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5
소녀 혈귀의 목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머리를 잃은 몸통이 꾸물거리며 원상 복구되는 광경이란 어떻게 보아도 보기 즐거운 광경은 아니었다·
“····”
플란은 말없이 기운을 끌어올렸다·
헤라의 기운까지 끌어올리며 뇌리에 설계를 시작했다· 어떠한 작업을 몇 번 반복해야 상대의 숨통을 끊어놓을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을 짐작했다·
이내 술식이 완성되었다·
플란이 게슴츠레하게 눈꺼풀을 밀어 올렸을 때쯤 건너편에는 어느덧 머리를 복구한 소녀 혈귀가 있었다·
다만 고난도의 마법이었기에 발동에 제약이 붙었다· 소녀 혈귀가 먼저 마법을 발현해야만 이 마법진도 효과를 발하게 될 터였다·
일종의 반격 마법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단순하네· 이게 끝이야? 인간·”
소녀 혈귀는 입가에 비웃음을 얹으며 눈을 빛냈다· 허공에서 핏방울이 흐르기 시작했다· 생명력을 매개로 하는 흑마법의 특징이었다·
“단순한 공격이지·”
플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한 것이 사실이나 단순한 것은 단점이 아니다·
또한 그는 이토록 오만한 혈귀를 제압하는 법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것도 이전 세계에서부터·
“일전엔 내 혈액을 역류시켰었지? 재미있었어· 이번에는 너도 당해보면 좋겠네···· 어때?”
화륵─!
혈귀의 혈액이 불타오르며 마법진이 발현된다· 그 덕분에 플란의 마법 역시 발동 조건을 갖추었다·
소녀 혈귀가 딛고 있었던 지면에서 육망성이 푸른 빛을 발했다· 누구라도 시작을 인지할 수 없을 속도·
플란이 굳이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반격의 마법진은 설계도를 따라 철저하게 그대로 발현되었다·
일순간 세상이 정지한 듯한 착각이 일었고 푸른 원기둥은 도무지 끝을 모르고 위로 솟아올랐다·
콰아아아─!
혈귀의 몸이 허공을 부유하며 베어진다·
푸른 원기둥 내부에는 무수히 많은 마력 칼날이 존재한다· 그중 하나가 또 한 번 목을 베어냈다· 그에서 그치지 않고 육신의 중심부를 세로로 양단한다·
한 번 또 한 번 또 한 번·
흡사한 방식으로 정교한 절삭이 반복된다· 배를 가로로 갈라 상반신과 하반신을 나누어버리고 흩날리는 장기조차도 식자재처럼 썰어버린다·
손목 발목 손가락···· 이내 말단 마디까지도 세부적으로 절삭해간다· 절삭 속도는 무언가를 인식하는 속도를 아득히 앞서간다·
“뭐라고····”
소녀 혈귀는 잘린 머리로 중얼거렸다· 끝없이 솟아오르는 원기둥 내부에서 자신은 무력했고 육체는 끝없이 난자당하고 있었다·
콰득─!
