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1
“다들 모인 것 같군요·”
혈귀들의 보금자리 공허·
가면을 뒤집어쓴 정장 차림의 혈귀 하나가 입을 열었다· 가면은 상하가 반전되어 입이 위쪽으로 위치해있었지만 누구도 그것을 신경쓰지 않았다·
“졸려 죽겠네· 갑자기 웬 호출이야·”
곰인형을 안은 소녀 혈귀가 입이 찢어지도록 하품했다·
“인간에게 농락당했던 기억은 그새 사라지신 모양입니다· 잠이 오시는 걸 보니까·”
“뭐? 너 미쳤냐?”
“요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란 말입니다·”
“와···· 이게 보자보자 하니까 진짜·”
소녀가 곰인형을 바닥에 집어던진 뒤 가면에게 다가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허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게 되었다·
하지만 그 순간·
“보고계십니다·”
공주의 비서가 단호하게 한 마디 했다·
“현재 공주님께서는 깨어계십니다· 저희가 회의하는 것도 전부 지켜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음·”
“····”
공주라는 말에 다투던 혈귀 둘은 급하게 자세를 바로했다· 비서가 두 인물을 번갈아가며 호명했다·
“가면·”
“예·”
정장 차림의 혈귀가 조용히 가면을 고쳐썼다·
“공주님의 명을 수행하는 자리입니다· 아군을 도발하는 짓은 삼가시길·”
“주의하지요·”
정장 차림의 혈귀가 자신의 가면을 계속해서 만지작거렸다· 그가 누군가를 죽여버리고 싶을 때 나오는 손버릇이라는 걸 모두가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걸 지금 물고 늘어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소녀·”
“왜·”
“조금은 무게감을 지니세요·”
“알았어· 알았다고·”
둘을 진정시킨 뒤 비서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림자는 아직입니까·”
“도착했어· 지금 막·”
중성적이고 듣기에 불쾌한 음색· 동시에 그림자 하나가 높이 솟아올랐다· 칠흑같이 검은 그림자임에도 불구하고 눈만큼은 인간의 것이었다·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셋이면 충분하겠군요· 오늘 무엇때문에 모였는지는 모두가 어렴풋이 이해하고 계실 겁니다·”
소녀가 어깨를 으쓱인다·
“난 모르는데···· 아 그건 알아· 마이에브가 인간에게 팔 하나 잘리고 복귀한거·”
그러자 간부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동료 간부가 팔을 잘렸다는데도 불구하고 이곳에 있는 누구도 마이에브를 걱정하지는 않았다·
비서가 손가락을 튕기자 어둠뿐이던 공허에 조명이 하나 내려앉았다· 그곳에는 팔 하나가 절삭되어있는 마이에브가 서있었다·
“····”
마이에브는 다른 간부들의 시선을 피했다·
왼손에는 플란의 노예 각인이 새겨져 있기에 공허에 방문할 때마다 팔을 도려내는 것이 필수였다·
“위장에 자신이 있다고 까불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지~ 회의도 매번 보란듯이 불참하더니·”
“간부끼리 비방은 삼가는 것이 어떻습니까· 물론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말에는 동의합니다·”
가만히 듣던 그림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간···· 인간에게 저렇게 되었다고 했던가?”
“그렇다고 합니다·”
가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래 공주님께서 관심을 두신 인간 마법사 플란에게 보란듯이 패배했다고 하더군요·”
“나약한 단명종에게 당했다는게 참···· 쯧·”
“방심이 원인이겠죠· 여기 방심했다가 당한 혈귀가 하나 더 있긴 합니다·”
곁에서 듣던 소녀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 입 다물어· 고작 인간 따위를 상대하는데 방심하지 않는 편이 오히려 이상한 거 아니야?”
“그만·”
그들의 대화를 비서가 일갈했다·
“방심은 해도 좋습니다· 다만 이번 임무에 실패했을 경우엔 스스로 목숨을 끊으셔야 할 겁니다· 잠이 깬 공주님께서는 일말의 자비도 없으실 테니까·”
“····”
공주라는 두 글자에 혈귀들이 움츠러들었다·
디아나 드 로체포르테·
혈귀들의 상징· 혈귀들의 이유· 디아나는 그러한 존재였으며 그녀 앞에서는 어떠한 혈귀도 고작 한 톨의 먼지에 지나지 않았다·
침묵을 깬 것은 소녀였다·
“뭐 공주님께서 잠이 깨실만도 하지· 인간이 기고만장해져선 결계를 없애버렸잖아· 건방져·”
“우선 임무를 하달하겠습니다·”
비서의 눈빛이 사뭇 진중해졌다·
“우리는 레헬른 언덕에서 플란을 생포합니다·”
“끝이야?”
“레헬른에 거처를 마련한 뒤 진군을 준비· 이 부분은 공주님께서 결정하실 겁니다·”
“진군이라···· 이번에는 좀 큰 건이네·”
소녀가 바닥의 곰인형을 주워들었다·
“인간한테 별로 흥미가 없으셨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그렇게까지 한다고?”
“의문을 품지 마십시오·”
비서가 일갈했다·
“저희가 공주님의 마음을 알 필요는 없습니다· 뜻이 있다면 그에 따르면 될 일·”
“뭐 그거야 그렇지·”
공주는 잠이 많을지언정 일을 그르치는 인물은 아니었다· 한 번 졸음에서 깨어버린 이상 분명 원대한 계획을 현실로 만들어내리라·
“참여한 간부는 셋·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셋이 아닙니다·”
비서가 허공을 휙 잡아당겼다·
그러자 목줄이 채워진 사내가 모습을 휙 끌려오며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괴물이라고 칭해야만 납득이 될 것 같은 외양이었다·
기괴하게 꿈틀거리는 근육과 초점 없는 눈· 그저 불길함만을 내뿜는 저주받은 살덩어리였다·
“···혈견?”
