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3
···또 한 번 세상이 무채색으로 물들었다·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지만 이번에는 더 강렬했다· 지축을 뒤흔드는 충격· 귓전에 때려박히는 굉음· 혈귀들의 등장으로 상황은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뭐 뭐야!”
“혈귀야? 일단 피해!”
레헬른은 또 한번 멸지(滅地)라는 위명에 가까워지게 되었다· 사냥개의 모습을 띈 괴수들은 개체를 늘려가며 날뛰기 시작했고 수접제의 참가자들은 당황감을 좀체 숨기지 못했다·
스칼렛을 제외한 수도 기사들이 전부 레헬른을 떠난 채였다· 남은 것은 기껏해야 인간 마법사 인간 기사 수인 엘프 정도·
가장 큰 전력이 없어진 상황에서 혈귀들을 마주하게 되었으니 참가자들 입장에서는 많이 좋지 않은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플란 경!”
그러한 와중 유시아가 나를 소리쳐 불렀다·
“결계 결계를 보십시오!”
나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갈수록 전황을 꼼꼼하게 파악할 필요성은 컸으니까·
“흐음·”
경계선 역할을 하던 결계가 붉게 물들었다·
물론 고작 색깔만이 변화한 것은 아니었다· 정교한 흑마법이 설계하고 생명력을 매개로 하여 보강한 내외부의 출입을 완전히 차단하는 결계가 되었다·
이 또한 혈귀들의 소행이겠지·
“분담해! 당장 전투를···!”
“재정비가 먼저잖아!”
다른 참가자들은 혼란이 큰 모양이었다· 그럴만도 했다· 아름다운 여명 나비를 기대하고 왔건만 눈 앞에 펼쳐진 건 육체를 집어삼키는 괴수였으니까·
“하이씨 그럼 도망치든가! 재정비해!”
모두들 현장에서 물러나기 시작했지만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결계가 내외부의 출입을 차단하는 상태였으니 애초에 후퇴라고 볼 수도 없었다·
뿔뿔이 흩어지는 행위일 뿐·
나는 일행들에게 지시했다·
“내 근처로 모이도록·”
내 판단이 옳았다는 것은 이내 결과가 되어 드러나기 시작했다· 허겁지겁 자리를 벗어나던 기사들의 몸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더니 펑 하고 터져버렸다·
인체가 비눗 방울처럼 폭발한 뒤에는 역시 검붉은 사냥개들이 그것을 집어삼키며 등장한다· 트릭시의 얼굴에도 당혹감이 번졌다·
“몸 안에서 나오잖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유시아가 식은땀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혈견 다른 말로는 공포흡수자라고 부릅니다· 타인의 공포를 집어삼키며 강해지는 녀석입니다·”
“그럼 참가자들의 몸이 폭발했던 이유는····”
“공포를 느껴서겠죠· 집어삼켜진 겁니다·”
트릭시의 눈이 흔치 않게 휘둥그레졌다·
“말이 돼? 공포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삼켜진다고?”
“그래서 저도 들어본 적만 있는 겁니다· 혈견을 마주한 뒤 살아남은 이는 거의 없을테니까요·”
혈견·
그것을 마주한 내 감상은 짧았다·
“추하군·”
눈은 세 개가 붙어있고 인간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것도 거뜬히 가능할 것 같은 주둥이 그 모습이 추레하고 불쾌하여 공포따위는 느낄 겨를도 없었다·
“또한 그리 대단한 녀석도 아니건만·”
사실 수도 기사를 제외하더라도 이곳에는 유능한 인물들이 많았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기습이었다는 점 참여자들간의 소통 부재 혈견의 존재를 모르는 이들도 많을 것이라는 점···· 다양한 요소들 전부가 문제였다·
모두 나름의 방식대로 대응하긴 했지만 성과가 나진 않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이는 참가자들의 대부분이 폭발하며 혈견의 훌륭한 양분이 되어버렸다·
캬아아악─!
