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2
둘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부딪힌다·
오로라가 낮은 음색으로 입술을 떼었다·
“내가 몸소 이곳까지 당도했느니라· 이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너는 이해하고 있느냐·”
오로라의 질문을 마주한 이들은 늘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야만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거슬릴만한 답변을 내놓는다면 보란듯이 목이 날아갈 터였으니까·
하지만 플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표정에는 어떠한 두려움도 없었다· 오로라의 눈앞에는 태연자약한 사내가 서있을 뿐이었다·
“····”
오로라는 불쾌함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신분을 놓고 따졌을 때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은 그녀였다· 평범한 태생을 지녔다면 그 누구라도 황녀인 자신의 눈치를 살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플란은 그에 해당되지 않았다·
사내는 황녀를 마주하고도 태연했고 이 험지에서도 확신을 잃지 않으며 그저 당당했다·
평소라면 그러한 태도에 흥미를 느꼈을 것이나 유감스럽게도 지금의 오로라는 그리 너그럽지 못했다·
“이해한다라· 그래 무엇을 이해했느냐·”
“궁금하셨기에 몸소 행차하신 것 아닙니까·”
“너는 황실의 결계를 건드렸느니라·”
“결계를 건드리지 말라는 조항은 없었습니다·”
“뚫린 입이라고 쉽게 내뱉는구나· 마탑의 건설을 취소하는 것도 마법 학부를 쥐어짜는 것도 내게는 쉬운 일이지···· 당장 용서를 빌어도 모자랄 판일 텐데·”
오로라의 말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네놈이 감히 외부의 관측을 차단했고 그로 인해 몸소 여기까지 방문하게 되었으니 지금이라도 고개를 조아리며 용서를 올리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플란은 잠시 고민하는 듯 했다·
오로라는 여유롭게 대답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이뤄온 행적이 전부 무너질 것을 상상하는 일은 꽤나 두려운 일일 테니까· 충격이 컸을 수도 있다·
하지만 플란이 내놓은 답변은 의외였다·
“나비는 몇 마리면 되겠습니까·”
고작 그리 물을 뿐이었다·
거짓은 없었다· 말을 돌리기 위한 무언가도 아니었고 시간을 끌기 위한 무언가도 아니었다· 그는 진정 나비의 마리수를 고민하고 있었다·
오로라는 잠시 당황하여 눈을 깜빡거렸다·
그녀의 말을 듣고도 고작 그러한 생각만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경고를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꼈나 혹은 말로만 들은 것이기에 실감하지 못했나· 어느 쪽이든간에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둘째 황녀가 혼란을 억누르고 물었다·
“내가 마리수를 말하면 잡아올 자신은 있고?”
“어렵지 않을 겁니다·”
날 위를 걷는듯한 대화가 이어지던 중 관료 한 명이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오로라에게 다가왔다· 급하게 올릴 보고가 있어서였다·
“황녀님 급하게 확인해보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결계가 사라진 탓인지 현재 기운이 심상치 않습니다· 아무래도 황궁으로 복귀하시는 편이····”
“아니·”
오로라가 씹어뱉듯 내뱉은 한 마디· 고작 두 글자에 관료는 하던 말을 멈추었다·
더없이 단호한 음색을 듣자마자 이해할 수 있었다· 황녀는 현재 누구의 말도 들을 생각이 없고 하물며 자신의 결단을 번복하는 일도 없으리라는 것을·
“전부·”
그녀의 시선은 오로지 플란에게로 향했다·
“내가 전부를 요구해도 잡아올 수 있겠느냐·”
“물론 가능합니다·”
“좋다· 딱 하루를 주겠느니라· 어디 대령해보거라· 여명 나비를 내 눈 앞에 보이거라· 그렇지 못하면····”
오로라의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그 대가를 치루어야만 할 것이다·”
오로라의 경고를 플란은 쉽게 받아들일 뿐이었다· 사내의 눈동자는 어느때보다도 차분하게 가라앉아있었고 여인의 눈동자는 어느때보다도 뜨겁게 타오른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둘째 황녀는 조용히 플란의 등을 바라보았다·
이 내기가 터무니없는 실수라는 걸 그녀가 깨닫게 된 것은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의 일이었다·
◈
둘째 황녀 오로라가 몸소 레헬른 언덕을 방문하고 수도 기사들이 떠나고 결계가 사라졌지만 수접제는 여전히 진행되는 중이었다·
내 계획에도 이렇다할 변화는 없었다·
주요한 지점마다 마력을 최대한 발라두어 일행들이 나비를 쫓아내는 데에만 전념하도록 만들었다·
“우와···· 어마어마하게 노려봅니다·”
유시아가 볼을 긁으며 중얼거렸다·
방식이 방식이다 보니 우리를 지나치는 다른 이들은 노골적으로 원망의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게 계획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인 것을·
솜뭉치같은 소녀가 눈을 반짝이며 내게 묻는다·
“플란 경· 이제 저희의 마력이 묻지 않은 곳은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는 뭘 하면 되겠습니까?”
