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5
살다 보면 대화 한 번 나누지 않아도 모든 게 이해되는 순간이 있다· 표정 몸짓 시선 자세와 같은 비언어적 표현도 의사를 전달하기엔 충분하기 때문이다·
내 앞을 가로막은 엘프의 태도가 딱 그러했다·
어깨까지 내려온 연둣빛의 단발머리 날카로운 귀 하지만 지금 외양 따위가 중요하지는 않았다· 불만스럽게 좁혀진 미간과 불퉁한 눈빛· 그녀는 불만을 가득 품고 있는 듯 보였으니까·
“사과해·”
그녀가 뱉은 첫 마디는 그러했다· 나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서 대답했다·
“신분을 먼저 밝혀라·”
“신분? 아·”
신분을 밝히라는 말에 상대는 쯧 소리가 나게 혀를 찼다· 나는 이런 태도를 상대하는 것 자체가 시간이 아깝다고 느껴졌다·
“테리· 그게 이름인데·”
이만하면 됐냐는 듯 테리가 나를 쏘아본다· 지켜보던 유시아와 트릭시가 저마다 하나씩 의문사를 쏟았다·
“플란 경?”
“뭐야·”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그녀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두 명의 얼굴에도 서서히 미묘한 기류가 번졌다·
“할 말은 해야겠어서·”
테리가 한 손을 자신의 허리춤에 얹으며 말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분노의 목적지는 나였다·
“플란 경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무슨 일이 있었길래·”
눈앞에 당사자가 있으니 직접 물어보면 될 터 나는 테리의 눈빛을 피하지 않으며 말했다·
“테리라고 했나 할 말이 있다면 해라·”
“페리엔에게 사과해·”
사과·
나는 1시간 동안의 오리엔테이션 과정을 되짚었다· 하지만 두 번을 반복해도 내가 사과할만한 일은 없었다·
“「격려」가 페리엔에게 있어서 무슨 의미인지 알아?”
“모른다·”
“알지도 못하면서 멋대로 재해석하고 과제로 내주지 말란 말이야· 당장 페리엔에게 가서 사과해·”
곁에 있던 유시아가 미간을 확 좁히며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나는 그것을 염동으로 붙잡았다· 내 일에 굳이 남이 나설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내 입으로 직접 말했다·
“그럴 일은 없다· 단념해라·”
“지금 내뱉은 말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그래·”
한동안 우리의 시선 대치는 계속되었다· 테리는 이내 상황이 불만스럽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아서 해· 강의 잘 되나 보자·”
몸을 휙 돌린 테리가 빠르게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별생각 없이 다음 일정을 소화하려던 그때· 이번에는 다른 학생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저기요!”
다섯 명의 소녀였다· 헐떡이는 숨과 엉망이 된 옷매무새만 보더라도 꽤 다급하게 뛰어온 모양이었다·
‘저기요’라는 말을 외치긴 했지만 그들이 누구를 불렀는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오로지 나에게로 향해있었기 때문이다·
“끼어들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런데 저 플란님 알아요!”
어려 보이는 소녀가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이전 세계에서도 숱하게 겪었던 일이기에 별생각이 없었지만 트릭시와 유시아는 이런 반응이 어색한 모양이었다·
트릭시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 정도인가·”
“그 정도죠! 저 트리비아에서 플란님에 관한 게시글이 올라오면 전부 읽어봐요!”
“저도요!”
“인사 한 번만 해주세요!”
소녀들은 지치지도 않고 병아리처럼 삐약댔다· 한 명이 트리비아를 꺼내 들자 나머지 네 명도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허겁지겁 자신의 것을 꺼냈다·
“트리비아 코드 교환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거절은 내가 아닌 트릭시가 했다· 푸른 소녀가 팔을 쭉 뻗어 내밀어진 트리비아들을 밀었다·
“호들갑 떨지 마·”
그녀가 차분한 말투로 말을 이어간다·
“우린 바쁘니까·”
“엥····”
다섯 소녀가 조용히 눈을 깜빡였다· 트릭시와 나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더니 조심스레 묻는다·
“플란님 여자친구예요?”
“여자 여자친구는 무슨· 아니야·”
여태껏 무표정이었던 트릭시의 얼굴에 드디어 변화가 생겼다· 그리고 학생들의 얼굴도 뾰로통해졌다·
“여자친구분도 아니신데 왜····”
“같이 수접제를 준비하는 입장이니까·”
“네···· 알겠어요·”
어린 소녀들은 얼굴에 물음표를 간직한 채로 물러갔다· 유시아가 고개를 양옆으로 저었다·
“플란 경 이제는 아카데미를 다니시는 것도 꽤 힘들 것 같습니다· 즉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겁니다·”
유시아가 자신의 가슴팍을 두드렸다· 주먹이 부딪힐 때마다 팡팡 소리가 나며 굴곡진 흉부가 출렁였다·
“일전에 말씀드렸던 호위가 드디어 필요해졌군요· 제게 맡겨만 주십시오!”