그때 바위만큼 거대한 혈견 하나가 내게 날아들었다·
하지만 혈견이 허공에 붙박인 듯 잠시 멈추더니 이내 그것의 머리에 은색 실선이 세로로 그어졌다·
촤악 하는 소리와 함께 내게 쇄도했던 혈견이 정확히 반으로 갈라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스칼렛이 재빠르게 검을 휘두른 것이다·
“플란 괜찮나·”
스칼렛이 나를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반응하지 못한 것 같길래·”
“글쎄·”
엄밀히 따지자면 스칼렛의 손목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기에 가만히 있었던 것이지만 나는 그러한 것들을 굳이 세세하게 설명하지는 않았다·
다만 정작 신경쓰이는 것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스칼렛이 나를 이름으로 불렀다는 점이었다·
“안 하던 짓 하지마라· 스칼렛·”
“안 하던 짓도 반복하다보면 하던 짓이 되는 법이다·”
스칼렛과 짧게 대화를 나누던 그때·
“조심해!”
트릭시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캬아아악─!
동시에 두 마리의 혈견이 내게 쇄도했다· 스칼렛이 재빠르게 둘을 양단해냈지만 그것들은 베인 몸이 오히려 또다른 개체로 불어나 다시 달려들었다·
“플란 경! 괜찮으십니까!”
“전부 너에게만 달려드는 중이야!”
두 소녀의 외침은 거짓이 아니었다· 이 후텁지근한 전장의 한가운데에서 개체수를 늘린 혈견들은 오로지 나를 향하여 화살처럼 몸을 쏘아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잘 된 일이다·”
진심으로 나는 그리 대답할 수 있었다·
혈견들이 지면을 박찼다·
“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비명을 지르는 유시아·
동시에 총 여덟 마리의 혈견이 하늘로 솟구친다· 아가리를 쩍 벌리고 날아오는 모습이란 도약이라기보단 비행으로 표현해야 알맞은 행태였다·
나는 조용히 손바닥을 맞붙였다·
마나를 끌어올릴때쯤 혈견들은 이미 미간 앞까지 와있다· 타인의 공포를 집어삼키며 몸을 쏘아낸 속도는 벼락과도 견줄만하다·
바로 그 순간 마법의 발현은 이루어진다·
콰직─!
보이지 않는 주먹이 움켜쥔 듯 혈견들의 육체가 통째로 뭉개졌다· 터지는 피는 튀지 않도록 염동으로 적당히 걷어냈다·
“주인이 누군지는 몰라도···· 참 한심하군·”
아직까지는 딱 하찮은 수준이었다· 아득히 많은 양의 공포를 흡수한다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파스스스─
내게 뭉개진 혈견은 한낱 먼지처럼 흩어졌다· 유시아와 트릭시의 얼굴에도 이제야 화색이 돌았다·
“역시 플란 경! 멋진 처치였습니다!”
“처치가 아니다· 다른 곳으로 흡수된 것이지·”
녀석을 짧게 상대하며 얻어낸 정보가 세 가지 있었다·우선 혈견은 분리와 합체가 자유로이 가능하며 이것을 조종하는 주인은 따로 있는 듯 했다·
나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지시를 하달했다·
“내가 엄호하지· 너희는 근처를 탐색하며 마주치는 이들에게 겁먹지 말라 전하도록· 보아하니 녀석이 공포를 필요 이상으로 삼키면 귀찮아질 듯 하다·”
모두들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이내 일행들은 자신이 맡은 바를 착실하게 수행하기 시작했다·
“모두 두려움에 떨지 마라! 놈은 공포를 양분삼는 괴수야 그것만으로도 위험을 피할 수 있다!”
스칼렛이 외치는 것은 종족을 불문하고 효과가 좋았다· 이곳에 남은 유일한 수도기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한계는 존재했다·
쾅! 콰앙─!
여기저기서 검붉은 마나의 폭발이 이어지는 상태였다· 바닥에는 깊은 구덩이가 파이고 인간의 말소리는 너무나도 쉽게 묻히는 상황이었다·
스칼렛이 내 쪽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육성으로 전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폭발 때문에 시야도 넓지 않고! 이대로는 어렵겠어!”
