 오랜 시간 접했다는 것이 느껴졌어·”
엘프들의 얼굴이 점점 의기양양해졌으나·
“그러나·”
나는 가볍게 마나를 끌어올린 뒤 그 논문에 적혀있던 술식중 하나를 떠오르는 대로 발현했다·
검지 끝에서 핑그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아주 작은 소용돌이가 회전하다 모습을 감춘다·
“어···?”
표정으로 비아냥대던 엘프 한 명이 고개를 번쩍 들더니 눈동자를 굴려 페리엔의 눈치를 살폈다·
“완성도가 높은 것은 사실이나 바람 원소라고 해서 꼭 출력에 집중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 혹시 다른 이의 영향을 받은 것인가·”
페리엔은 탁 소리가 나게 곰방대를 내려두었다· 탁한 눈동자가 아주 천천히 굴러 나를 응시한다·
“인간 씨·”
마침내 그녀가 음색을 흘려보냈다·
엘프 특유의 날카로운 눈매가 나를 응시한다·
“마법을 좀 다루시나요·”
그러자 페리엔의 주변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입을 열었어·”
“페리엔 진짜 장난 아닌데·”
나는 페리엔이 내뱉은 말을 소리 없이 뇌까렸다· 그리고 이내 터무니없는 질문의 뜻을 이해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컨디션은 평소보다도 좋았고 어느덧 논문의 내용 따위는 전부 머릿속에 들어와 있었다·
경과 시간 45분 남은 시간은 15분 남짓·
“한 번 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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