나는 짧게 답할 뿐이었다·
“훈련이나 준비하도록·”
◈
다음 날 아침·
코네트는 총장실을 잘 벗어나지 않는다·
이유는 단순했다· 첫 번째로는 코네트부터가 총장실을 벗어나는 걸 그리 반기지 않았고 두 번째로는 어차피 떠날 수도 없을 정도로 늘 업무가 많았다·
“잠시 괜찮을는지요·”
하지만 오늘 총장 코네트가 웬일로 먼저 나를 찾았다· 나는 막 훈련장에 들어서려던 참이었다·
갑작스러운 방문이 의외였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몇 가지 드릴 정보가 있었습니다·”
이사장은 나긋나긋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역안은 기묘하게 번뜩이고 밑의 입꼬리는 평소처럼 옅은 호선을 그리고 있는 채였다·
나는 그 전에 한마디 했다·
“혼자가 아니시군요·”
“과연 대단합니다· 플란·”
코네트가 흡족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동시에 바람이 걷기 시작했다·
평범한 첫걸음 자세를 추스르는 두 번째 걸음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걸음을 통해 바람은 인간의 형태로 빚어진다· 이내 엘프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허공에 걸터앉아 있었다·
녹색으로 웨이브 진 머리카락은 한쪽 눈을 가리고 뒤늦게 곰방대 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이제는 내게도 제법 익숙한 얼굴 페리엔이었다·
“총장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지만 오늘은 단신이 아닌지라 부득이하게 직접 방문했습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받을 정보는 무엇입니까·”
“우선 수접제의 정확한 일정이 정해졌습니다· 마법 학부로 공문이 내려왔더군요·”
이 사실을 마이에브가 아닌 코네트에게 듣게 될 줄이야· 나름대로 감회가 새로웠다·
“기간이 얼마나 남았습니까·”
“삼일입니다· 정확히 삼일 후 시작이지요·”
그리 말한 후 코네트는 내 얼굴을 살폈다·
“차분한 반응을 보니 안심이 되는군요· 재학생만을 대상으로 하던 기준이 사라지는 바람에 마법 학부에서는 요새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답니다·”
“없어도 됩니다· 제 걱정 같은 건·”
“그럼요· 걱정을 논하자고 온 것이 아니니까요·”
코네트가 손바닥을 펼쳤다 쥐자 어느샌가 그녀의 손에는 완드 하나가 들려있었다· 코네트의 역안을 닮아 흑백이 반반으로 칠해진 막대기였다·
“자리가 자리이니만큼 또한 약속했던 만큼 슬슬 완드가 필요하겠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완드 말씀이십니까·”
“예· 그대의 것 대표들의 것· 그 정도 수량이면 괜찮을는지요·”
기묘한 역안이 나를 물끄러미 응시한다·
내 입장에서는 나쁜 것이 없었다· 수접제 일정을 확인해야 했었고 완드에 대해서도 문의하려 했던 참이다· 그런데 두 가지가 지금 한 번에 해결된 것이다·
“원래라면 완드 제작은 불가했습니다· 기간이 너무나도 촉박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코네트가 미소를 머금은 채로 페리엔을 바라본다·
“이 부분은 페리엔이 힘써주기로 했습니다· 플란 그대의 바람 원소가 인상 깊었다는 모양입니다·”
페리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입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황홀한 음성이 귀를 간지럽혔다· 순간적으로 세상에 운율이 생긴 듯한 착각이 일었다· 이 음색을 듣는다면 누구라도 그리 느꼈을 것이다·
페리엔은 졸린 듯 눈을 반쯤만 뜨고 있지만 눈동자는 더없이 탁하지만 목소리만큼은 티없이 맑았다·
“높아지는 명성이 충분히 납득되는 발현이었습니다· 아직 무장이 없으시다 하니 힘을 빌려드리죠·”
오리엔테이션의 성공적인 마무리 완드의 빠른 제작 수접제를 위한 초석들이 더할 나위 없이 좋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우선 다른 것을 물었다·
“네가 엘프 무리의 대표 격인가·”
그러자 코네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건····”
하지만 이내 말을 잇지 않고서 미소를 짓는다· 흥미롭다는 듯한 눈빛으로 페리엔을 바라본다·
“···아니 본인이 직접 대답하는 편이 좋겠지요·”
“그렇게 하죠· 소개가 늦었습니다·”
페리엔이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세계수의 14번째 가지 페리엔입니다· 엘프와 교류하고자 한다면 누구라도 저를 거쳐야만 할 겁니다·”
“14번째 가지?”
“대수림의 지역구분 방식입니다· 14번째 가지는···· 이곳으로 치면 마탑이겠네요·”
페리엔의 말이 거짓은 아닌 듯했다· 애초에 마법 학부 총장인 코네트도 반박을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설령 그렇더라도·
“교류는 그만두지·”
나는 그렇게 말했다·
“····”
그러자 순간 코네트의 역안이 번뜩였고 페리엔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게 질문이 되돌아왔다·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아니 됐습니다·”
페리엔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유만 듣겠습니다· 어째서죠·”
이 엘프는 내 발현이 인상 깊었다고 했다· 바꾸어 말해 완드를 만들어주겠다고 선심 쓰듯 말하지만 사실 교류를 트고 싶은 건 내가 아닌 그녀이다·
그러니 대답을 돌려주는 건 어렵지 않았다·
“테리·”
나는 우선 그렇게만 중얼거렸다·
“테리?”
“그런 이름이었지· 이 교류를 반대한다더군·”
“····”
페리엔이 아주 살짝 미간을 좁혔다·
“말씀드렸을 텐데요· 엘프와의 교류에 있어 제 마음을 움직였다면 이미 충분합니다·”
“내 입장에서는 너나 테리나 엘프일 뿐이다·”
“···좋습니다·”
페리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한 번 알아보도록 하죠·”
다음 강의에서 테리를 볼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그저 그것이 궁금했다·
◈
원탁·
오직 수도 기사만이 입장할 수 있는 건물·
이곳은 긍지 높은 기사들이 한데 모이는 곳· 검을 다루는 이들에게 존재 자체가 신성시되는 장소·
“후우·”
스칼렛은 실로 오랜만에 이곳의 지면을 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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