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8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잔혹한 참상이었다·
궁중 마법사를 비롯한 병사들은 누구 하나 숨이 붙어있지 않았고 심지어 시체조차도 온전하게 보전된 이가 없었다·
아무래도 혈귀의 실력이 평범한 수준은 아닌 듯했다· 내가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혈귀는 자기 몸을 완전히 복구했다·
“마침 당사자가 나타났군요· 플란 반갑습니다· 줄곧 지켜봐 왔지만 이렇게 조우하는 것은 처음입니다·”
혈귀는 오로라의 모습을 띤 채로 하녀나 취할법한 인사법을 취했다· 그 행동에는 오로라를 능욕하겠다는 의도가 다분히도 녹아있었다·
“제 이름은 더스크입니다·”
당연히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따라서 그 이름은 내게 어떠한 감상도 전달해주지 않았으나 기운만큼은 달랐다· 혈귀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기척을 숨기지 않는 존재다· 강한 기운을 과시하는 걸 미덕으로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녀석은 보란 듯이 기척을 숨기고 있었다· 나름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뇌리에 각인된 본능을 의지로 이겨낸다는 이야기가 되니까·
그리고 이내 그 이유를 이해했다·
“네게는 인간의 피가 섞여 있군·”
더스크가 살짝 눈썹을 꿈틀거렸다·
“관찰력이 굉장히 뛰어나시군요·”
“관찰이랄 것도 없다· 얼굴에 쓰여있으니·”
내가 한 글자 한 글자를 내뱉을 때마다 더스크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일었다· 눈꼬리는 휘어지고 입은 미소를 지었지만 정작 느껴지는 것은 살의였다·
“한 번도 읽힌 적 없었던 사실인데···· 과연 공주님께서 눈독을 들이신 이유가 조금은 이해됩니다·”
나는 오로라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밤하늘의 일부를 도려내어 엮은 듯 검은 머리카락· 달을 담아낸 듯한 신묘한 눈동자· 굉장히 미적인 일련의 요소가 지금은 한없이 초라했다·
뺨은 얻어맞은 듯 부풀어 올라 있고 검붉은 결계를 겨우겨우 짚고서 서 있는 모습· 요동치는 눈동자는 크나큰 충격에 젖어있는 듯했다·
더스크의 시선도 오로라에게 따라붙었다·
“아···· 황녀에게 볼일이 있는 겁니까? 그렇다면 우리 대화 전에 딱 한 가지만 확실히 해두고 가죠·”
문득 오로라의 형상을 지닌 더스크가 자신의 어깻죽지에 단검을 박아넣었다· 동시에 오로라가 창백해진 얼굴로 자기 어깨를 붙잡는다·
“으극···!”
더스크는 무표정으로 자신의 신체를 난자하고 몸에 어떠한 위해도 입지 않은 오로라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바닥에 쓰러진다·
“아 아파 아파···!”
황녀가 애원하듯 중얼거리며 발작했지만 더스크는 그 뒤로도 자기 몸을 몇 번이고 찔렀다·
결국 오로라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숨만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마치 매일 학대당한 고양이의 모습이었다·
더스크가 나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보셨습니까? 「동기화」라는 흑마법입니다· 황녀를 살리겠다는 생각이 있다면 버리세요· 이거 한 가지만 확실하게 해두고 대화하죠·”
나는 더스크의 눈을 가만히 응시할 뿐이었다· 신나서 말을 이어가는 태도가 어쩐지 우스웠기 때문이다·
“그럼 옆에는 시체를 뒀다고 생각하고 진한 대화를 나눠볼까요· 플란 우린 당신을 생포할 겁니다·”
그리 중얼거리며 더스크가 핏물을 주륵 내뱉었다·
그럴 만도 했다· 오로라의 모습을 뒤집어쓴 자신의 외형을 온통 난자했으니· 굳이 신체를 복구하지 않는 건 오로라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서일 터·
나는 조용히 답했다·
“참 하찮은 계획이군·”
“응할 생각이 없다는 듯한 반응이네요· 이유는 뻔히 짐작이 갑니다· 인류애인가요? 아니면 사명감?”
한심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더스크가 어깨를 으쓱였다·
퍽─!
그리고 돌연히 오로라의 명치를 걷어차 버렸다·
“커헉─!”
반사적으로 입이 벌려진 오로라의 입에서 송곳니가 번뜩인다· 이걸 특히나 자세히 보라는 듯 더스크가 오로라의 입가를 툭툭 찬다·
“안타깝지만 이 여자는 혈귀에요· 그러니까 애초에 인류애라는 말이 성립될 수도 없는 거죠·”
더스크는 태도를 싹 바꾸어 오로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친절한 손길이 더 무섭다는 듯 오로라는 벌벌 떨며 눈물만 흘렸다·
내 대답은 짧았다·
“알고 있었다·”
잠시 정적이 내려앉고 더스크가 미간을 좁혔다·
“····”
한동안 시선의 대치가 이어진다·
“허세일까요· 혹은 태연한 척인가요· 어느 쪽이든 좋습니다·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이니까요·”
더스크가 말을 이어간다·
“이 기특한 인형은 당신 같은 인간을 찾아내기 위해 설계되었고 당신이 인간을 등지도록 행동하게 되어있습니다· 뭐부터 이야기해야 이해가 빠를까요?”
검지 하나를 자기 턱 위로 얹고 눈동자를 위로 올린 뒤 더스크는 기쁜 기색으로 말을 이어갔다·
“아 그래· 당신은 오늘부로 황녀시해자의 낙인을 얻게 됩니다· 당신의 가문도 마탑을 향한 계획도 평화롭던 아카데미 생활도 전부 끝이에요·”
“흠·”
“마주치는 인간마다 당신을 혐오감 짙은 눈빛으로 바라볼 겁니다· 그걸 굳이 보고 싶나요? 서서히 마모되어가는 마음을 굳이 체감하고 싶어요?”