그러나 플란은 관측조차도 허용치 않았다· 마력 칼날이 소녀의 뇌를 깨부수고 안구는 터뜨려버렸다·
플란이 입을 연 것은 그때쯤이었다·
“분명히 언급했을 텐데·”
간단한 것을 언질 줬었고 거짓을 말한 적은 없었다·
“숨통을 끊어주겠다고·”
소녀 혈귀가 「재생」을 발현하려 했지만 그럼 플란의 마법 역시 발현된다· 푸른 원기둥이 다시 솟아오르며 소녀 혈귀를 무수히 많이 베었다·
아직 자리를 완전히 떠나지 못했던 엘프들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넋을 놓았다·
◈
오로라는 여전히 이물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전황이 슬슬 유리하게 뒤바뀜에도 그러했다·
궁중 마법사와 황실의 마법사들은 절대 무능하지 않았다· 이들은 곧바로 견고한 방진을 짜서 혈귀들에게 대처했고 훌륭하게 오로라를 지켜냈다·
황실의 인물들이 그간 훈련을 허투루 받지 않았음을 체감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혈귀들에게 목을 내어주게 되었을 터·
물론 여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 이 검붉은 결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안전을 확신할 수는 없을 테니까· 오로라는 습관적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후····”
괴이했다·
‘혈견’이라 불리는 괴수가 특히 그러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공포를 형상화하여 빚어지는 존재라니·
추상적인 감각을 매개로 빚어진 괴수였기에 혈견의 미래를 관측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러한 점은 오로라에게 이물감을 주었다·
여유와 자신감은 자고로 ‘앎’에서 나오는 것이다·
정보는 바꾸어 말해 ‘힘’이다· 관찰과 측정으로 수집한 자료는 당연히 그것을 보유한 자의 위치를 높인다·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오로라는 현재 그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전황이 유리해진 듯 보여도 오로라가 불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줄곧 해답과 비교하며 살아왔던 삶에서 이제는 답안지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
오로라는 강박적으로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살폈다·
미래가 보인다· 보이지 않는다· 보인다· 보이지 않는다····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인간은 플란과 엮여 미래를 관측할 수 없게 되었고 상식이 통하지 않는 혈귀들의 미래도 살필 수 없다· 황실의 혈통을 제외하면 자신에게 남은 것은 없었다·
식은땀을 흘리는 오로라의 당혹감을 인식한 것인지 호위 기사 반이 신중한 태도로 말문을 텄다·
“황녀님 괜찮으십니까?”
작은 목소리는 아니었기에 궁중 마법사들을 비롯하여 병사들의 목소리까지도 오로라에게 닿았다·
오로라가 어떠한 감정을 느끼는지는 이곳에 있는 전부의 관심사였다· 그들은 이러나저러나 황녀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 목숨이었으니까·
오로라는 차분하게 심호흡했다·
자신이 나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혼란이 배로 커질 것이다· 또한 얕보일 것이다· 그러니까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결코 위엄을 잃어서는 안 되었다·
“···당연한 걸 묻고 있느냐·”
물론 그러한 답변을 들은 뒤에도 모두 오로라의 모습을 조심스레 살폈다· 평소와 다르게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은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히 소리 내 되물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오로라가 그렇다면 그렇게 넘어가야만 했다·
호위 기사 반이 입을 열었다·
“주변은 정리가 된 것 같습니다· 결계는 해독이 이루어지고 있고 추가로 다른 일을 지시하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오로라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검붉은 결계는 아카데미의 경기장만 한 크기에 황실의 인물들만을 가두고 있었다·
딱히 추가로 무언가를 지시할만한 것도 없었고 모두의 지쳐있는 기색을 보니 무언가를 지시하더라도 효율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마침내 오로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휴식해라· 결계가 해제되면 다시 움직인다·”
역시 가장 안전한 수를 택했다· 두통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기에 사실 오로라부터가 좀 쉬고 싶었다·
여기저기서 안도 섞인 호흡 소리가 터져 나왔다·
혈견은 적어도 상식이 통하지 않는 괴수였다· 제아무리 황실의 인물들이라 하더라도 무수히 불어나는 수를 상대하다 보면 숨이 차오를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휴식에 집중하기 시작한 그때·
“커헉···!”
누군가의 숨이 멎는 소리가 들렸다·
오로라는 그 소리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크게 지친 누군가가 물을 마시다 사레라고 들린 것이겠지·
촤악─!
하지만 다음에 들린 소리는 도무지 지나칠 수 없는 것이었다· 본능이 경종을 울리는 서늘한 감각 날붙이에 육체가 잘려 나가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모두의 시선이 소리의 근원지로 향했다·
그리고 일순간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
앞머리가 눈을 가린 듬직한 기사·
오로라의 호위 기사 반이 병사 한 명의 목을 베어버린 채였다· 비현실적인 광경에 오로라는 몇 번 정도 눈을 깜빡여야만 했다·
뚝─ 뚝─
반이 쥔 검날 끝에서 핏방울이 떨어진다·
“반?”