혈견은 공포를 양분삼는 녀석이기에 현재로서는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하지만 이 사실을 빠르게 전달할 수 없다면····
“한 번에 보여주는 수밖에 없겠지·”
딱─!
내가 손가락을 튕겼다·
동시에 무수히 많은 염동력들이 사방에 널려있는 혈견들의 머리통을 한 대씩 때렸다· 덕분에 다른 참가자들을 쫓던 혈견들이 모두 내게로 시선을 집중했다·
크르르륵─·
혈견들이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이를 갈았다· 도발에 당했다는 것 정도는 인지한 모양이었다·
“부산물들 주제에 굳이 까불 것 없다·”
장대한 마나를 끌어모아서인지 앞머리가 몇 번정도 위로 뜨기 시작했다·
그 기운에 반응한 것인지 혈견들은 저들끼리 서로 물고뜯으며 뭉치기 시작했다·
크르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뭉친 혈견들의 크기가 더없이 거대해졌다· 나는 그것의 얼굴을 굳이 올려다보지 않으며 중얼거렸다·
“부디 네놈이 알고 있기를 바라지·”
담담하게 말을 잇는다·
“지금 그게 마지막 공격 기회다·”
혈견은 알고있다는 듯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내게 기어코 공포심을 심어주겠다는 듯 몸을 날렸고·
동시에·
후웅─!
칼날처럼 벼려져있던 마나들이 매섭게 휘몰아치며 일대를 찢었다· 공간 자체를 분해하는 듯한 참격을 둔한 혈견따위는 반응할 수 없었다·
그저 우둔한 눈으로 멍하니 상황을 관조할 뿐·
순식간에 주변이 초토화되었다· 바위와 지면에는 온통 검에 베인듯한 흔적이 흉터처럼 남았다·
혈견은 다진 고기처럼 변모했을 뿐이다·
“와····”
누군가가 감탄했다· 모두들 나를 바라보았다· 복잡한 얼굴들이었지만 확실히 공포는 줄어든 채였다·
나는 혈견의 사체를 치워내며 말했다·
“할 일 해라· 가만히 서있지 말고·”
그제야 다른 이들이 엉거주춤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이한 일은 그 다음 순간 발생했다·
“저 저거 뭐야!”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귓전을 때렸다·
갈려나갔던 혈견의 살점들이 엉겨붙기 시작했다· 죽었던 것이 되살아나는 광경만큼이나 이상한 것도 없겠으나 그게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다시 혼란스러워하기 시작했다· 나조차도 잠시 망설였다· 이제 이곳에서 공포를 생산하는 이들은 없을 텐데·
“흠····”
하지만 결론은 하나·
공포를 생산하는 자가 있다는 말이 된다· 공포흡수자를 보란듯이 부활시켜놓을 정도로 엄청난 공포를 뿜어내고 있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누구인지를 생각하기는 어렵지도 않앗다· 내 시선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감옥처럼 생겨난 저 멀리에 살짝 보이는 결계에게로 향했다·
“···오로라·”
황궁의 병사들과 오로라가 저 좁은 결계 안에 갇혀있다· 공포가 저 안으로부터 뿜어져 나오고 있다는 것은 굳이 보아서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잠시 그녀를 구해야만 하는 이유를 떠올렸다·
또한 혈견을 막아내서 모두를 지키겠다는 영웅같은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오로라가 버젓이 마탑에 다니는 것이 모양새가 좋다는 판단이 섰다·
또한 그녀가 살아남아야지만 내 승리도 보여줄 수 있지 않겠나·
“스칼렛· 혈견을 붙들어들 수 있겠나·”
스칼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조용히 오로라를 가둔 소형 결계에게로 향하기 시작했다·
평화···· 안전····
그 따위 것에는 관심 없다· 다만·
그녀에게도 누가 우위인지를 알려주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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