더스크가 손 하나를 내민다·
“편하게 제 손을 잡으시죠· 세상에는 지름길이 존재합니다· 공주님과 함께라면 힘든 과정을 전부 건너뛰고 달콤한 결과만을 얻는 것도 가능합니다·”
바닥에 쓰러진 오로라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바닥에 얼굴이 파묻혀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딸꾹질 비스름한 울음소리가 자꾸만 밖으로 새었다·
하긴 ‘황녀시해자’라는 말이 언급되었다· 그녀 입장에서는 곧 죽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온 셈이나 다름없으니 두려울 테지·
그 모습이 우습다는 듯 더스크가 오로라에게로 걸어갔다·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몸이 걸으니 마치 시체가 거동하는 듯했다·
더스크는 오로라의 등을 꾹 짓밟은 뒤 머리채만을 쥐고 들어 올렸다·
“어라 울고 계셨나요? 눈물 없는 인형으로 설계했었는데···· 역시 고장이 난 모양입니다·”
더스크는 눈물로 범벅된 오로라의 얼굴을 살폈다·
“인간의 표정은 잘 읽혀서 좋단 말이죠· 공포가 절반 공포가 절반이고····”
문득 더스크가 눈살을 찌푸렸다·
“후회? 미안함? 이따위 감정은 왜 읽히는 겁니까· 이건 제가 좋아하는 감정이 아닌데····”
더스크는 나와 오로라를 번갈아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이럴 수가 설마 플란을 상대로 느끼는 감정입니까? 제대로 고장이 났군요· 제대로 고장이 났어·”
이내 더스크는 오로라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기 시작했다· 마치 체한 아기를 달래듯이 말이다·
“오로라· 후회할 것 없습니다· 후회도 반성할 것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당신은 인형의 역할을 다했고 이제 수명이 다했을 뿐입니다· 그저 그뿐인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바들바들 떠는 오로라에게 얄궂게 속삭인다·
“···굳이 미안해하고 반성할 것도 없는 거예요· 당신이 할 일은 그저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뿐이에요·”
“으으 하아 하아····”
오로라의 턱 끝에서 쉴 새 없이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황녀는 몇 번이고 심호흡했고 이내 눈이 죽은 눈이 되어간다· 호흡이 차분해진다·
“그래요· 그 감정이에요· 바로 그 감정·”
“으····”
“체념· 인간의 분수에 가장 알맞은 감정입니다· 또한 너무나도 아름다운 감정의 편린이죠···· 미학이 있어요· 저는 이게 가장 마음에 듭니다·”
더스크는 계속해서 오로라를 토닥였다· 황녀의 호흡은 갈수록 차분해져 가고 눈은 초점을 잃고 죽은 눈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오로라는 절대 멍청하지 않다·
내가 무려「동기화」라는 고난도 흑마법을 쓰는 혈귀와 전투를 굳이 치를 필요는 없었다· 인간들의 원망을 받게 된다면 혈귀들의 선봉에 서면 그만이었다·
그러니 스스로부터가 알고 있으리라· 내게는 그녀를 구할만한 이유가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애초에 오로라와 나 사이에는 어떠한 연도 없다· 연이 있더라도 굳이 따진다면 악연일 터였다· 서로 간에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다만 나는 물었다·
“황녀시해자라고 했나·”
“예· 어마어마한 죄목이죠· 대륙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감당할 수 있을 만한 것은 아닙니다·”
“확실히 재미는 없군·”
그러자 더스크의 얼굴에 승리감이 어렸다·
오로라의 얼굴 위에 떠오른 체념은 한층 짙어졌고 더스크는 곧 손뼉이라도 칠 듯했다· 이내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요· 재미없는 과정 따위는 우리 건너뛰어 버립시다· 달콤한 결과만을 곱씹도록 하죠·”
더스크가 안아주겠다는 듯 양팔을 벌린 순간·
“한심한 것·”
선명한 고화력의 직선이 더스크의 심장을 꿰뚫었다· 더스크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내려 자신의 가슴팍을 바라보았다·
“····”
그녀가 천천히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지금 뭐 하자는····”
그러나 나는 그녀가 말을 이어갈 틈을 주지 않았다· 고화력의 직선이 연달아 이어진다·
다리 심장 허파 배 갖가지 부위를 추가로 꿰뚫린 더스크가 이내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좋습니다· 화려한 신고식이군요· 황녀를 손수 죽이는 선택이라니! 분명 공주님께서도 기뻐하실겁니다!”
그러나 잠시 후 더스크의 얼굴에 당혹감이 번졌다·
“···!”
정작 오로라가 멀쩡했기 때문이다· 더스크가 몸을 천천히 재생하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무슨···? 동기화가 되어있을 텐데?”
“너는 인류애라는 말을 했었지·”
나는 대답을 들려줄 뿐이었다·
“더스크· 내게는 원래 그따위 것이 없다·”
어느덧 재생을 마친 더스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을 비틀어 뚜둑 소리를 내며 내게 묻는다·
“허세는 그만두십시오· 굳이 힘든 과정을 자처하는 이유가 뭡니까? 당신은 똑똑한 편일 거라 믿었는데·”
“시시하다·”
내 뒤에서 노란색의 광원들 열 개 정도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신호를 주는 순간 이것은 더스크를 벌집처럼 만들어버릴 것이었다·
“세계를 거머쥐는 것 온 인간에게 혐오 받는 것···· 전부 해보았다· 꽤 시시하더군·”
나는 더스크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니 이번에는·”
마침내 광선이 쏘아진다·
“더 흥미롭다고 느껴지는 것을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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