그 눈빛이 순진무구하다· 남들의 시선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의문도 품지 않고 유시아는 그저 내 계획을 믿어주는 인물이었다·
“그만하면 됐다·”
나비를 한 마리만 잡는다면 ‘운이 좋았다’는 소리를 피해갈 수 없었을 터· 다행히 오로라는 모든 나비를 잡아오라고 내게 당당하게 요구했다·
반길 수 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그만하면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성과일 테니까· 바꾸어 말해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따위의 고민은 전혀 하지 않았다·
물론 모든 일행이 유시아처럼 해맑게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저것 의문을 품고 앞으로의 일을 염려하는 소녀도 있었다·
트릭시였다·
“결국 모든 나비를 보란듯이 쫓아버렸네·”
“덫을 놓는 과정일 뿐이지·”
트릭시는 입술을 몇 번 달싹이더니 내뱉으려던 말들을 집어삼켰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연 것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쫓아낸다와 잡는다의 의미를 헷갈린 건 아니냐고 한 번쯤은 묻고싶었는데···· 뭐 생각이 있겠지 너도· 물론 나는 아직 이해하지 못했지만·”
예전에 비하면 고집은 많이 죽었는데 툴툴거리는 것은 되레 늘어난 느낌이다· 나는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트릭시에게 물었다·
“트릭시·”
“왜·”
“그런 것 치고는 가장 열심히 하지 않았나·”
“····”
어떠한 의도도 없이 내뱉은 말· 실제로 마력을 칠해두는 것에 가장 열심히 참여한 것은 트릭시였다·
아니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어떠한 행동 강령을 내려주어도 그녀는 효율적이고 착실하게 수행해냈다·
“그거는 그야····”
트릭시가 남색빛 눈동자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나 시선을 먼저 피해버리는 것 또한 그녀였기에 내 입장에서는 다소 의아할 뿐이었다·
“왜 말을 잇지를 못하나·”
“믿어주는 거지· 뭘 굳이 묻고있어·”
그녀의 볼이 살짝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시선은 여전히 나를 마주하지 못하는 채였다· 그렇게 짧고도 이상한 대화는 끝을 맞이했다·
아니 끝을 맞이한 줄 알았는데·
문득 트릭시가 발끈하듯 물었다·
“근데 너· 왜 아무런 감상이 없어·”
“감상?”
“그래 감상· 뭔가 반응이 있어야 할 거 아니야· 부드러웠다 따뜻했다 하다못해 몇 번째였다····”
트릭시가 말꼬리를 흐리며 자신의 입술을 검지 끝으로 매만졌다· 이번만큼은 그 의미를 이해할 것 같았다· 아마 입맞춤의 감상을 요구하는 모양인데·
“정말 듣고싶나·”
나는 가볍게 되물을 뿐이었다·
“듣고싶다면 들려주지·”
“읏····”
트릭시의 얼굴이 한층 더 붉어진다· 그녀가 입술을 오물거리며 무언가라도 내뱉으려던 순간·
픽─·
픽─·
“····”
잠시 세상의 색이 사라졌다 생겨났다·
나는 차분하게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찰나의 순간 세상을 흑백으로 물들였던 기운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뒤였다·
중요한 것은 분명 찰나의 순간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해 방금 느낀 것은 착각이 아니다· 실제로 세상이 잠시 무채색으로 물들었었다·
상념에서 벗어나게 만든 것은 웬 불퉁한 목소리였다·
“이봐 너희·”
엘프 마법사들이 불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인원은 셋· 역시 수도 기사는 없었다·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비를 다 쫓아내는 거야· 자꾸 이런 식으로 할래?”
그들의 날카로운 귀가 쫑긋거리며 움직인다·
이렇듯 엘프들의 감정은 신체 변화로도 여실히 읽힌다· 이전 세계에서도 그랬지만 참 자존심이 강하고 또 건방진 족속이었다·
나는 우선 한 가지를 물었다·
“너희들은 방금 느끼지 못했나·”
“너희가 칠해둔 마력? 진해서 못 느낄 수가 없던데·”
헛다리를 짚는 것을 보니 확실해졌다· 순간 세상이 무채색으로 물들었던 것은 감각이 예민한 엘프들조차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의 기교였다·
“아무튼 너네 나비좀 그만 쫓아내라·”
그런데 그때였다·
“자꾸 그런 식으로 하면···· 그런 식으로 하면···· 그런 식으로 하면····”
엘프의 눈동자가 위로 서서히 올라가더니 이내 완전히 뒤집혔다· 흰자만 드러나있는 꼴은 이미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의 얼굴을 손톱으로 쥐어뜯으며 중얼거렸다· 살이 파일 정도로 강한 악력이었지만 현재 그런 것 따위는 중요치 않은 듯 했다·
“어라? 나 왜 같은 말을···· 같은 말을···· 같은 말····”
그렇게 중얼거리던 순간·
픽─·
다시 한 번 세상이 무채색으로 물든다·
동시에 촤악 하는 소리와 함께 엘프의 육신이 찢어진다· 사냥개를 연상케하는 혈귀 하나가 울부짖으며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갈기갈기 찢어진 엘프의 살덩어리가 주변으로 후드득 흩뿌려진다·
“뭐야!”
“혈 혈귀?”
엘프의 몸을 찢고나온 사냥개는 주변 인물들을 사정없이 공격하기 시작했고 갑자기 언덕 이곳저곳에서 폭발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쾅─ 쾅─!
그 소란 속에서 나는 보호막을 펼쳐낼 뿐이었다·
유시아와 트릭시 그리고 스칼렛은 다행히 멀쩡했다· 하지만 모두들 답을 갈구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채였다·
“의외로 여명 나비는 붉은 마나를 선호한다· 즉 혈귀들은 여명 나비를 채집하기가 참 쉽지·”
나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비들은 안전하다· 전부를 쫓아냈으니·”
가만히 듣던 트릭시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나비는 안전하다치고 우리는?”
“알아서 살아남아야지·”
단순한 사실이었다·
내 말을 한박자 늦게 이해한 트릭시가 눈을 부릅떴다·
“아니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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