오로라가 미간을 좁히며 기사의 이름을 불렀다·
이곳의 병사중 반과의 훈련을 거치지 않은 이는 없었다· 그렇기에 충격은 막대했다· 오로라에게 누구보다도 많은 충성을 바치는 이가 반이었으니까·
“····”
반은 조용히 검을 고쳐 쥘 뿐이었다·
그 눈빛은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알 수 없는 서늘함을 오로라만 느낀 것은 아닌 듯했다· 궁중 마법사 한 명이 다급하게 외쳤다·
“공격해라! 지금 당장!”
하지만 그 외침에도 불구하고 아직 많은 이들이 얼어붙어 있을 뿐이었다· 궁중 마법사는 빠르게 마탄을 생성하여 쏘아냈다·
그러나 반은 움직임만으로 그것을 피해냈다· 그의 검이 물 흐르듯 춤을 추며 마법사를 베어버렸다·
그리고 동시에 모두가 위화감을 느꼈다·
“···!”
검을 휘두르자 뒤이어 붉게 남는 잔상· 그것은 분명 혈귀들이 보유한 ‘생명력’의 여파였다·
도대체 왜 반에게서 생명력의 잔상이 남는가 하는 의문이 뇌리를 스쳐 갈 때쯤· 반의 몸과 검이 몇 번이고 재빠르게 움직였다·
“컥 커헉!”
“끄아악!”
급소를 베인 병사들이 지푸라기처럼 쓰러진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은 잔혹하고 일방적인 학살극이었다·
“반격해!”
진을 갖춘 궁중 마법사들이 재빠르게 마법을 쏘아내며 대처했다· 마나를 정교하게 다듬은 마탄은 하나하나가 빛살과도 같았다·
그러나 반은 그것을 파훼했다·
그가 검을 휘두르자 궁중 마법사들의 손목이 일시에 몸에서 분리되었다·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튀기는 것은 한 박자 뒤의 일이었다·
“사 살려···!”
“크헉!”
비슷한 비명이 반복되며 황실의 인물들이 하나둘 쓰러졌다· 동료들을 살해하는 반의 얼굴에는 어떠한 망설임도 죄의식도 없었다·
훈련용 허수아비를 베듯 그는 태연했다·
마침내 반과 오로라만이 남게 되었을 때·
오로라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반···· 네놈이 지금 무슨 짓을····”
오로라의 호흡이 거칠어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반의 미래가 보이지 않았지만 한없이 큰 불길함을 지금 느끼고 있었으니까·
“이게 무슨 짓이냐· 너는 분명····”
“너는 분명이라·”
반이 픽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인간은 그 말을 참 좋아하더군요· 너는 분명 너는 분명···· 상대를 안다고 착각하면 그런 말이 나오지요·”
호위 기사의 시선이 오로라에게로 향했다·
“혈··· 귀···?”
오로라의 등허리를 타고 소름이 흘렀다· 그간 보아왔던 미래에 이런 것은 없었다· 이제는 어디부터 어디까지 신뢰해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반이 오로라를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오로라는 뒤로한 걸음 물러섰다·
둘은 그것을 반복했고 어느 순간 오로라의 등이 검붉은 결계에 닿았다· 이제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오로라가 중얼거렸다·
“반···· 가까이 오지 마라·”
“둘째 황녀 오로라·”
호위 기사가 손바닥을 쭉 편 뒤 자기 얼굴을 좌에서 우로 스윽 훑었다· 그러자 반의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웬 가면을 쓴 혈귀가 남게 되었다·
“아직도 제가 당신의 호위 기사로 보이십니까·”
확인한 적 없었던 미래가 오로라가 전혀 납득할 수 없는 현실이 현재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가면 너머에서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또한 아직도 본인을 황녀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주인공 플란의 표지가 완성된 기념으로 3연참을 준비해보았습니다·
모쪼록 좋은 밤 보내시고 또 늘 행복한 일이 가득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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