모두들 노골적으로 표정을 구겼다·
“얘 누가 풀었어· 혈견을 쓰겠다고?”
“이건 안 썼으면 합니다만·”
“공주님의 뜻입니다·”
비서가 간부들의 반발을 일축했다·
“아시겠습니까· 공주님은 진심이십니다·”
비서는 그 말을 끝으로 어둠에 스며들었다· 그녀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뒤 간부들이 중얼거렸다·
“···공주님께서 정말 진심이신 모양입니다·”
“그러게· 이러면 우리도 진심을 다하는 수밖에 없잖아· 물갈이 당하기는 죽어도 싫어·”
공주가 간부들을 싸그리 지워버리고 대체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현상을 겪고싶은 간부는 존재하지 않았다·
소녀가 곰인형을 꼬옥 끌어안았다·
“진짜 제대로 해보자고·”
“그래야겠군요· 겸사겸사 나비도 잡고·”
공허의 회의실에서 간부들이 하나 둘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이들은 곧 결계가 없는 레헬른에서 날뛰게 될 터였다·
그리고 혼자 남은 혈귀가 하나 있었으니·
“····”
마이에브 그녀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
오로라는 불편한 기색으로 수정구를 매만졌다·
평소의 나른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에 주변 관료들은 긴장을 한껏 집어삼켜야만 했다·
물론 오로라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결계를 검게 물들여?”
레헬른 언덕에 있는 결계는 두 가지·
경계선 역할을 하는 결계 혈귀를 막는 결계·
그 중 경계선 역할을 하던 결계가 검게 물들었다· 색상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내부를 관찰할 수 없다는 점은 크나큰 문제였다·
쨍그랑─!
결국 오로라가 바닥에 수정구를 집어던졌다· 둘째 황녀 구겨진 얼굴로 관료를 찾았다·
“당장 현황을 말해보거라· 어서·”
“예· 황녀님·”
관료 하나가 허겁지겁 보고를 올렸다·
“모든 조가 여명 나비 수집에 실패했습니다· 또한 스칼렛을 제외한 모든 수도 기사들이 레헬른 언덕을 벗어났습니다·”
“뭐라·”
“플란이 여명 나비를 쫓아버린 것이 원인으로 사료됩니다· 수도 기사 입장에서는 레헬른 언덕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던 겁니다·”
“빌어처먹을····”
플란과 수도 기사들이 모이게 되었으니 혈귀들을 불러들여서 그 전력을 파악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플란 덕에 그 계획이 훌륭히 틀어지지 않았는가·
우연이라기에는 너무 정교하다· 의도하지 않았다고 하기에는 고의성이 짙다· 현재의 상황이 알려주는 바는 명확했다·
“이 놈이 감히 나와 맞붙으려 하는구나·”
플란 따위를 꺾어놓는 건 일도 아니었다·
마법 학부를 눌러놓는 것도 마탑의 건설 허가를 취소하는 것도 플란의 위업을 한 순간에 묻어버리는 것도 가능한 것이 오로라였다·
이 모든 계획은 이미 서류화되어 있었다· 오로라의 서명 한 번이면 플란 따위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리라· 아니 역사에도 남지 않으리라·
“····”
그러나 오로라가 망설이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플란이 완전히 망가져버리면 곤란하니까· 미래가 보이지 않는 녀석은 처음이니 곁에 멀쩡하게 두고 관찰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내 그녀는 결단을 내렸다·
“선례를 남겨두어서는 안 되겠지·”
플란을 용인한다면 이후에도 자신과 타협하려 드는 존재들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오로라는 타협하는 법을 몰라야만 했다·
어릴 적에 도구처럼 다루어졌던 것은 결국 타협하려 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니까 자신은 영원히 타협할 수 없는 사람으로 남아야만 했다·
“다들 듣거라·”
오로라가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직접 레헬른 언덕으로 가겠느니라·”
“예?”
“놈이 나비를 놓치고 혈귀에게 짓밟히고 목숨을 애걸하는 꼴을 내가 직접 보겠다는 뜻이다·”
그 말과 동시에 출정이 이루어졌다·
오로라는 레헬른 언덕에 권좌를 옮겨놓았고 곁에서 궁중 마법사들이 마법으로 부채질을 했다· 양 옆으로 도열한 병사들은 하나같이 근엄했다·
오로라는 권좌에서 단 한 명을 기다렸다·
지금부터 맞이할 미래는 단순하다·
사람은 위기의 순간 추레해지는 법· 혈귀에게 내몰린 플란이 고개를 조아리게 된다면 오로라는 그제서야 아량을 베풀어 것이다·
그 사내는 한참 후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레헬른이 고풍스러운 장소처럼 느껴지는 착각이 일었다· 아마 이곳에 모인 모두가 비슷한 감상을 느꼈을 터였다·
그는 기숙사에서 나온 듯 깔끔했다· 흠결을 잡을 구석이 존재하지 않았고 사소한 동작 하나하나가 품격있는 격식이었다·
오로라가 먼저 침묵을 깼다·
“왔느냐·”
플란이 권좌 위의 오로라를 바라보았다·
검은 앞머리 사이로 비추는 붉은 눈동자는 깊게 가라앉아있다· 그 깊이에 담겨있는 것이 오로라는 못내 궁금했지만 어차피 곧 알게 될 터였다·
“예·”
사내가 짧게 대답했다·
황궁이 아닌 멸지(滅地)에서의 재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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